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병을 꺼낸 우성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받았다. 한 가닥 불안한 느낌을 받았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손 안에 쥐어진 물약을 통해 무한한 신뢰가 느껴졌다.
대천사 다니엘의 날개 깃털을 이용해 만들어낸 물약이었다. 더없이 성스러운 존재의 힘이 깃들어 있는 만큼, 물약은 지금까지 복용한 물약과는 차원이 다른 힘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돌파구가 없었다. 우성은 망설이지 않고 물약의 마개를 열어, 입안에 털어 넣었다.
꿀꺽-.
목울대가 꿈틀거리며 물약이 넘어갔다. 맵고 뜨거운 액체를 마신 것처럼, 속이 화끈했다.
“크윽.”
뱃속에 용암이 흐르는 것 같았다. 우성은 목을 부여잡고, 그 다음엔 가슴을 부여잡았다. 물약이 흐는 길을 따라서 뜨거운 고통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그 고통도 잠시였다. 물약이 몸속으로 빠르게 흡수되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운 감각이 돋아났다. 눈이 확 밝아지며, 정신이 맑아졌다. 정신력이 200스텟에 가까워진 만큼, 지금까지 느꼈던 어떤 감각보다도 더욱 날카롭고 단단하게 느껴졌다.
이거면 가능하다. 아포피스에게 자아를 먹히는 일따위, 이제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자만하고 방심할 순 없었다. 아무리 인간의 정신력이 극에 달했다고 한들, 이 검의 주인은 창세신이었다. 그가 작정하고 우성의 정신을 빼앗기를 원한다면, 속절없이 몸을 내주어야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포피스가 우성의 몸을 원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여유롭게 몸에 새겨진 감각을 익힐 틈도 없었다. 우성은 지체하지 않고 곧장 <대리인>을 사용했다.
눈과 머리에 신력으로 가득한 정신력의 물약이 퍼진 가운데, 그 속으로 짙은 어둠이 밀려들었다. 온 몸 가득 마력과 마기가 폭발할 듯 증폭하고, 새로운 자아가 머릿속을 울렸다.
-재미있는 걸 만들었구나.
아포피스의 목소리. 아무래도 그 또한 ‘성스러운 정신력의 물약’의 존재를 확인한 모양이었다. 하긴, 어떤 짓을 하더라도 대천사의 깃털에 남아있던 신력을 말끔히 정제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부작용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대천사 다니엘의 신력은 우성에게 이로운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미 우성은 물약에 스며들어 있던 신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상태였다.
더군다나 <대리인>까지 사용했다. 그런 우성이 물약에 스며들어 있던 소량의 신력 정도를 제어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폭발적인 마력과 마기를 느끼며 우성이 아포피스를 꽉 쥐었다.
‘됐다.’
처음 한 번을 제외하고, 아포피스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껏 <대리인>을 사용하면 시끄럽게 머릿속에서 울리던 목소리가, 확연하게 줄어든 것이다.
물론 부작용에 따른 광기는 어쩔 수 없었다. 여러 번 겪었던 것처럼 시야가 붉어지고, 피를 원하는 본능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하지만 성스러운 정신력의 물약까지 복용한 우성의 정신력은 그 정도 충동쯤은 가볍게 이겨냈다.
“괘, 괜찮습니까?”
우성의 눈이 붉어진 걸 확인한 전현승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선악공성에서 우성이 <대리인>을 사용하고 난 후 부작용을 가장 가까이서 보아온 사람이었다. 그 당시 우성이 보여준 광기는 전현승이라 하더라도 말릴 수 없었다.
“아직은… 그런 것 같습니다.”
“아직은?”
“괜찮은 것 같긴 한데, 저도 뭐라 확답은 드리기가 힘드네요.”
지금껏 <대리인>을 사용하고서 제대로 자아를 유지했던 적이 없었다. 매번 아포피스에게 자아를 빼앗겼고, 단 한 번 자아를 빼앗기지 않았던 경우에도 광기에 휩쓸려 미쳐 날뛰었다.
물론 그 광기는 오로지 천사들에게로 향해있었다. 그 점에서만큼은 문제가 없었다. 현재 우성이 상대해야 하는 적이 바로 천사들이었으니까.
하지만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조심해서 나쁠 것 없었다. 자아를 잃거나, 광기에 휩싸이면 우성이라 하더라도 일행을 공격하지 않을 거라고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벨제뷔트의 몸이 움직였다. 번쩍 손을 들어올려 달려든 벨제뷔트는 우리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꽈르릉-!
우리엘이 창을 휘둘러 벨제뷔트의 손을 막아냈다. 창끝과 주먹이 부딪혔지만, 동굴에 울린 소리는 마치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였다. 더욱 놀라운 점은 창 끝에 찔린 벨제뷔트의 손이 피 한 방울 나지 않고 멀쩡하다는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 밀리는 쪽은 우리엘이었다. 아무리 벨제뷔트가 상처를 입고 약해졌다고 해도, 그는 명백한 최강의 악마였다. 우리엘 혼자만의 힘으로 지금 당장 그를 제압하기는 아무래도 힘에 부칠 수밖에 없었다.
쉬이익-.
그 때, 퀴엘을 비롯한 두 명의 천사장이 벨제뷔트의 등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우성이 막 벨제뷔트를 도와주기 위해 나서려고 한 순간, 움직일 것도 없이 벨제뷔트의 다른 한 손이 뻗어나갔다.
꾸웅-!
그의 손이 허공을 두드리자 지진이 일어났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던 허공이 쩍쩍 갈라졌다.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이적이 행해진 것이다.
허공의 표면이 유리처럼 갈라지며, 그 충격이 뒤로 이어졌다. 그 결과, 퀴엘을 비롯한 천사장들이 뒤로 날아갔다. 그들은 각자 날개를 펼쳐 볼품없이 벽에 처박히는 것을 면했다.
“이런 미친… 약해진 게 아니었나?”
충격이 큰 듯 잠시 휘청거리긴 했지만, 퀴엘은 묵묵히 다시금 달려들기 시작했다. 자신의 몸보다 훨씬 거대한 은빛 대검을 들어올린 채, 벨제뷔트의 몸을 양단할 것처럼 위에서 아래로 휘둘렀다.
쩡-!
벨제뷔트의 피부에 불똥이 튀었다. 강철이 아닌, 다이아몬드라고 하더라도 베어낼 수 있는 검격이었다. 퀴엘의 검은 충분히 그만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벨제뷔트의 몸에는 작은 생채기가 났을 뿐, 멀쩡했다. 그는 퀴엘 같은 파리에게는 관심이 없다는 듯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우리엘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꽈르릉-!
다시 한 번 천둥소리가 흩어졌다. 그 충격이 사방으로 퍼지고, 천사들이 날아갔다. 오직 우리엘만이 그 자리를 꿋꿋이 지켰다.
‘도와줄 필요는 없겠군.’
추후 상처가 발목을 잡으면 모를까, 지금 당장 벨제뷔트를 도울 필요는 없어보였다. 아니, 그보다는 도울 여건이 되지 않았다.
화르륵-.
눈앞을 가득 메운 새하안 화염. 우성은 그것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순식간에 새하얀 불이 흩어지며 허공으로 사라졌다.
까앙-!
“오랜만이다. 반갑네, 그치?”
“만날 때마다 깨져놓고, 반갑긴 한가 보네.”
가장 먼저 우성을 향해 검을 휘둘러온 플레이어는 바로 박윤성이었다. 희번득한 눈빛으로 달려든 박윤성은 순식간에 수백 자루의 빛의 창을 만들어냈다.
박윤성은 처음 만남과 꽤 달라져 있었다. 성검 미카엘을 손에 넣고, 꽤 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훨씬 강해졌다. 처음에는 그저 순수한 신력만으로 이루어져 있던 순백의 검들에는 어느새 새하얀 불꽃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뒈져버려!”
검을 맞댄 채, 박윤성이 우성을 향해 순백의 검을 일제히 쏘아냈다. 이미 한 번 우성의 실력을 겪어봤던 터라,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지 않고서는 그를 죽일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새하얀 백염, 그것은 바로 미카엘의 염화였다. 비록 온전한 미카엘의 힘이 아닌, 빌려오는 것이라도 그것은 치명적인 힘이었다. 웬만한 악마들은 그 불꽃에 닿는 것만으로도 재가 되어 사라질 테니 말이다.
물론, 그것은 웬만한 악마들의 경우를 따졌을 때다. 우성은 악마도 아닐뿐더러, <대리인>까지 사용한 상태 플레이어였다. 그의 몸에서 시커먼 마기가 뿜어지며, 박윤성의 주위에서 쏘아진 순백의 검들을 막아내고 백염을 꺼뜨렸다.
“이런 시발!”
걸쭉한 욕지거리를 뱉어내며 박윤성이 검을 휘둘렀다. 예전같으면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고 위력적이었겠지만, 지금 우성의 눈에는 느리고 약했다.
쩡-!
한 검 검을 휘두르자 박윤성의 검이 허공으로 들렸다. 하지만 박윤성은 이를 악물고 검을 붙잡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우성의 힘을 감당해 낼 수가 없었다.
단숨에 박윤성의 몸을 반으로 베어버리고 싶었지만, 우성은 그럴 수 없었다. 그 뒤쪽으로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지원을 온 까닭이었다. 더불어 엑시드급의 천사들도 수십이었다.
“귀찮게…….”
가장 먼저 박윤성을 도와 우성에게로 달려든 플레이어는 바로 김동훈이었다. 그는 박윤성처럼 자신의 모든 능력을 끌어낸 상태였다. 그의 검에 새하얀 빛이 머금어지며 공격력이 더욱 강화되었다.
김동훈과 잠시 검을 맞댄 우성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게 빛났다. 조금 강한 플레이어 정도일 것이라 생각한 김동훈의 검이 박윤성에게 크게 못지않았던 것이다. 그의 몸과 검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을 느껴보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벨제뷔트와 싸우고 있는 우리엘과 흡사했다.
“우리엘의 계약자인가?”
“……그걸 어떻게 알았지?”
“성검 사용자가 둘이라…….”
우성은 씩 웃으며 말했다.
“이쪽도 마검이 둘이라서 말이야.”
그 순간, 우성의 뒤에서 세 쌍의 날개를 펼친 전현승이 날아들었다. 날개만 보면 꼭 천사같았는데, 루시퍼의 힘을 빌렸기 때문인지 역시나 색이 검었다.
예전과 달라진 점은 두 쌍까지밖에 꺼내지 못했던 날개가 세 쌍까지 사용이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최대 한 쌍밖에 사용할 수 없었던 날개가 지금은 무려 세 쌍이나 꺼내 보일 수 있었다.
천사들에게 날개의 개수가 힘을 상징하듯, 전현승 또한 날개의 개수가 곧 힘이었다. 세 쌍의 날개를 꺼내든 전현승의 힘은 어지간한 랭커 플레이어들도 찍어 누를 만했다.
우성의 위를 넘어온 전현승이 김동훈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순백의 성검 우리엘과 흑빛의 마검 루시퍼가 부딪혔다. 밀리는 쪽은 없었다.
“마검인가?”
“우리엘의 사용자면, 김동훈이라는 플레이어였던가? 같은 한국인이네.”
좁디좁은 대한민국 땅에 살고 있으니 어쩌면 조금은 인연이 닿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 순간,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울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아포칼립스에서의 악연이 현실까지 이어질지도 모른데 말이다.
그것은 우성과 박윤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 명의 랭커 플레이어 김동훈이 빠지자, 우성은 박윤성을 비롯한 플레이어들을 연신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수준 높은 플레이어였고, 몇 명 랭커 플레이어들도 있었지만 플레이어들의 주축은 박윤성과 김동훈이라는 성검 사용자였다.
그나마 박윤성을 비롯한 몇 명의 플레이어 덕분에 우성을 막을 수 있었다. 물론, 우성 역시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예전과는 다르다.’
상태가 훨씬 안정적이기는 했다. 광기도 없고, 자아를 빼앗길 것 같은 불안정함은 더더욱 없었다.
하지만 그 부작용일까? 대천사 다니엘을 상대할 때와 같은 절대적인 힘은 느껴지지 않았다. 마력과 마기가 폭발할 듯 넘치고, 근력과 민첩, 체력 등이 강해졌지만 그뿐이었다. 그 당시와 비교하면 아무래도 부족함이 있었다.
“이익……!”
그 때, 우성의 검이 뒤로 밀려나던 박윤성의 시야에 천천히 검을 뽑고 걸어오는 플레이어 한 명이 보였다. 지금껏 싸움에 참여하지 않고, 우성과 다른 플레이어들과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박윤성의 입에 미소가 번졌다.
“성검 사용자가 둘일 거라고 생각했냐?”
“그럼?”
파앗-.
그 순간, 형형한 빛을 뿜는 검을 뽑으며 플레이어 하나가 우성을 향해 달려들었다.
“셋이다, 이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