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우성의 정신이 돌아왔다. 언제부턴가 정신을 잃고 아포피스의 세계로 빨려들어갔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왼 손에 쥐고 있던 벨제뷔트는 사라져있었다.
‘끝난 건가?’
기분이 이상했다. 정신력 스텟이 갑작스럽게 늘어나면서 새로운 세상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마력 스텟과 마기 스텟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다른 스텟들 역시 비교적 적긴 하나 큰 폭으로 스텟이 늘어났다.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몸속에서 마력과 마기와 같은 힘들은 꿈틀거리는데, 정작 피로가 쌓여 몸은 쉬기를 원했다. 아무래도 마기와 마력의 충돌로 인해 꽤 지친 모양이었다. 허기도 많이 졌고.
그래도 속으로는 적잖이 기뻤다. 드디어 그토록 원하던 신(神) 마검을 달성했다. 불가능, 혹은 아득히 먼 훗날에나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아포피스의 최종 형태를 이루어낸 것이다.
“하하하.”
웃던 중, 우성은 아포피스를 만난 순간을 떠올렸다.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던 무형의 검은 공간. 우성은 그곳이 바로 아포피스라는 거대한 신이 존재하는 또 다른 세상이라고 생각했다. 태양과도 같은 덩치를 가진 아포피스가 살아가기 위해 이 세상은 너무 보잘 것 없이 작았으니까.
‘그를 만나도 내가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지.’
아포피스를 마주친 순간, 우성은 알 수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를 마주하고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잃고 영혼이 사라질 것이다. 그는 그 정도로 위대하고, 위험한 존재였다. 보통 사람이 아니라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그와 눈조차 마주칠 수 없을 것이다.
우성이었기에 그나마 아포피스와 눈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와 눈을 마주친다는 것은 그 정도로 높은 정신력과 의지를 요구하는 일이었다.
‘덕분에 꽤 큰 힘을 얻었다.’
동시에 그 힘의 대가로 반드시 해야만 하는 거대한 짐 하나를 떠맡았지. 이미 예전부터 짐작으로 생각해 오던 일이었지만, 디아블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존재라는 치천사 가이아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라의 검도 남아있지.’
어쩌면 치천사만큼이나 높은 벽이 태양신 라의 검을 가진 플레이어일지도 모른다. 그는 아포피스를 손에 넣은 자신보다 더 이전부터 아포칼립스에서 활동해왔다고 했으니까. 라의 검을 다룬 것도 훨씬 오래 된 일일 것이고, 어쩌면 라의 검을 완전하게 다루는 방법도 이미 예전에 터득했을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우성에게 아포피스가 있다고 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우성이 라의 검을 깨부술 수 있는 것처럼, 라의 검 역시 우성의 아포피스를 깨부술 수 있을 것이다. 치천사가 아니더라도 이래저래 복잡하긴 마찬가지였다.
“상태.”
[플레이어 정보]
이름 : 우성
직업 : 아포피스의 대리자
국적 : 대한민국
진형 : 악마
성별 : 남자
칭호 : 신(神) 마검의 주인
클레스 : SS
[능력치]
- [근력 : 98] [민첩 : 101] [체력 : 105] [맷집 : 96] [반사능력 : 85] [마력 : 135] [정신력 : 152] [마기 : 124] [PP : 1860]
: (- 1100p)
* 플레이어 특성 : 불굴의 의지 Lv.13 <상세정보>
* 업적 : 마왕의 길을 이끈 자, 최고악의 은총을 얻다, 개미소굴을 소탕하다, 대천사의 씨앗을 제거하다, 대천사를 제거하다
* 포인트 : 99755p
* Lv. 포인트 : 1053
* Life : *******
“……대단하긴 하네.”
자신의 플레이어 정보를 확인한 우성은 입이 떡 벌어지는 스텟들에 말을 잃었다. 얼마 전에도 충분히 한 명의 랭커 플레이어 소리를 들을 정도의 스텟이었는데, 지금 우성의 플레이어 정보는 단순히 ‘랭커’라는 개념 자체를 뒤집을 정도였다.
스텟은 수치가 낮을수록 올리기가 쉽고, 높을수록 올리기가 훨씬 어려웠다. 그 때문에 높은 수치의 스텟을 올리기 위해서는 보다 좋은 업적 보상을 얻거나, 대량의 포인트를 지불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정론이었다.
랭커 플레이어가 랭커라 불리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단순히 대여 수련장에서 검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스텟을 올리기 어려운 70포인트의 구간. 그 이후 30포인트 이상의 수치를 올린, 스텟 포인트 세 자리를 기록한 플레이어는 극히 드물었다.
때문에 스텟 포인트 하나 이상을 세 자리 수를 기록한 플레이어들을 가리켜 아포칼립스에서는 ‘랭커 플레이어’라고 불렀다. 우성 역시 한 때 마력과 정신력, 두 개의 스텟을 세 자리를 기록하며 랭커 플레이어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우성은 이미 다섯 개의 스텟 포인트가 세 자리 수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 중 근력과 맷집은 거의 세 자리 수에 가까운 스텟이었고, 마력과 정신력, 마기 스텟은 세 자리수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마기 스텟이포인트부터 시작한 이른바 ‘특수 스텟’임을 감안한다면 훨씬 더 값어치가 있을 것이다.
‘정신력은… 벌써 100포인트 중반이군.’
헛웃음이 나올 정도다. 이 정도면 랭커 플레이어들 서넛 정도는 손쉽게 가지고 놀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아니, 어쩌면 그조차도 우스울지도 모르지.
정확한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제대로 된 몸 상태로 움직여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100포인트가 넘어선 스텟 포인트는 1포인트 하나하나가 큰 차이로 다가왔다. 특히 마기 스텟과 마력 스텟은 우성의 힘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스텟이었다.
‘신(神) 마검의 주인이라… 거창한 칭호가 생겼군.’
대천사를 제거하다, 라는 칭호가 사라지고 신(神) 마검의 주인이라는 칭호로 갱신되었다. 칭호는 업적과는 다르게 상위 호환의 칭호로 바뀌는 시스템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무려 대천사 다니엘을 죽여 얻은 칭호였다. 우성은 웬만하면 이 뒤로 칭호가 바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대천사장 라파엘이나 치천사 가이아를 죽이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하지만 신(神) 마검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우성이 알기로 신(神) 이라는 글자와 마(魔)라는 글자가 동시에 들어간 장비는 여태까지 없었다. 그만큼 현재 우성이 가지고 있는 아포피스라는 장비가 가진 의미는 절대적이었다.
‘하긴, 이 세상이… 우리가 이곳에 오게 된 이유가 이거 하나 때문이니까.’
우성은 아포피스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몸을 대자로 눕히고 쉬었더니, 슬슬 몸에 힘이 들어갔다. 얼마나 몸이 지치고 힘들었으면 <불굴의 의지>까지 활성화된 상태였다.
“며칠이나 지났으려나.”
**
우성의 귀환 소식에 밖에 나가있던 혜정과 안현수는 급하게 돌아왔다. 숙소로 돌아와 보니 거실에서 급하게 식사를 하고 있는 우성이 있었다.
“어딜 다녀 왔냐? 한 달 동안.”
돌아오자마자 안현수가 한 말은 그거였다. 혹시 죽은 게 아닐까 싶었던 차였는데, 귀환하자마자 게걸스럽게 밥을 먹는 모습을 보니 안심도 됐다.
우성은 잠시 우물거리던 음식물을 꿀꺽 삼키더니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일단 먹고 이야기 하자.”
그러더니 다시 먹기 시작한다. 질긴 고기를 입 안에 넣고 씹더니 샐러드로 입 안의 기름기를 없애고, 면 요리를 후루룩 빨아들였다. 평소 점잖게 먹던 편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로 게걸스럽게 먹는 건 처음 봤다.
“……한 달 동안 굶기라도 했냐?”
“으음.”
“응? 응이라고?”
어이없다는 듯한 안현수의 물음에 우성은 말보다는 고개로 대답했다. 어쩐지 조금 말랐나, 싶었는데 숙소를 떠난 한 달 동안 물 한 모금, 고기 한 점 먹질 못했다니 그럴 만도 했다.
“……대체 뭘 한 거냐, 너.”
안현수의 물음에도 꿋꿋이 식사를 하던 우성은 배가 조금 채워지자 잠시 식기를 내려놓았다. 급하게 음식을 내온 혜미는 말끔하게 비워진 접시를 치웠다.
“뭐, 그냥 이런 저런 일 좀 했지.”
“밥 한 끼 못 먹을 만큼 바쁜 일이었냐?”
“그럴 틈이 없더라고. 아, 이제 좀 살겠다. 사실 힘든 거보다 배고픈 게 제일 힘들더라.”
한 달 동안 굶었다니 죽을 먹였어야 한다는 둥, 그렇게 오래 굶었던 거면 말을 해 주지 그랬냐며 혜미가 불평을 했다. 하지만 어차피 몸뚱이가 보통 사람과는 확인히 다르게 튼튼한 우성에게는 한 달 정도 굶고 음식물을 먹었다고 탈이 나거나 할 일은 없었다.
“그래서, 일은 잘 됐고?”
“생각보다 많이.”
“뭘 했는지는 말 해줄 생각이 없나보다?”
“나중에 차차. 지금은 말고.”
우성은 좀 더 생각을 정리한 후에나 아포피스에 대한 이야기를 일행에게 할 생각이었다. 지금 당장 우성의 오른손에 있는 검이 이 세상이, 그리고 플레이어라는 존재가 만들어진 원인이라고 밝힌다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모른다. 아마 꽤나 당황들 하겠지.
‘나도 정리가 안 됐는데, 이 녀석들이야 어떻겠어.’
어쩌면 아예 말하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어차피 다른 일행들이 우성이 뭔가를 하는데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마왕 정도 되는 힘을 가진 존재가 아니고서야 치천사를 잡는데 도움이 되지는 않을 테니까.
“그 동안 별 일 없었냐?”
“어? 혜미가 말 안 해줬어?”
“오자마자 밥부터 먹었다. 배고파서.”
“……어지간히 배가 고팠나보네.”
안현수는 한숨을 푹 쉬고는 우성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전현승이 자리를 비우고 잠시 사냥을 떠났으니, 간략하게라도 우성에게 이야기를 전해야 할 듯했다.
“아무래도 곧 큰 전쟁 하나가 터질 것 같다.”
“전쟁? 선악공성을 말하는 건 아닌가보지?”
“그래. 공성이 아니라 전쟁. 말 그대로 천사들과 악마들 전체가 벌이는 전쟁이 될 거다.”
안현수의 말에 우성은 올 것이 왔다는 기분이었다. 이미 아포피스에게서 디아블로가 끝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였다.
‘벌써 코앞이었어.’
디아블로가 얼마나 길고 긴 시간 동안 이 순간을 준비해 왔는지는 아포피스에게 직접 전해들은 우성만이 알고 있었다. 태초라는 먼 오랜 옛날부터 치천사에게 무릎을 꿇고, 세력을 키워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맹약을 어기고, 그는 마지막에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렸다.
대천사들의 세력은 이미 반토막 난 상태. 악마들 중에는 벨제뷔트라는 거대한 마왕까지 있었다. 미카엘이라는 변수가 있다지만, 최강의 대천사라는 미카엘도 벨제뷔트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문제는 치천사, 하나뿐.
다른 대천사들을 모두 죽이고 마왕들 전부가 연합한다면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 디아블로 역시 그런 생각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었을 것이다. 디아블로와 벨제뷔트, 그 둘을 비롯한 다수의 마왕이라면 치천사라고 해도 어쩔 수 없을 테니까.
문제는 치천사가 대천사들과 함께 전쟁에 나섰을 때. 그 때라면 디아블로 역시 어쩔 수 없었다. 전쟁의 승패는 다시 미궁 속으로 빠지겠지.
하지만 디아블로 역시 알고있었다. 지금 이 시기가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임을. 치천사가 마음을 먹는 순간, 대천사라는 자리를 대체할 천사는 몇 명이고 다시 탄생할 것이다. 치천사가 모든 천사들의 어머니라는 가이아의 이름을 얻은 건 그런 이유였다.
“준비해야겠지.”
“덤덤하네?”
“전에 디아블로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대충 낌새는 챘어. 확실하지 않아서 이야기를 안 한 것뿐인데, 그 사이 소문이 돌았을 줄은 몰랐다.”
“……그래?”
안현수는 우성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한 달 동안 굶고 오더니 어딘가 모르게 달라진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