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그렇게 반갑게 인사해 주니 고맙군.”
“당연하죠. 누가 뭐래도 저희들은 앞으로 마신과 악마들에 대적해 함께 싸워야 할 같은 운명을 가지지 않았습니까?”
우리엘의 미소는 눈이 부셨다. 그녀의 웃음 하나에 어두웠던 동굴 안에 빛이 가득 번지는 듯했다.
아니, 실제로 그녀에게선 빛이 나고 있었다. 우리엘의 네 쌍의 날개를 비롯해 천사들의 날개에서는 은은한 빛이 흐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어둑했던 동굴 안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녀의 말은 묘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결코 반박할 수 없는, 그런 힘이었다. 그녀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정말로 악마들과 맞서 싸워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게 교화(敎化)인가?’
한 치 거짓이 섞여있지 않은, 악마들에 대한 순수한 적의. 우리엘은 한 치 의심도 없이 악마들이야말로 그릇되고, 천사들이야말로 정의의 표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악마들을 처단하는데 한 점 망설임이 없었다.
아무리 벨제뷔트가 천사보다는 악마에 조금 더 가깝다고는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조금’일 뿐이었다. 아직까지 위태로운 상태라는 점만은 변함이 없었다. 이 상황에서 우리엘의 혀놀림이 더해진다면 어떻게 다시 변할지 모른다.
“악마 앞에서 함께 악마들과 맞서 싸우자니, 못 하는 말이 없군.”
우성은 과장된 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우리엘을 비롯한 천사들의 시선이 우성에게로 향했다.
“대체 언제부터 천사가 악마들과 손을 잡았지? 그것도 왜 하필, 최고의 악이라는 벨제뷔트님과 손을 잡으려는 거지?”
“당신은 누굽니까?”
“그걸 알아서 뭐…….”
“너 이 새끼!”
그 때, 우리엘의 뒤편에서 쩌렁쩌렁한 외침이 들려왔다. 별의별 욕설이 다 섞여 들어가며 말을 꺼낸 이는 바로 박윤성이었다.
“……말 안 해도 되겠군.”
“개새끼, 넌 내가 반드시 죽여버린다고 했지!”
박윤성의 손에 새하얀 빛이 모여들었다. 곧 그의 손에 빛의 힘을 가득 머금은 무기가 생성되었다. 새하얀 불꽃이 맺힌 그것은, 바로 성검 미카엘이었다.
박윤성은 천사 진영의 랭커 플레이어들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존재였다. 보통 랭커 플레이어만 하더라도 충분히 경계해야 할 텐데, 박윤성 정도의 실력자라면 모든 스킬을 총동원 하더라도 상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멈추세요.”
그 때, 우리엘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박윤성의 발을 묶었다. 바로 앞으로 돌진하던 가운데 우뚝 멈춰선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자의로 멈춘 건 아닌 모양이었다.
“대화중이지 않습니까?”
“이……익.”
박윤성은 검을 내려놓고 몸을 돌렸다. 걸에 맺혔던 새하얀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아무리 막나가는 박윤성이라 하더라도 대천사의 말을 거스를 순 없는 모양이었다.
“이방인 분,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시는군요. 언제부터 천사들이 악마와 힘을 합쳤냐고 물으셨나요?”
우성은 우리엘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자 오한이 드는 기분이었다.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 가늘고 간지러운 목소리나 푸른 하늘은 가져다 옮긴 듯 푸르고 깊은 눈동자나, 모든 것이 아름다우면서도 무서웠다. 그녀는 우성을 노려본 그 순간부터 그를 제압하기 위해 힘을 쏟아붓고 있었다.
“그대의 모습을 보니 기껏해야 인간들 기준으로 서른 살 정도밖에 되지 않아 보이네요. 그 찰나와 같은 삶을 살고서, 참으로 당돌하게도 이야기 하시는군요.”
“내가 틀린 말을 했다는 소리야?”
“네. 언제부터라고 말하신다면, 태고적부터라고 대답해드리죠. 천사와 악마, 선과 악, 정의와 그릇됨을 가진 이 두 존재들은 오래 전부터 타락과 교화를 반복적으로 행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흔한 일은 아니지만, 당신들 시간 기준으로 몇 십 세기에 한 번씩 끊임없이 이루어졌죠.”
루시퍼를 말하는 걸까?
하긴, 태고적부터 계속되오던 전쟁이었다. 루시퍼처럼 타락한 천사들이 그 혼자만은 아닐 것이고, 벨제뷔트처럼 교화된 악마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뭐? 교화든 타락이든, 전부 악마나 천사들의 농간 아닌가? 조금이라도 상대의 전력을 깎아먹고, 자신들의 힘을 늘리려는.”
“그렇게 보이십니까? 한 면밖에 보질 못하는 인간들이라면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겠군요. 그래요. 그렇게 칩시다. 그래서요?”
“뭘?”
“타락이든, 교화든, 그 결과는 천사나 악마 본인 스스로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겁니다. 루시퍼가 과연 최면이나 세뇌 따위에 걸려 타락했을까요? 아닙니다. 대천사씩이나 되는 존재를 세뇌시킬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그게 설령 그 대단한 악마였던 사탄이라 할지라도 말이죠.”
우리엘의 말은 그럴듯한 논리가 있었다. 실제로 루시퍼는 어떠한 세뇌도 받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오롯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천사들을 배신하고, 악마들의 편으로 돌아섰다. 천사들의 입장에서 이것은 타락이라고 부른다.
거기까지 말한 우리엘은 우성에게서 벨제뷔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엘의 말을 듣던 벨제뷔트의 동공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벨제뷔트, 최고의 악마여. 비록 방법은 과격했으나, 저희의 이야기를 들은 당신은 분명 변했습니다. 저희는 알 수 있습니다. 처음 보았던 당신의 거대한 적의와 사기, 그리고 어둠의 힘은 확연히 줄어들었습니다. 그것은 분명 저희의 이야기를 듣고, 느끼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래봤자 힘으로 끌고가서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밖에 안 되지.”
“방법은 과격했을지 모르나, 저희가 한 말에 한 치 거짓이 없음은 아실겁니다. 그것은 벨제뷔트, 당신의 눈과 귀가 알고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엘은 우성의 말은 들은 채도 않았다. 여전히 벨제뷔트와 눈을 마주한 상태였다.
대신, 우성의 반박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궤변같았지만 그럴듯한 말이었다. 그 말은 한 점 거짓이 섞이지 않았고, 오로지 벨제뷔트의 의사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있었다.
선택은 벨제뷔트의 몫이었다. 만약 여기서 벨제뷔트가 돌아선다면, 우성은 물론이고 힘들에 이곳까지 온 일행은 끝장이었다. 퀘스트도 저 멀리 물건너가고, 벨제뷔트라는 악마들 최강의 패가 천사들에게로 넘어간다.
벨제뷔트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흔들리던 동공도 다시 잔잔해졌다. 다시금 흔들림 없는 수면 같은 눈동자가 되었다.
이윽고, 그의 입이 열렸다.
“그렇다고 해서, 날 공격한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
“……당신의 선택은 결국 그겁니까, 벨제뷔트?”
“선택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우리엘. 너도 이 상처들이 새겨지는데 공헌한 녀석들 중 하나니까. 난 받은 건 돌려주고, 당한 건 열 배로 돌려줘야 직성이 풀리거든.”
벨제뷔트는 자신의 가슴에 새겨진 자잘한 상처들을 가리켰다. 분명 이 상처들 중 무언가는 우리엘의 것이 있을 것이다.
벨제뷔트의 선택에 우리엘이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쌍의 날개가 서서히 펼쳐지며, 그렇지 않아도 환하게 빛나던 동굴 안을 눈부신 빛으로 채웠다.
“안타깝군요. 몇 년간 저희들이 나눈 대화가 다 부질없어지다니. 교화의 시간이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나도 까닥하다가는 네놈 천사들 혀 놀림에 넘어갈 뻔했지. 그런데 어쩌겠어? 내 성격이 보통 지랄 맞아야지?”
구구구구구-.
동굴이 울리기 시작했다. 조금씩이지만 우리엘을 비롯한 천사들의 빛으로 가득 찼던 동굴에 어둠이 스며들었다. 비록 완전하지는 않으나, 벨제뷔트의 몸에서 흘러나온 마기 탓이었다.
현재의 벨제뷔트는 천사보다는 악마에 가까웠다. 지금까지는 마기도, 신력도 사용할 수 없었던 그였다. 그는 우성이 동굴에 도착했을 때까지만 해도 마기도, 신력도 아닌 회색의 힘을 뿜어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벨제뷔트는 회색보다는 검은색에 가까웠다. 그것은 더욱 어둡고, 마기에 가까운 힘이었다. 비록 그 색이 검은색에 비해 연하다고 해도, 벨제뷔트의 힘이 발현된 것인 이상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그대… 다시 어둠으로 빠져들었군요.”
“낯간지러운 소리 그만하지. 하여간 마음에 안 든단 말이지. 이해도 안 되고. 그 오그라드는 말로 왜 내가 넘어갔을까?”
지지지지직-.
어둠과 빛이 충돌했다. 동굴이 금세 무너질 듯 흔들렸다. 어둠이 빛을 집어삼키고, 빛이 어둠을 집어삼키기를 반복했다.
“크으음.”
우리엘의 옆에 있던 천사장 퀴엘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둠의 힘에 맞서던 빛이 힘에 부쳐보였다. 대천사 우리엘을 제외한 천사들 모두가 그러했다.
“아무래도 다시 한 번 교화의 시간을 가져야겠습니다.”
우리엘의 날개가 완전히 펴졌다. 그녀의 손에 기다란 창 하나가 생겨났다. 과거 천신의 뼈를 갉아서 만들었다는 무기였다.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동굴 안으로 들어와, 벨제뷔트를 발견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똑같았다. 동요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었는데, 우성은 그 까닭을 알 수 있었다.
‘생각보다 벨제뷔트의 상태가 멀쩡하지 않다.’
빛을 몰아내는 어둠의 힘이 생각보다 강하지 않았다. 세상에 알려진 벨제뷔트의 힘을 생각하면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현재의 벨제뷔트는 과거의 벨제뷔트가 아니었다. 천사들에 의해 상처받고, 교화되어 힘의 성질을 잃어버린 것이다. 힘 자체를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지만, 온전한 마기를 이끌어낼 수 없다는 사실은 치명적이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벨제뷔트는 벨제뷔트였다. 마기의 성질을 잃어버렸다 하더라도, 마왕들 중 수위를 다툴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대천사 우리엘의 빛을 몰아낸 것이 그 증거였다.
문제는 사라지지 않은 상처.
혜정에 의해 조금 호전되었다고 하나, 벨제뷔트의 상처는 여전했다. 그 상처가 언제 다시 발작을 일으키고, 벨제뷔트의 발목을 잡을지 모른다. 현재 상태로 우리엘을 쉽사리 제압할 수 없으니 장기전으로 갈 확률이 높았는데, 그렇게 되면 불리해지는 쪽은 자명했다.
‘더군다나…….’
우성은 우리엘의 옆에 있는 퀴엘이라는 천사를 바라봤다. 첫 등장부터 혜미의 최고위 마법을 막아내며 강력한 힘을 보여준 천사였다. 일반적인 천사장이라 해도 상당히 골치 아팠는데, 상대는 그 천사장들 중에서도 보통 강한 힘을 가진 게 아니었다.
솔직히 언뜻 느껴지는 힘만으로는 천사장인지 대천사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퀴엘은 어지간한 천사장 서넛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 옆에 있는 다른 천사장도 선악공성에서 만난 보통 천사장들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진 듯했다.
거기다 엑시드급 천사들이 세 자리 수에 가까웠고, 박윤성을 비롯한 범상치 않은 플레이어들까지 있다. 우성은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 한 가지 방법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현수야. 그리고 전현승씨.”
“네?”
“응?”
“혹시라도 제가 또 다시 미쳐버리면, 다른 일행들이 다치지 않게 잘 부탁드립니다. 엑시드급 천사는 몰라도, 가능한 천사장들과 박윤성 정도는 제가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뭐? 너 혼자서 어떻게…….”
막 질문을 던지던 안현수가 멈칫했다. 현재의 우성이라면 모를까, 하나의 스킬을 통해 자아를 잃어버린 우성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우성이 품 속에서 준비한 물약을 꺼냈다. ‘성스러운 정신력의 물약’이 담긴 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