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천사들이요?”
그렇게 묻는 순간, 우성은 막대한 양의 신력을 느꼈다. 그것은 비단 그 혼자만이 느낀 게 아니라, 잠들어 있던 다른 일행들 역시도 느낄 수 있었다.
어느 새 일어나 있던 안현수와 전현승을 비롯해 잠들어 있던 다른 일행들까지도 잠에서 깨어났다. 그들은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뼈로 이루어진 동굴 밖에서 느껴지는 막대한 신력에 몸을 떨었다.
“이건…….”
“우리엘의 힘인 모양입니다.”
전현승은 금세 그 힘의 주인을 알아챘다. 막대한 힘이 느껴지긴 했지만, 그 힘은 꽤 희미했다. 약하다기보다는 거리가 꽤 멀었다.
이 정도 거리에서 이만한 신력이 느껴질 정도라면, 최소한 천사장급은 아니었다. 이곳 용의협곡에 와 있는 천사들중 가장 강력한 존재, 바로 대천사 우리엘밖에는 없었다.
“우리엘인가?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지겨운 얼굴 다시 보겠군.”
“우리엘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자마엘, 라파엘, 미카엘, 우리엘. 날 사로잡은 대천사들이지. 그 중 자마엘은 내 손에 죽었지만, 다른 셋은 멀쩡히 살아있다. 다시 한 번 날 잡기 위해 우리엘이 온 모양이야.”
“그는 강합니까?”
“미카엘이나 라파엘에 비하면 조금 모자라긴 해도, 그 둘을 제외하면 대천사들 중에서는 대적할 상대가 드물지. 마왕들 중에서도 나나 디아블로, 혹은 메피스토가 아니면 상대하기 어려울 거다. 아, 최근 본 녀석들 중에 루시퍼라면 잘 모르겠지만.”
그 정도란 말인가?
대천사나 마왕들 사이에서도 급이 나누어진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디아블로나 벨제뷔트가 그 가장 큰 예였고, 루시퍼도 마왕들 사이에서는 수위에 꼽힐 만큼 강한 존재였다.
하지만 벨제뷔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런 루시퍼조차도 우리엘을 이길 수 있을거라 확신할 수 없었다. 선악공성 당시에서 보여준 루시퍼의 힘을 생각하면, 우리엘 또한 최소한 그 정도는 된다고 봐야한다.
‘곤란한데.’
예전에 비해 훨씬 강해졌다고는 하나, 우성이 결정적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원동력은 <대리인>이라는 스킬이었다. 마력 스텟이 상승하면서 <대리인>의 스킬 레벨은 꾸준히 올랐고, 위급한 상황에서 사용할 때마다 항상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미 아포피스는 초(超) 마검의 단계에 올라있었다. 예상치 못하게 <대리인>의 스킬레벨이 한 단계 올랐던 적이 있었지만, 그 직후 사용하고나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대리인>의 스킬레벨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즉, 스킬의 효과에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대리인>을 사용하고도 대천사들 중 약체라고 판단되는 다니엘을 겨우 상대할 수 있었는데, 지금 상황에서 우성은 자신이 우리엘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밖에 다른 천사장들이나 천사들, 그리고 박윤성을 비롯한 플레이어들을 어떻게 하고? 우성이야 <대리인>이라는 스킬이 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일행들이 문제였다.
“벨제뷔트님.”
“왜?”
“지금 몸 상태로… 우리엘을 상대하실 수 있겠습니까?”
벨제뷔트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아마도.”
“확신은 못 하시는 거군요.”
“이깟 상처 하나 입었다고 내 힘이 어디로 사라지지는 않지. 문제는, 이 상처가 언제 다시 발작하느냐지.”
발작.
벨제뷔트의 상처는 보통 상처가 아니었다. 대천사장의 무구인 기아스에 당한 상처인 만큼, 제대로 치료하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벨제뷔트를 괴롭힐 것이다.
그밖에도 자잘한 상처들이 벨제뷔트의 몸에는 무성하게 나 있었다. 작은 상처라 하더라도 기아스의 검격에 당한 상처였다. 그것들이 아직까지 회복되고 있지 않은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하여간, 돌아가면 디아블로에게 말해서 치료 마법이라도 배워놓아야겠어.”
“벨제뷔트님이 누구에게 당할 거라고 어디 상상이나 하셨겠습니까?”
“사탄에게 당했던 적이 있지만, 지금과는 상황이 조금 달랐지. 신력에 당한 게 아니라 며칠 만에 나았으니까.”
“옛날 이야기나 하고 있기엔 지금 상황이 그리 좋은 것 같지 않습니다.”
우성은 점차 가까워지는 존재감에 몸을 떨었다. 마치 선악공성 당시 처음 다니엘을 마주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거대한 빛의 향연이 다가오고 있다. 태양처럼 환하게 빛나는 존재를 선두로, 수많은 빛의 존재들이 뒤따랐다. 태양의 옆으로는 달처럼 빛나는 두 환한 존재가 버티고 있다.
감각적으로 느껴진 단편적인 정보에 불과했지만, 우성은 그것이 바로 대천사 우리엘을 비롯한 천사장들과 다른 천사들임을 알 수 있었다. 어째서인지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그들의 존재감을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플레이어들은 어디 있지?’
이상하게도 플레이어들의 기척은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거대한 태양 아래 빛이 가려져 있는 건지, 아니면 천사들만 따로 오고 있는 건지는 눈으로 확인해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쿵-.
벨제뷔트가 처음으로 발을 딛고 일어났다. 육중한 몸이 단단한 다리를 버팀목으로 하고 일어났다. 그의 어두운 존재감이 동굴 안을 가득 메웠다.
‘이제 조금은 악마같군.’
두렵긴 했어도, 우성은 처음 벨제뷔트를 보고 ‘악마’라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렇다고 천사라는 느낌도 아니고, 너무나도 거대하고 강한 인간 같은 느낌을 그에게서 받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벨제뷔트는 어느새 조금은 악마 같은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그것이 자신이 한 말의 영향 때문인지, 아니면 벨제뷔트의 사제인 혜정의 영향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악마에 가까워졌다는 사실이 결코 부정적이진 않았다.
“슬슬 오는군.”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한가로이 앉거나 누워 있던 일행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싸울 준비를 끝마쳤다. 안현수는 바로 옆에 있는 용을 쓰다듬었다. 천사들의 존재를 느꼈는지 용은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르르르르-.
본능적으로 천사들을 적으로 인색한 모양이었다. 하긴, 자신의 주인인 안현수가 적대감을 품은 존재들에게 용이 호의적일 리가 없긴 했다.
이윽고, 동굴 안으로 들어온 천사들의 존재가 느껴졌다.
“수가… 어마어마해. 네 쌍의 날개를 가진 대천사도 문제지만, 다른 천사들도 전부 엑시드급 천사들뿐이야.”
“플레이어들은?”
“꽤 있어. 스물 정도? 예전에 봤던 박윤성이라는 재수 없는 플레이어도 있고.”
제3의 눈을 활성화시킨 혜미는 이미 동굴 바깥을 확인하고 있었다. 평상시에는 반경 50미터 정도를 관찰하고 감지하는 게 전부지만, 유사시 집중하면 더 넓은 반경을 수색하는 게 가능했다.
“동굴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어. 어, 어?”
“왜 그래?”
혜미의 몸이 굳자, 이상하게 느낀 우서잉 물었다. 소름끼친다는 표정으로 몸을 벌벌 떨며, 혜미가 중얼거렸다.
“대천사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아.”
“뭐?”
우성이 설마 하며 동굴 바깥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른 평범한 마법이라면 몰라도, 혜미의 제3의 눈이 간파당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제3의 눈은 마법이 아닌, 플레이어의 고유 특성이었다. 마법과는 다르게 플레이어 특성은 활용에 마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플레이어 개인의 체력과 정신력, 이 두 가지만을 필요로했다.
만약 혜미의 제3의 눈이 간파당했다면 이미 대천사는 이 동굴 안에 용 이외의 다른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것이다. 일행은 더욱 경계를 단단히 하며 천사들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왔다.”
서서히 다가오던 발걸음소리.
그 소리가 일정 거리까지 다가왔을 때, 혜미의 외침이 동굴을 가득 메웠다.
“프로미넌스(Prominunce)!”
우웅, 우웅, 우우우웅-.
외침이 터져 나온 순간, 혜미의 주변과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 방향에 초고온의 불덩어리가 생겨났다. 수십 개에 이르는 불의 구체는 순식간에 쏘아져 막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천사들을 덮쳤다.
혜미가 사용한 마법은 일한 화염 계열 마법 중 최고의 위력을 자랑하는 마법이었다. 단일 대상의 마법으로는 헬파이어(Hell fire)가 최고로 꼽히지만, 혜미의 마법은 그보다 범위가 훨씬 넓고 폭발력이 강했다. 시중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마법이었는데, 무려 그 가격이 20만 골드였다.
“허억. 허억.”
혼신의 마법을 쏘아낸 혜미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천사들의 존재를 발견했을 때부터 그녀는 플레이어 특성을 이용해 동굴 밖을 살피는 한편, 자신의 최고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여기에 쏟아 부은 마법만 해도 그녀의 마력 절반이 훌쩍 넘었다.
“성공했겠지?”
혜미의 중얼거림에 우성은 말로 대답하기보다는 고개를 끄덕여 화답했다. 최초 유효타 공격 후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공격을 가하고 싶지만, 후끈거리는 열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만큼 혜미가 날린 마법의 열기가 대단했다.
‘마법도 마법이지만, 혜미도 대단한데.’
이 정도 수준의 마법을 발현한 것만 해도 대단하다 할만 했다. 꽤나 큰 위력을 기대하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 정도면 제 아무리 랭커 플레이어나 천사장급 천사라 하더라도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대천사장 우리엘이라면 모를까.
화염의 불길이 걷히고, 콜록거리는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아직까지도 동굴 아래는 이글거리는 불꽂이 넘실거렸지만, 이만하면 거의 걷혔다고 봐야한다.
“……시발.”
“저게 뭐야?”
불길이 걷히고 드러난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한 일행은 저마다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적잖은 피해를 주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눈앞에 드러난 결과는 힘없이 그지없었다. 단 한 명, 가장 선두에서 날아오던 존재에 의해 막혀버린 것이다.
심지어 그 존재가 대천사 우리엘이었다면 이 정도로 놀라지도 않는다. 아무리 혜미가 전력을 쏟아냈다고 해도, 대천사를 상대로 피해를 입힐 수 있으리라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으니까.
문제는 마법을 막아낸 대상이 우리엘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꽤 거침없는 환영 인사로군.”
우리엘의 옆에 있던 세 쌍의 날개를 가진 존재. 바로 천사장이었다.
헌데 그 기세가 지금껏 보아온 다른 천사장들과는 사뭇 달랐다. 꼭 천사장이 아닌, 약한 대천사를 보는 것만 같았다.
그는 바로 천사장 퀴엘이었다. 우리엘의 종속이 아닌 미카엘의 종속이었는데, 천사 진영에 있는 천사장들 중 수위를 다투는 존재가 바로 그였다. 가진바 무력만으로 보면 웬만한 천사장 서넛을 감당하고도 남을 존재였다.
“대체 저 녀석은 뭐지?”
“천사장인 것 같습니다.”
“그냥 천사장이라면, 저도 몇 번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 자는…….”
일행들 중, 선악공성을 가장 많이 겪어본데다가 천사장을 여러 번 보았던 에든이 한 말이었다. 그는 지금껏 보았던 천사장과는 사뭇 다른 퀴엘의 존재감에 의문을 품었다.
불길이 걷히자 퀴엘이 길을 비켰다. 그러자 그 뒤로 네 쌍의 날개를 가진 우리엘이 걸어왔다. 그녀는 일행에게는 전혀 시선도 주지 않은 채, 그 뒤쪽의 벨제뷔트에게로 눈을 고정했다.
“왜 이방인들이 여기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래간만이군요, 벨제뷔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