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잠시 잊고 있었군요.”
그 순간, 우리엘은 잊고 있던 한 사람을 돌아봤다. 벨제뷔트에 비하면 존재감이 약하긴 하지만, 아무리 우리엘이라 하더라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우성. 이방인 한 명으로 치부하기에 그는 너무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 그리고 검에서 느껴지는 마기와 마력은 하위 마왕들과 견주어도 크게 뒤떨어지지 않았다. 오죽하면 대천사에 근접했다고 평가받은 퀴엘을 제압했을까.
우성 혼자만이라면 모를까 벨제뷔트와 싸우면서 함께 신경 쓰기에는 아무래도 어려움이 뒤따랐다. 벨제뷔트를 사로잡으려면 그를 제압해야 하는데, 둘 모두를 상대하면서는 그게 힘들어지는 것이다.
“어쩔 수 없죠.”
“어쩔 수 없으면?”
이 상황에서 뭘 할 수 있겠냐는 벨제뷔트의 물음에 우리엘은 대답 대신 행동을 취했다. 무언가 일을 벌이려는 그녀의 행동에 벨제뷔트는 눈을 번뜩이며 달려들었다.
“어딜!”
그 순간, 우리엘의 네 쌍의 날개가 그녀의 몸을 감쌌다. 단단하게 그녀의 몸을 보호한 날개는 벨제뷔트의 주먹을 막았다.
다니엘에 비해 방어적인 능력이 부족하긴 해도 그녀 역시 대천사였다. 더군다나 대천사들 중에서도 특히 강한 힘을 가진 존재였다. 상처를 입고 약해진 벨제뷔트의 주먹 정도는 작정하고 방어하려 들면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다.
벨제뷔트의 주먹이 먹히지 않는데 우성의 검이 먹힐 리도 만무. 우성이 검을 휘둘러 마기를 쏘아냈지만,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거북이새끼처럼 속에 숨긴…….”
벨제뷔트가 으르렁거렸지만 더 이상 뭘 할 수는 없었다. 온 몸의 상처가 비명을 지르는 터라 움직이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우성은 혼자서 우리엘의 날개 위를 검으로 두드렸다. 하지만 매번 쇳소리를 내며 검이 튕겨져 나올 뿐이었다.
‘뭘 하려는 거지?’
우성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우성이 가세하긴 했지만 우리엘의 상황은 나쁘다고 보긴 어려웠다. 아무리 우성이 강하다 해도 마왕들에 비하면 부족한 힘이었고, 우리엘은 대천사들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존재였으니까. 더군다나 천사장도 한 명 남아있지 않은가?
단순히 시간을 끄는 걸로 보기엔 우리엘의 선택이 썩 좋지는 않았다. 수호의 천사 다니엘이라면 모를까, 우리엘은 공격적인 능력에 비해 방어적인 능력이 부족했다. 그런 그녀가 방어에 치중하는 건 오히려 그녀에게 독이 되는 선택이었다. 괜히 힘만 낭비하는 꼴이었으니 말이다.
결국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지금 저 날개 속에 숨어 우리엘이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것이었다.
“……혼자가 아니었군.”
그 때, 벨제뷔트가 허탈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우리엘을 공격하던 우성의 검이 우뚝 멈추며 그를 바라봤다. 그러던 우성의 입가에 불길한 미소가 스쳤다.
“이 빌어먹을 비둘기들이…….”
우성은 벨제뷔트가 말한 혼자가 아니라는 뜻을 알아차렸다. 다른 때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대리인>을 사용해 천사들의 기운에 민감해진 우성은 알 수 있었다. 멀리 떨어진 곳, 용의협곡 인근에 다른 천사들이 포진해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도 보통 천사들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천사들이 포진하고 있었지만, 그들 모두를 합한 것보다 더 큰 존재감을 가진 존재가 있었다.
또 다른 대천사.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천사장급의 기운은 아니었다. 이 정도 거리에서 이만한 존재감을 내뿜는 존재라면 대천사밖에는 없었다.
“……용들과 전쟁을 벌이려고 작정을 했군.”
“벨제뷔트, 당신을 잡는데 이 정도 준비는 당연한 것 아닌가요? 비록 당신 때문에 도움을 요청하는 건 아니지만요.”
우리엘의 시선이 우성에게로 향했다. 아니, 정확히 그녀는 우성이 들고 있는 검을 보고 있었다. 불길한 느낌에 우성은 슬그머니 검을 내렸지만, 이미 그녀는 우성의 검이 무엇인지 알아본 모양이었다.
“그 검을 가진 이방인을 그냥 이대로 보낼 순 없죠. 벨제뷔트는 물론, 당신도 함께 교화의 시간을 가져야겠어요.”
“……지랄하네.”
우리엘의 말이 우성은 더욱 섬뜩했다.
교화(敎化).
그것은 대상을 죽이는데서 끝나지 않고, 사로잡아 천사들의 편으로 세뇌하는 과정이었다. 악마들이야 죽으면 끝이니 죽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플레이어인 우성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이다.
우성은 벨제뷔트처럼 강하지 않았다. 벨제뷔트야 자력으로 천사들에게서 도망쳤다지만, 우성은 그럴 만한 힘이 없었다. <대리인>을 사용한 지금만 해도 마찬가지다.
우성은 이 자리에서 절대로 우리엘에게 붙잡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럴 상황이 오게 되면 차라리 자살하는 편이 나을 텐데, 치유 능력이 특출한 천사들이 그것을 그냥 두고 볼리도 만무했다.
‘하지만 어떻게?’
우리엘 한 명이면 어떻게든 해 볼 수 있었다. 아무리 상처를 입었다고 해도 벨제뷔트는 여전히 강했고, 우성 역시 한 팔 거들 정도는 되니까. 둘이 힘을 합치면 우리엘을 쓰러뜨리는게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명의 대천사가 더 개입하면? 절대 막을 수 없었다. 다니엘과 같이 대천사들 중 약체로 알려진 존재도 아니고, 벨제뷔트를 잡기 위해서라면 우리엘과 같은 강력한 대천사가 직접 움직였을 것이다.
-도움이 필요한가?
아포피스가 유혹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순간 그 말에 이끌려 우성의 정신이 흔들렸다.
참았다. 상황이 불리해졌다고 무작정 아포피스에게 손을 뻗는 건 더 이상 할 짓이 아니었다. 교화되기 전에 아포피스에게 자아를 먹힐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꺼져.’
-매몰차군. 이대로 천사들의 개가 될 생각인가?
‘지랄 마. 그럴 일 없어.’
-그렇게 바랄 뿐이겠지. 확신은 없군.
반박하기 어렵다. 이대로 아포피스에게 더 힘을 빌리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엘과 한 명의 대천사를 더 상대하기는 아무래도 힘들었으니까. 아니, 사실은 아포피스의 힘을 빌린다 하더라도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말 그대로 힘을 빌려야 해결의 실마리를 겨우 잡는 수준인 것이다.
-그래도 천사 녀석들, 무리하는군. 이 정도로 움직이면 ‘그’가 개입할 텐데 말이야.
‘그 라고?’
-그가 개입하게 되면, 너나 벨제뷔트에게는 좋을지도 모르겠군. 그는 자신들의 영역에서 이 정도로 난동을 부리는 걸 보고만 있지는 않을 테니.
‘잠깐. 대체 그가 누구지?’
우성의 물음에 아포피스는 화답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급할 때 말을 걸고, 다시 조용해졌다. 무언가 실마리가 될 만한 말인 것 같아 우성은 조급했다.
아포피스조차 알고 있는 존재. 창세신인 아포피스가 알고 있는 존재라면, 같은 신(神)일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이 세상과 관련이 없는 신이 아무 이유 없이 이 싸움에 개입하게 될 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
생각이 깊어지던 때, 우성은 천사들의 기척이 가까워짐을 느꼈다. 이미 그들은 용의협곡에 발을 들여놓고, 빠른 속도로 동굴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누구지? 미카엘이나 라파엘은 아닌 것 같고… 라구엘인가?”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던 네 쌍의 날개를 펼치며 우리엘이 대답했다.
“잘 아시네요.”
“이번에도 미카엘은 움직이지 않은 건가? 그 녀석 참, 엉덩이 무겁네.”
“미카엘은 천신님의 검이니까요. 그분의 말씀이 내려오기 전엔, 결코 움직이지 않습니다.”
“마치 날 잡으라고 천신새끼가 명령이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군.”
“계시가 있었죠.”
“그래? 그럼 왜 이번엔 날 다시 잡으라고 계시를 내리지 않는지 모르나봐?”
벨제뷔트의 물음에 우리엘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게, 귀담아듣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니들 다 뒤질까봐 닥치고 있는 거다, 이 빌어먹을 비둘기 새끼들아!”
우리엘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 순간, 그녀의 몸에서 방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힘은 동굴 전체를 감싸고, 살아남은 천사들과 함께 그녀의 몸을 보호했다.
뒤이어 벨제뷔트의 몸에서 어둠이 뿜어졌다. 폭발적인 힘을 가진 마기는 힘이 닿는 족족 그것을 부식시키고, 파괴했다. 신성한 용의 뼈로 이루어진 동굴도 그 힘을 모두 견디지 못했다. 도저히 상처입고 지친 상태라고 보기 어려운 힘이었다.
우리엘의 힘이 유효해 동굴이 무너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벨제뷔트의 힘은 그녀의 힘을 압도했다. 상처를 입지 않은 상태였다면 대천사인 우리엘이 소멸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벨제뷔트는 온 힘을 다했다.
“하아. 하아.”
어둠을 빛으로 집어삼킨 우리엘의 날개는 살짝 검게 그을려있었다. 막아냈다고는 하지만 벨제뷔트의 힘으로부터 전혀 영향이 없지는 않은 것이다.
직접적으로 노려지지 않은 우성이나 다른 일행들까지도 그 영향을 받지는 않을 수 없었다. 단지 그가 뿜어낸 힘의 근처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안현수와 전현승은 몸이 얼어붙었고, 다른 일행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몸이 정상이었다면… 어마어마하겠군.’
저런 괴물을 어떻게 잡았을까? 미카엘의 이름이 반복적으로 나오는 걸로 보아, 심판의 천사 미카엘이 대단하긴 한 모양이었다. 벨제뷔트를 사로잡는데 가장 큰 기여를 했다는 걸 보면 말이다.
문제는, 지쳐보이긴 해도 우리엘은 크게 다치거나 하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벨제뷔트의 힘을 막아내느라 꽤 많은 힘을 사용했지만 그녀는 멀쩡했고, 반대로 벨제뷔트는 쓰러지기 직전으로 보였다. 힘이 다해서라기보다는 상처로 인한 부작용이었다.
“기아스가… 대단하긴 하군.”
벨제뷔트가 비틀거리며 한탄했다. 우리엘 역시 그를 감탄한 눈으로 바라봤다.
“이만한 힘이 남아있던 건가요?”
“아직 더 남아있지.”
“말도 안 되는 소리로군요. 하지만 이 정도만 하더라도 정말 대단해요. 당신이라면… 이 전쟁을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전쟁을 끝낼 열쇠. 역시 천사들은 벨제뷔트를 그 실마리로 생각하고 있었다. 벨제뷔트가 천사들의 편으로 돌아서면, 이 길고 길었던 악마와 천사의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벨제뷔트는 자신을 이용해 전쟁을 끝내겠다는 심보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든 걸 제쳐두고서라도 남의 손 안에서 놀아나는 건 사절이었다.
“지랄… 차라리 뒤지고 말지.”
“당신은 죽지 않아요. 이제부터 우린 함께 하게 도리 거예요.”
“그럴 능력은 되고?”
“저 혼자라면 불가능하겠죠. 혼자라면 말이죠.”
구우우우우-.
신성한 기운이 동굴 안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어둠과 빛이 충돌하던 동굴 안을 빛이 이기기 시작한 것이다.
벨제뷔트의 힘으로 인해 옅어졌던 대천사의 기운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드디어 그 기운이 동굴 안을 가득 메웠다.
“라구엘인가?”
벨제뷔트의 말에 우성이 이미 반쯤 무너진 동굴의 입구를 바라봤다. 강 속 깊은 곳에 위치한 동굴이었지만 대천사씩이나 되는 존재라면 강 아래로 내려오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라구엘의 존재감은 우성을 비롯한 일행 전부를 압박해오고 있었다.
이윽고 존재감만이 아닌, 그들의 모습이 우성의 시야에 들어왔다. 날개만큼이나 희고 깨끗한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천사는 네 쌍의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