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그렇지 않아도 알렌은 우성의 상대하기가 벅찼다. 박윤성의 도움이 있다면 무난하게 싸움을 이끌어 갈 수 있었겠지만, 그가 없다면 밀릴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처음 우성과 검을 마주했을 때보다, 눈이 붉어지고 살짝 정신이 나간 듯한 지금이 훨씬 강했다. 단순히 움직임이 빠르다거나, 힘이 강해진 것과 같은 차이가 아니었다. 눈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알렌은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창세신 아포피스의 힘.’
알렌은 저것이 우성 개인의 힘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물론 플레이어 개인의 역량도 중요하긴 하지만, 아포칼립스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저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을 리 없었다. 피엘과도 싸워본 알렌이지만, 현재 우성의 실력은 피엘 이상이었다.
성검을 사용하는 알렌인 만큼 그는 성검의 부작용 또한 알고 있었다. 성검은 성(聖)이라는 글자가 들어간다고 해서 마검과는 달리 부작용이 없지는 않았다. 오히려 마검과 같은 동등한 수준의 패널티가 존재했다. 강한 힘에는 그만한 수준의 반동이 따르는 법이었다.
‘저 괴물들을 부르고부터 더 급해졌다.’
알렌은 우성이 소환한 괴물들, <나가>를 힐끔거렸다. 단순한 소환수들이라기엔 너무 강한 힘을 가진 존재들이었다. 그런 소환수가 무려 셋이니, 천사 진영 플레이어들도 다소 힘에 부칠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대가 없이 저런 괴물을 불러냈을 리 없다.’
알렌은 결론을 내렸다. 아무리 아포피스의 검을 가진 플레이어라지만, 힘이 강한 마검일수록 반동은 반드시 따라오게 되어있다고. 우성이 급해하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라고.
‘시간을 끈다.’
알렌은 자세를 바꾸었다. 지금껏 우성을 쓰러뜨리기 위해 박윤성과 합공을 했던 것이라면, 이제는 우성으로부터 당하지 않게끔 방어에 치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성 역시 알렌의 자세가 바뀌었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지금껏 알렌이 공격하고, 박윤성이 서포트하는 식으로 우성을 공격해왔다면 지금 알렌의 자세는 우성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며 도망치기 위함이었다.
-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고?
아포피스의 목소리인가? 아니면 우성의 생각인가?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 하지만 퍼뜩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나 목소리에대해서 부정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 알렌이 어떻게 나오든, 우성은 신경 쓸 것 없었다. 알렌이 공격해 온다면 그대로 상대할 것이고, 시간을 끌고자 한다면 그 의도를 보란 듯이 깨부숴줄 것이다. 우성에게는 그럴만한 힘이 있었다.
쿵-.
우성의 발이 땅을 울렸다. 힘차게 발을 내딛자, 알렌의 검 위로 우성의 검이 뿌려졌다.
**
이빨 빠진 호랑이라는 말이 있다. 더 이상 무섭지 않은 맹수에게 쓰이는 말로, 지금의 벨제뷔트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었다.
이빨이 빠진 호랑이는 약해진다. 더 이상 그의 입은 무기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빨이 빠진 호랑이가 한낱 하이에나 하나를 상대로 승리하지 못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호랑이를 벨제뷔트에게 비유하면 상황이 참 적절했다. 이빨이 빠졌다고 해도 호랑이에게는 날카롭고 단단한 발톱이 남아있었고, 육중한 체격과 튼튼하고 빠른 다리가 남아있었다. 이빨이 빠져도 호랑이는 호랑이다.
“교화된 상태에서도 이런 힘을 내다니… 최고악이라는 이름은 역시 거저 얻은 게 아니군요.”
우리엔은 진심으로 놀랐다. 내심 벨제뷔트와 주했을 때, 일이 쉬울 것이라 생각한 그녀였다. 여러 대천사들에게 교화되었던 벨제뷔트는 마기를 제대로 운용할 수 없었고, 몸에 나 있는 자잘한 상처들과 성검 기아스에게 입은 커다란 상처는 벨제뷔트의 육신을 둔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아무리 최고악이라지만 저런 몸 상태로 대천사들 중 수위를 다투는 자신을 상대할 순 없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그녀의 옆에는 최고의 천사장인 퀴엘을 비롯한 천사장들까지 있다. 그들의 도움까지 있는 이상, 벨제뷔트를 사로잡기는 시간문제였다.
……그렇게 생각했다.
크크크크크크-.
벨제뷔트의 웃음소리는 섬뜩했다. 이미 그는 천사들의 성향에서 악마들의 성향으로 훨씬 많이 넘어가 있는 상태였다. 용의협곡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악마로서의 자아를 되찾은 것과, 우성의 영향이 컸다.
그 때문에 처음 우리엘의 말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었고, 천사들과 싸우고 있는 지금에는 점점 더 자신이 악마라는 사실을 깊게 자각할 수 있었다. 오히려 우리엘을 비롯한 천사들 덕분에 그는 천사들과 자신이 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더욱 빠르게 악마로서 각성하고 있는 것이었다.
벨제뷔트는 우리엘과 두 명의 천사장, 그리고 수십의 엑시드급 천사들의 공격을 큰 무리 없이 받아냈다. 우리엘 역시 만만치 않아 벨제뷔트를 막아내고 있었으나, 애초 벨제뷔트를 손쉽게 제압할 줄 알았던 우리엘로서는 당황스러웠다.
“날 잡으려면 네가 아니라 미카엘이 왔어야지.”
벨제뷔트의 말에 우리엘은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던 것이다. 완전한 상태의 벨제뷔트라면 모를까, 지금 상태의 벨제뷔트라면 미카엘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 정도는 저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허세는. 아니면 라파엘에게서 기아스라도 빌려오지 그랬어?”
“기아스는 대천사장의 증표입니다. 저에게 그것을 손에 쥘 권한은 없습니다.”
“쯧. 하여간 천사들은 그게 문제야. 누가 쓰면 어때? 빌려주는 것도 안 돼? 잘 쓰고 돌려주면 되지. 물론 나 같으면 안 돌려 주겠지만.”
벨제뷔트의 말을 들을수록 우리엘은 그가 점점 더 악마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성향이 악(惡)에 가까워질수록 그의 마기는 강해지며 힘을 되찾을 것이다.
상처는? 그의 등에 입은 기아스의 상처는 언제 재발할지 모른다. 그렇기에 우리엘은 시간을 끌면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시간이 누구의 편인지 모르게 되어버렸다.
“슬슬 재미는 다 봤군. 몇 년 만이지만, 꽤 즐거웠다.”
콰르릉-.
동굴 안에 번개가 내려쳤다. 검고 탁한 마기로 이루어진 뇌전은 몇몇 천사들 위로 떨어지며 그들의 새하얀 몸을 시커멓게 태워 죽였다. 본격적으로 힘이 발현되기 전의 여파가 이 정도라면, 아무리 우리엘이라 하더라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동굴이 무너질 듯 떨렸다. 천장에 검은 구름이 낀 것을 확인한 천사들은 겁에 질렸다. 점점 더 강한 마기를 뿜어대던 벨제뷔트의 힘이, 이제 완전해진 것이다.
콰릉, 쿠구구-.
금방이라도 흙빛 뇌전을 떨어뜨리며 천사들의 목숨을 빼앗을 것 같던 구름이 점점 흩어지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도 구름이 가지고 있는 힘은 변함이 없었지만, 한데 뭉치지 못하기 시작했다.
벨제뷔트의 회복에 절망하던 우리엘의 눈치 빛났다. 그녀의 시선이 천장의 구름에서 벨제뷔트에게로 향했다. 무슨 일이 생겼는지 벨제뷔트는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휘청거리고있었다.
“몸이 안 좋아 보이는군요.”
“……누구 때문인데.”
“저 때문이라고 말하실 건가요? 아뇨. 그건 당신이 지금까지 지어온 죄에 대한 업보 때문이에요.”
“말 한 번 잘하는군. 그래서 네가 이 상처를 낸 당사자 중 하나가 아니라는 소리냐?”
“죗값의 일부를 치렀을 뿐이죠.”
우리엘의 날개가 활짝 펴졌다. 창끝이 천장으로 향하자, 흩어지고 있던 구름이 말끔히 사라졌다. 그렇지 않아도 상처가 재발하는 바람에 몸을 휘청거리던 벨제뷔트는 우리엘의 힘에 못 이겨 마기가 역류해 상처가 더욱 커졌다.
“아무래도 지금부터는 저희의 시간인 모양이군요.”
우리엘을 비롯한 두 명의 천사장, 그리고 천사들이 벨제뷔트의 주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깡, 쩌저정-.
매서운 검격이 사방에서 쏘아졌다. 우성의 몸은 이리저리 비상하며 알렌의 목을 베어왔다.
박윤성은 이미 목숨을 잃고 싸늘한 주검이 되어있었다. 2회 차 플레이어로서 단 한 번의 죽음도 겪지 않았던 그가, 우성에게만 벌써 세 번째 목숨을 잃은 것이다.
알렌 역시 자칫 방심하다가는 쓰러져 있는 박윤성과 같은 처지가 될 수 있음을 직시했다. 그렇기에 더욱더 방어를 견고히 하고, 시간을 벌었다. 아무리 우성이 강하다 해도 알렌이 작정하고 방어에 나서자 쉽게 그를 쓰러뜨릴 순 없었다.
애초에 알렌의 직업은 우성이나 피엘과 같은 공격적인 성향의 마검술이 아닌, 방어적인 성향의 성검술이었다. 방패를 들지 않았다 뿐이지 작정하고 방어를 굳힌 알렌은 우성도 쉽게 뚫기가 어려웠다.
‘이래선 끝이 없겠는데.’
알렌의 빈틈을 노리던 우성은 알렌이 빈번히 자신의 공격을 막아내자 속이 답답해졌다. 아포피스의 힘을 이끌어내고자 위험을 무릅쓰고 광기를 이끌어 냈건만, 알렌의 방어는 쉽게 뚫기가 어려웠다.
물론 지금 이 상태를 유지하기만 해도 이미 승패가 눈에 보일 만큼 승기는 기울어져있었다. 치명상은 없지만 자잘한 상처는 꾸준히 늘어나고 있었고, 시간만 충분하다면 알렌을 제압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시간.
문제는 시간이었다. 우성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대리인의 지속시간은 논외로 치더라도 이제는 정신력 문제나 마력과 마기가 지속적으로 소모되는 것도 신경 써야 한다.
‘저 녀석도 그걸 알고 있는 거겠지.’
알렌이 갑작스럽게 방어에 나선 것도 아마 우성의 이런 상황을 눈치 챘기 때문이었다. 아무런 대책 없이 수세에 몰렸다고 방어하는 것이라면 저렇게 견고하고 차분할 리 없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알렌의 표정은 여유로워지고 있었다.
마치 이 싸움이 지더라도, 최후의 승자는 자신이 될 것이라는 듯.
우성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표정을 보는 순간, 마음속에 꿈틀대던 광기와 분노가 더욱 치밀어 올랐다. 본능적인 감정이었지만 그것은 꽤나 강렬했다.
‘참아야지.’
이대로 폭주했다가는 언제 다시 자아를 잃어버릴지 모른다. 아포피스에게 자아를 내주게 되면, 아마 대천사 다니엘과 자웅을 겨뤘던 당시의 힘을 다시 보여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아마 지금의 상황을 타개하는데 꽤나 도움이 되겠지.
하지만 우성에게 그것은 상당히 위함한 도박이었다.
아포피스도 그러지 않았던가? 이대로 가게 되면 머지않아 우성이 정신을 완전히 빼앗길 것이라고. 아포칼립스에서의 죽음은 라이프 하나로 대체할 수 있지만, 자아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곧 완전한 죽음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선 아포피스에게 몸을 양도하고 더 강한 힘을 손에 쥐는 편이 낫다. 하지만 우성은 그런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악마 진영이 중요하긴 하지만, 일단 우성 본인이 있어야 그 모든 게 중요하지 않은가? 게다가 자아를 잃고 플레이어로서 더 이상 활동할 수 없게 되면, 더 이상 서현이의 목숨을 연명해 나갈 수도 없었다.
‘도박은 금물이다.’
우성은 침착하게 알렌부터 정리하고자 다시 움직였다. 그는 모르지만 이미 우성의 정신은 점점 더 아포피스에게 먹혀들고 있는 상태였다. 단지 알렌의 몸에서 느껴지는 신력과 빛의 느낌 때문에 그를 공격하고 있는 것뿐이지.
“끄으으아아아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