242화
전쟁의 준비. 우성은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할 의사를 밝혔다. 다른 거라면 몰라도 억겁에 가까운 시간 동안 준비한 전쟁에 한 팔 거들겠다며 하는 부탁인데, 디아블로가 매몰차게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지지. 그래, 부탁이 뭐지?”
“저와 싸워 주십시오.”
망설임 없는 대답에 디아블로의 표정이 사라졌다. 부탁이라고 하면 힘을 원한다거나 할 줄 알았다. 지금의 우성에게 디아블로가 마땅히 해 줄 수 있는 보상은 없지만, 그래도 가능한 선에서 도와줄 생각은 있었다.
하지만 설마하니 싸워 달라는 부탁일 줄이야. 하긴, 생각해 보면 그럴 듯한 요구이기도 했다. 마검 벨제뷔트, 그리고 아포피스의 완전한 형태를 가지게 된 우성은 자신의 상태를 확실하게 인지할 필요가 있었다.
오히려 기꺼운 일이었다. 어중간한 상태라면 우성은 다른 몬스터를 잡거나, 방금 전 아스타로스에게 싸워 달라고 부탁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벨제뷔트나 디아블로 자신에게 대련을 부탁한다는 것은, 아스타로스 정도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일 터.
이미 우성은 아포피스가 초(超) 마검일 때에도 <대리인>을 사용한 상태에서 마왕이나 대천사에 가까운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실제로 <대리인>을 사용한 상태에서 대천사인 다니엘을 죽인 경험도 있었다.
마검 벨제뷔트의 힘을 흡수하고, 아포피스가 신(神) 마검이 된 지금, 우성은 아스타로스를 비롯한 다른 보통 마왕들 정도로는 <대리인>을 사용한 자신의 한계를 알아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떠올린 게 바로 벨제뷔트와 디아블로였다.
“제법 재밌는 생각을 했어. 싸워 달라고? 잘못하면 죽을 지도 모를 텐데?”
“어차피 죽어도 몇 번은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감안하고 있다는 거군. 뭐, 그렇다면야.”
딱-.
디아블로가 손가락을 튕겼다. 공간이 일그러지며 우성의 눈앞으로 새로운 장소가 나타났다. 거대한 산 두 개를 사이에 두고 있는 평원이었는데, 마법에도 능통한 디아블로가 다크듐 밖의 다른 장소로 우성과 함께 이동한 것이다.
“……편리하군요.”
“몇 가지 재주 중 하나지. 치천사 녀석보다 힘은 떨어지지만, 이런 재주는 내가 훨씬 많지.”
디아블로는 맹약을 어기고 힘을 잃은 뒤, 자신의 능력을 보충할 다른 여러 방법들을 강구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마력을 이용한 학문인 마법이었다.
텔레포트. 사실상 이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는, 태초에 사라진 마법이었다. 게이트를 이용하지 않고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마법은 단순히 난이도를 떠나 지금에는 불가능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디아블로는 맹약을 어긴 뒤, 텔레포트를 비롯해 지금에는 사라진 마법을 몇 가지 배워두었다. 마기와 마력을 접목한 그의 마법은 마법의 선구자라는 용들과 비교해도 훨씬 높은 수준이었다.
“길게 이야기 할 것 없이 바로 시작할까? 뭐 준비 할 거라도 있나?”
디아블로는 우성의 힘이 사뭇 궁금했다. 억겁에 가까운 시간을 살아온 디아블로였지만, 창세신 아포피스라는 존재는 아직까지도 그에게 있어서는 미지의 존재였다. 신중에서도 최상급의 신, 그리고 자신을 창조한 존재라는 것 외에는 아는 게 없었다.
그 아포피스의 힘이 처음 세상에 나타난 건 삼천 년 전, 인간의 등장 때였다. 하지만 그는 지금의 우성처럼 아포피스를 완전한 단계까지 끌어 올리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 디아블로는 처음 우성이라는 존재를 알았을 때, 그렇게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삼천 년 전 가브리엘을 죽이는데 한 팔 거들었던 그 인간 정도만 되어도 충분히 만족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우성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여주었다. 삼천 년 전 인간이 루시퍼와의 합작으로 가브리엘을 죽였다면, 우성은 혼자서 대천사 다니엘을 죽이는 성과를 보였다.
더군다나 지금은 아포피스가 완전한 형태를 찾은 상태. 겉으로 보이는 검의 모습은 변화가 없었지만, 적어도 우성에게서 느껴지는 힘의 크기는 군주급 악마들 중에서는 아스타로스 외에는 더 이상 적수가 없을 정도다.
‘시작한다.’
우성은 디아블로와의 싸움에 가진바 스킬 모두를 동원했다. <광폭화>, <유체화>, <초감각>을 비롯해 마지막 스킬은 <대리인>까지.
<대리인>의 발동에 우성은 평소와는 달리 아무런 느낌도 받을 수 없었다. 분명 스킬이 사용됐다는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는데, 시야가 붉어진다거나 하는 변화는 없었다.
‘스킬 레벨이 맥스(Max)라서 그런가?’
그런 생각이 들 무렵, 디아블로의 표정이 변하는 게 보였다. 아포피스가 언급됐을 때만큼 놀란 표정이었다.
“……그건 뭐지?”
“네?”
“아포피스님의 힘인가? 지나치게 순수하지만 어쩌면… 내 힘보다도 더 어두울지도 모르겠군.”
디아블로의 말에 우성은 자신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껏 몸 속에서 맴돌던 마기가 <대리인>을 사용함과 동시에 몸 밖으로까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은 보통 마기가 아니었다. 우성은 자신의 몸 안에서 맴도는 거대한 마기와 자신의 몸 주변을 맴돌기 시작한 마기의 차이를 알 수 있었다. 몸속을 맴도는 순수한 마기와는 달리, 우성의 몸 주위를 맴도는 마기는 순수한 마기를 제외한 잔여물에 불과했다.
순수한 마기.
마기란 신력과는 달리 어둡고 탁한 기운이었다. 그것은 악마라는 존재가 생겨나고, 그 힘이 생길 때부터 변하지 않았던 불변의 진리였다. 그 힘의 성질이 순수하게 변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마기라고 부를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우성이 몸속에 가득한 마기는 마기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순수했다. 특히나 우성은 지금껏 <대리인>을 사용하면 아포피스의 마기와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던 마기가 뒤섞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우성의 마기는 우성의 것만이 아니었다. 루시퍼의 마기, 디아블로의 마기, 벨제뷔트의 마기 등, 여러 악마들의 마기가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 모든 마기가 ‘아포피스’라는 거대한 존재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었다.
어둠이라는 성질을 가진 마기. 그리고 그 마기를 태초부터 가지고 있던, 그 힘을 창조한 존재의 힘.
우성은 드디어 진정한 의미로 아포피스의 마기를 손에 넣었다.
“……사실 무슨 변화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거울이라도 주고 싶군. 지금 네 꼴이 어떤지.”
우성 스스로는 잘 모르고 있지만 겉으로 보이는 우성의 모습은 꽤 달라져 있었다. 몸 주위를 맴도는 마기의 부산물, 그리고 흰자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까맣게 변한 눈동자. 겉으로 보기에는 이미 자아를 잃어버린 모습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경계하거나 할 디아블로가 아니었다. 영원의 시간 동안 디아블로는 기이한 모습을 한 존재를 여럿 만나보았다. 그 중에는 다른 종족의 신도 있었고, 우성처럼 특별한 힘을 손에 넣은 악마나 인간도 있었다.
하지만 그 중 디아블로가 경계한 대상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위 종족의 신이나 고위 용 같은 경우만 하더라도 디아블로는 코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들 정도로는 디아블로라는 거대한 존재에게 위협이 되지 않으니.
하지만 <대리인>을 사용한 우성을 눈앞에 둔 디아블로는 적잖이 감탄하고, 경계했다. 우성이 가진 힘의 성질이 얼마나 순수한 마기인지는 알겠지만, 그 크기가 감히 가늠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 시작이나 하지.”
구구구구구-.
디아블로와 우성이 서 있는 평원이 뒤흔들렸다.
**
9회 차.
3달에 한 번, 새로운 플레이어들이 들어오는 시기가 있었다. 시작의 마을의 입구에 있는 게이트에서는 막 배치고사를 마친 플레이어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어리둥절한 표정들이었다. 배치고사만 끝나면 모든 게 끝날 줄 알았던 이들은 낯선 세상에 발을 들였다는 사실에 당황해 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이미 아포칼립스라는 세상을 순순히 받아들인 듯 보이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안현수와 전현승은 이번 9회 차 플레이어들의 인솔을 맡게 되었다. 8회 차에는 붉은악마 클랜의 부 마스터인 안병환이 그들을 인솔했는데, 이번엔 우성이 포함된 대악마 클랜에서 그 일을 맡게 되었다. 붉은악마 클랜에서 특별히 부탁한 일이었다.
“저 녀석들 보니 처음 여기 왔을 때 생각나네.”
“안현수씨나 우성씨는 7회 차였죠?”
“네. 전현승씨가 5회 차라고 했나요?”
“벌써 그렇게 됐네요. 9회 차라… 10회 차가 되기 전에 전쟁이 끝나기는 할지 모르겠습니다.”
배치고사가 중간에 끼어있는 이 시점에서는 선악공성이 일어나지 않는다. 즉, 디아블로가 만들어 놓은 게이트가 열리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저 게이트는 아포피스가 만든 거겠죠?”
“그러겠죠. 플레이어들을 불러들인 게 아포피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안현수와 전현승은 얼마 전, 우성에게 아포칼립스가 만들어진 배경에 대해 듣게 되었다.
태양신의 대적 악마인 아포피스는 악마들을 창조하고, 태양신 라는 천사들을 만들었다. 아포피스는 플레이어라는 존재들을 이용해 길고 긴 전쟁을 끝낼 계획을 진행했고, 거기에 맞춰 태양신 라 또한 천사들을 도울 플레이어들을 불러들였다.
선악공성의 게이트는 디아블로가 만든 것이지만 플레이어들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게이트는 아포피스가 만들었을 확률이 높았다.
“우성씨는 어디서 뭘 하고 계신답니까?”
“현실에 갔습니다.”
“현실에요? 요 근래에는 장비를 구한다느니 스텟을 올린다느니 바빠 보였는데요.”
“이 세상을 다 더한 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거든요.”
**
소원의 방은 오랜만이었다. 포인트를 사용해 빌 만한 소원도, 포인트를 올릴 일도 없어서 한동안은 이곳에 올 일이 없었다.
오더를 눈앞에 둔 우성은 잔뜩 상기된 얼굴이었다. 어린아이처럼 들뜬 듯하면서도,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처럼 울먹이기도 했다. 지금 이 순간, 우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가슴 벅찬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많이 달라졌군.”
“잡담은 됐고, 소원 하나 빌지.”
“말 해라.”
“서현이의 병을 완전히 고쳐 줘. 수명도 다시 보통 사람들처럼 돌려주고.”
우성은 길게 이야기 할 생각이 없었다. 어서 빨리 오더에게 소원을 빌고, 서현이의 건강한 모습을 보고 싶었다. 모든 병이 다 나은 서현이의 얼굴을 보고 꽉 끌어안아주고 싶었다.
“……필요한 포인트는 10만 포인트다.”
“지불하지.”
“플레이어 이우성, 정말 그 포인트를 한 명의 사람을 위해 사용할 생각인가? 그 포인트라면 현재 플레이어 우성이 가진 힘을 하위 신에 필적할 만큼 끌어올리는 것도 가능하다. 지구의 세상이 뒤집힐 만큼…….”
“오더. 닥치고 내 말 들어. 번복은 없어.”
한 시가 바쁘다. 우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살벌한 눈빛으로 오더를 노려봤다. 신과 같은 힘이든, 세상을 바꿀 만큼 거대한 소원이든, 다 필요 없었다. 우성에게는 그 모든 것을 더한 것보다 소중한 딸아이가 있었으니까.
플레이어가 이렇게 나오는 이상, 오더에게는 더 이상 소원을 강조할 권한이 없었다. 그는 플레이어가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이끄는 역할을 하지만, 좋은 아버지로 이끄는 역할은 없었다.
“……플레이어 우성의 소원이 승인되었다.”
[비(非) 플레이어 이서현의 수명이 정해진 운명에 따라갑니다. 모든 병이 회복됩니다. 앞으로 이서현은 크고 작은 모든 병에 대한 면역을 가집니다.]
[100000포인트를 소모하였습니다.]
드! 디! 어!
우성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서현이가 처음 태어나고부터 지금껏 자라오면서까지, 힘들고 행복했던 순간이 머릿속에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목적의 달성을 축하한다.”
평소 좋게 생각하지 않았던 오더였지만, 우성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가 고맙게 느껴졌다. 그를 통해 소원을 빌고, 서현이의 병이 완전히 나았다. 이제는 아포칼립스에서 자신이 끝까지 살아남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힘없이 무너진 자리에서 우성은 눈물을 흘렸다. 믿는 신 같은 건 없었지만, 우성은 그 자리에서 누군지 모를 대상에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