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아포칼립스에서는 지금껏 한 번도 두 개 이상의 마검을 가진 플레이어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천사 진영의 성검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검이란 아포칼립스에서 절대적인 의미를 지니는 장비였다. 단순히 아이템만으로 치부하기 어려운, 권력의 상징이자 힘의 상징이기도 했다. 또한 마왕이라는 절대적인 존재와의 소통이 가능한 매개체가 되기도 했고.
우성은 마검 벨제뷔트를 손에 넣는 것으로 아포칼립스에서 유일하게 두 개의 마검을 가진 플레이어가 되었다. 단순히 벨제뷔트를 능력치 상승에만 사용하고 버린다는 건 너무 아까운 일이었다.
그 때문에 우성은 마검 벨제뷔트와 아포피스, 두 자루의 검을 쌍검술로 사용할 생각을 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지금 우성이 가지고 있던 전투 형식에 날개가 달릴 수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 시도는 시작과 동시에 무너지고 말았다. ‘두 개의 마검은 공존할 수 없다’는 메시지 때문이었다.
“으윽.”
아포피스를 든 우성은 양 손에서 끔찍한 고통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손이 터져나가, 피륙을 드러낼 것만 같았다.
두 개의 마검이 서로 공명하며 우성의 손을 어지럽혔다. 동시에 두 개의 서로 다른 성질의 마기와 마력은 우성의 몸까지 스며들어 내부를 어지럽혔다.
제어? 불가능했다. 두 자루의 마검은 보통 존재의 검이 아니었다. 아포피스야 말할 것도 없고, 벨제뷔트 역시 현존하는 악마들 중 최강의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그의 반쪽인 검을 우성이 마음대로 제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진정 좀 해라!’
이게 어떤 현상인지는 몰라도 우성은 절대로 검을 놓지 않았다. 지금 이 상태에서 검을 놓았다가는, 서로 공명하던 마기들이 순식간에 우성의 몸 안으로 빨려들게 될 테니까.
“어?”
그 때, 벨제뷔트가 흐릿해졌다. 원래의 형태를 갖추었다가 신기루처럼 흐려지기를 반복하며, 벨제뷔트는 아포피스에 힘을 빼앗겼다.
그리고 그 힘은 아포피스라는 다리를 거쳐 우성의 몸에 흘러들어왔다. 그 힘을 몸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성은 벨제뷔트가 말한 검을 ‘먹는다’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거였나?’
마검은 악마의 반쪽. 그것을 우성에게 종속시키는 것도 아니고, 검을 완전히 소멸시키면서 자신의 힘을 전한다는 것은 꽤 큰 의미였다. 우성은 잘 알지 못하지만 마검이 곧 악마와 운명을 함께하는 이상, 우성과 벨제뷔트 역시 비슷한 운명으로 엮이게 될 것이다.
“그나저나…….”
우성은 팔을 통해 느껴지는 고통이 점점 온 몸으로 퍼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언제나 불길한 예감은 들어맞는 법이었다.
“끄아아아아악-!”
**
우성은 바닥을 뒹굴었다. 두 자루의 검은 이미 우성이 놓고싶다고 놓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공명하던, 아니 이제는 벨제뷔트는 흡수하기 시작한 아포피스가 그 검을 놓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우성은 아포칼립스에서 잊을 수 없는 고통을 두 번 겪었다. 한 번은 루시퍼에게 받은 퀘스트 보상을 통해 마기 스텟을 얻었을 때였고, 다른 한 번은 디아블로를 통해 마력을 얻었을 때였다. 강한 힘을 얻는 대가로 어마어마한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 고통의 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길어봐야 2시간 정도. 그 정도만 하더라도 우성에게는 두 번 다시 겪고싶지 않은 끔찍한 기억이었다.
“으으, 으어어어…….”
벌레처럼 대여 수련장 바닥을 기어 다니던 우성은 몸을 웅크리고 신음했다. 고통이 익숙해질 즈음, 다시 한 번 온 몸이 터져 나갈 듯한 고통이 찾아온 것이다.
‘며칠이나 지났지?’
대여 수련장에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아무리 우성이 고통으로 인해 시간 개념이 사라졌다 해도, 며칠씩 지났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정신력 스텟이 1포인트 상승하였습니다.]
다시 한 번 떠오른 메시지. 오랜 시간 고통을 감내한 끝에 얻을 수 있는 포인트였다.
정신력 스텟은 길고 긴 수련을 통해 한계를 벗어난 노력 끝에 얻을 수 있었다. 사실 대부분의 스텟들이 자신의 한계를 벗어날 만큼 노력해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정신력 스텟 자체는 다른 스텟들을 얻는 과정에서 생기는 부수적인 능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성의 정신력 스텟은 이미 100포인트가 넘어선지 오래였다. 사실상 수련이나 노력만으로는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수치였다.
우성은 정신력 스텟을 올릴 방법을 포인트를 통한 상승, 혹은 아이템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면 마검 벨제뷔트와 같은 기연을 얻거나.
하지만…….
‘정신력 스텟을 이런 걸로 얻을 수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군.’
빠드드득-.
우성의 이가 갈렸다. 정신력 스텟이 하나씩 오를 때마다 우성은 조금씩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고통으로 가득찬 머릿속이 점차 맑아지고, 몸과 정신을 별개의 영역으로 구분지을 수 있었다.
처음 생각이라는 게 가능하게 됐을 때, 우성은 품안에 있는 정신력의 물약을 떠올렸다. 물약을 마시게 되면 고통은 그대로겠지만 적어도 정신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성을 괴롭히고 있는 몸속 마기의 충돌은 육체적 고통뿐만이 아닌, 정신적인 충격까지 지속적으로 가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우성은 결국 물약을 마시는 것을 포기했다. 벨제뷔트가 말한 정신력을 올릴 방법이 이것이라면, 물약의 복용은 굴러 들어온 복을 걷어 차는 일이다.
‘이걸 복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지.’
꼬르르륵-.
뱃속이 요동쳤다. 또 다른 종류의 고통이었다. 느낌상 벌써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있으니 허기가 질 만도 했다.
‘이 와중에 배가 고프다니, 나도 참 정신나간 놈이군.’
하긴, 아파서 죽지는 않겠지만 굶어 죽을 수는 있었다. 더군다나 지속적으로 이어지던 고통에도 슬슬 적응이 되어, 이제는 다른 종류의 고통까지도 느껴지던 참이었다.
차라리 아무런 생각도, 감각도 느끼지 못할 때가 나았다고 느낄만큼 우성은 지금 상황이 괴로웠다. 차라리 이대로 있다가 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즘, 우성은 속으로 신음을 삼키며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머릿속으로 서현이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그 순간, 우성의 몸속에서 충돌하던 마기가 폭발을 일으켰다.
“아아아아악-!”
그리고 우성의 비명이 다시 한 번 수련잔 안에 울려퍼졌다.
**
벌써 며칠. 대여 수련장에 들어간 우성은 소식이 없었다. 안현수와 혜미를 비롯한 일행들은 우성이 걱정되었지만 며칠, 오래 걸리면 열흘 넘게 자리를 비울 수 있다는 말에 따로 찾아가진 않았다. 혹시나 자신들이 일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해서.
그러던 중, 다크듐에 돌던 소문을 접했다. 이미 악마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소식이었지만, 그리고 플레이어들에게는 천청벽력과도 같은 소리였다.
“선악전쟁? 그건 또 무슨 소리래?”
“말 그대로 선악공성의 진화판이지. 다음 번 선악공성이 시작되면서 천사 진영과 악마 진영을 잇는 게이트가 열리는 순간, 천사 진영을 습격하겠다더라고.”
소문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 온 혜미는 안현수를 비롯한 일행을 한 자리에 모아 이야기를 전했다. 선악공성은 아포칼립스가 시작되고부터 1회 차 플레이어들부터 지금까지 쭉 진행되어왔지만 선악전쟁이라는 경우는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선악공성의 진화판인가?”
“단순하게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선악공성이면 몰라도, 선악전쟁은 루시퍼도 처음 겪는 전쟁이니까요.”
검을 통해 루시퍼와 잠시 교감을 나눈 전현승의 말에 장내가 조용해졌다. 루시퍼조차도 처음 겪는 일이라면, 적어도 몇 만 년 사이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라는 뜻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것이 정말 천사와 악마들간의 전쟁의 종지부를 찍는 싸움일지도 모른다.
“잘못 불똥이 튈지도 모르겠군.”
“전면전이면… 어느 한 쪽이 끝날 때까지 싸우는 거겠죠?”
“악마들이 미쳤나? 평화롭게 잘 살고 있으면서 갑자기 왜 전투본능이 튀어나와? 젠장.”
선악공성은 영지 하나를 걸고 벌이는 싸움으로, 아포칼립스의 시간으로 300일에 한 번씩 진행되었다. 하지만 사실상 새로은 플레이어들이 들어오는 회 차를 따지면 다음 번 선악공성은 약 600일 뒤라고 볼 수 있다.
600일.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현실의 시간으로 보면, 또 그리 길다고 볼 수도 없었다. 현실의 시간으로는 고작 두 달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진짜 전쟁이라고 생각해야합니다. 선악공성이나 다른 퀘스트와는 달리, 지는 순간 끝입니다.”
“그러겠죠. 천사들에게 악마 진영을 빼앗기는 순간, 천사들이 악마 진영의 플레이어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는 않을 테니까요.”
플레이어들은 결국 악마와 천사의 편에 각각 나누어져 싸우는 존재들이었다. 각 진영이 사라진 순간, 플레이어들은 자신들을 지켜줄 울타리를 잃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전쟁을 승리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문득 떠오른 생각에 혜정이 물었다. 하지만 역시나 그 물음에 선뜻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나마 아포칼립스에 대해서 꽤 진지하게 생각하던 사람이 바로 안현수와 전현승이었다. 두 사람과 더불어 우성은 평소 아포칼립스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아포칼립스가 만들어진 배경이나 만든 주체, 그리고 앞으로 자신들의 운명까지.
이런 경우를 생각해보지 못한 건 아니었다. 어쩌면 가까운 시일 내에 이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느끼기도 했다. 플레이어들이 전쟁에 개입한 이상, 어떤 식으로든 변수는 생길 테니까.
“끝나겠지. 이 게임도.”
“……게임이라고 말하니까 이상하군요. 하지만 끝난다는 말에는 동감입니다.”
“그렇지. 이 세계는 이 세계대로 남고, 플레이어들인 우리는 이 세계에서 사라지겠지. 게임으로 비유하자면 서비스 종료라고 할 수 있겠고.”
“단언하긴 어렵지 않습니까? 이 세계를 만든 조물주가 우리들에게 뭘 원하는지도 알 수 없고 말이죠.”
“조물주가 꼭 한 명이라는 법 있나? 어쩌면 우리들을 이 세계로 불러들인 조물주가 한 명, 천사 진영으로 불러들인 조물주가 한 명 따로 존재할지도 모르지.”
“어쩌면 그 조물주가, 아포피스일지도 모르고요.”
전현승의 생각에 안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포피스라는 익숙한 이름에 다른 잃행은 깜짝 놀랐다.
“아포피스가 이 세계를 만들었다고요?”
“애초에 그는 창세신이야. 디아블로를 비롯한 악마들을 창조한 존재. 애초에 생명의 창조도 가능한 그가, 다른 세상에 있는 우리들을 데려다 이런 게임 시스템을 만들지 못하리라는 보장은 없지.”
안현수의 대답에 질문을 던진 혜정은 말을 잃었다. 다른 마왕들보다 조금 더 대단한 존재 정도로 생각한 아포피스를, 전현승과 안현수는 아포칼립스라는 세상, 그리고 플레이어라는 존재를 개입시킨 조물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포칼립스는 게임의 형식을 가지고 있는 세상이다. 하지만 그곳은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해오던 하나의 세상이었으며, 플레이어들은 그곳에 찾아온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에 불과했다.
다행히 악마들은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들어온 플레이어들을 천사와의 전쟁에 유용한 도구로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악마들이 인간들에게 우호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개입은 분명히 있었어. 그리고 어쩌면, 이 모든 게 전부 우리를 이 세계에 불러들은 누군가의 개입에 의한 것일지도 모르지.”
잠시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이 이야기에서 어떤 말을 꺼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만약 안현수와 전현승의 가설이 맞다면, 아포피스의 검을 가진 우성은 뭐란 말인가?
“오빠에게도 알려 줘야겠죠?”
“그 녀석도 대충 예상은 하고 있을 거야. 뭐, 이거 말고 선악전쟁에 대해서는 알려 줘야겠지. 그 녀석도 슬슬 준비해야 할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