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나?”
벨제뷔트는 쓰게 웃으며 벽에 기대고 있던 등을 떼었다. 그렇다고 몸을 완전히 일으킨 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벽에 기대고 있던 상체를 일으킨 게 전부였다.
여전히 안개 속에 가려져 있었지만 상체를 일으킨 벨제뷔트의 덩치는 더더욱 거대해보였다. 단순히 키뿐만이 아니라 떡 벌어진 어깨와 근육질 팔뚝은 안개 속에 가려져 있더라도 위협적이었다.
확실히 어느 누가 보더라도 천사의 모습은 아니었다. 모름지기 천사라면 좀 더 가는 체구에 아름다운 날개를 가지고 있지 않던가? 대천사 다니엘과 가비엘도 눈앞에 있는 벨제뷔트처럼 우락부락한 체구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확실히, 천사로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그럼 악마겠지.”
“하지만 마검 벨제뷔트는 분명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악마들은 현재 벨제뷔트님께서 천사들에게 반쯤 교화된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우성은 숨기지 않고 하멜의 영주 볼락을 비롯한 악마들의 걱정을 토로했다.
마검의 존재는 악마와 뗄 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악마가 죽게 되면 인과율에 따라 마검이 부러지고, 마검이 부러지면 마찬가지로 악마가 죽는 상황에 닥치게 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악마들의 검은 빛을 띠고 있었다. 천사들의 신력이 밝은 흰색 빛을 띠는 것과 반대로 악마들의 마기는 검은 빛을 띠기 때문이었다. 온통 마기로 가득한 마검의 검신이 검은 건 당연했다.
하지만 벨제뷔트의 마검은 회색빛이었다. 처음부터 그런 색을 띠었던 것도 아니고, 원래는 검은 빛을 가지고 있던 검이 회색빛으로 변한 것이다. 더군다나 현재 벨제뷔트의 상황으로 보아서도 그가 천사들에게 상당히 물들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 악마들은 벨제뷔트의 정신이 악마와 천사 사이에 있지 않을까 하고 우려했다. 다행히 성마검 벨제뷔트에 있는 마기가 점차 신력을 밀어내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안심할 단계는 아니라는 게 볼락의 말이었다.
“누가 그런 말을 했지?”
“누구라고 특정 지을 것 없이, 많은 악마들의 생각입니다. 군주급 악마들은 물론, 디아블로님을 비롯한 마왕까지도요.”
우성은 일부러 디아블로를 언급했다. 안개 속으로 보이는 벨제뷔트의 안광이 시퍼렇게 빛나는 게, 혹시 보복이라도 할까봐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디아블로라면 아무리 벨제뷔트라도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존재였으니 말이다.
“그 놈들, 눈치 한 번 빠르군. 디아블로 녀석, 머리 약은 건 알아줘야 한단 말이지.”
“네?”
“그 녀석 말대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악마인지, 천사인지도 제대로 구분이 되지 않더군. 날 상처 입힌 천사들에게 한 점 악의도 생기지 않았다. 그저 내가 누구인지, 내가 가진 힘은 누구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쓸데없는 잡생각만 많았지.”
벨제뷔트의 주위에 떠 있는 잿빛 구체들이 둥실거렸다. 그것은 꼭 벨제뷔트의 심경 변화를 눈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한 번 용솟음치더니 다시 가라앉고, 다시 평행을 유지하며 벨제뷔트의 주위를 잔잔하게 떠돌았다.
“예전 기억이 꽤 희미했다. 내가 누구였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지. 당연히 내가 알던 다른 악마들도 기억나지 않았고.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고, 내가 악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자 차차 기억이 나더군.”
벨제뷔트의 말은 꽤 길게 이어졌다.
“꽤 많이 고민했다. 몇 년 동안 이 하나만 가지고 고민했지. 과연 난 악마인가, 천사인가? 혹시 뿔이 없는 악마가 아닐까? 혹시 날개가 없는 천사가 아닐까?”
“그래서 정답을 찾으신 겁니까?”
“그래. 몇 년 정도 고민하다 보니 답은 나오더군. 그 결과 자연스럽게 잊고 있던 기억들도 살아났고. 난 악마였다.”
너무나도 당연한 해답을 내놓으면서도, 벨제뷔트의 목소리는 꽤나 비장했다. 그럴 수밖에 것이 그의 입장에서는 수천, 수만 번씩 고민한 끝에 내린 정답이었기 때문이었다.
우성은 벨제뷔트의 검이 왜 회색에서 점차 검은 빛을 되찾아가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것은 벨제뷔트 스스로가 점점 자신이 악마라는 쪽으로 생각을 굳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시금 이런 생각이 들더군.”
“이런 생각이라면……?”
“과연 악(惡)이 승리하는 게 옳은 일인가 하는. 어느 종족도 우리 악마들의 승리를 원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 하다못해 선(善)도, 악(惡)도 아닌 인간들마저도 우리들의 승리를 바라고 있지 않은데 말이지.”
스스스스-.
그 순간, 벨제뷔트의 몸을 맴돌던 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안개 속으로 드러난 벨제뷔트의 눈을 마주한 순간, 우성은 그대로 몸이 굳어버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은가, 인간들?”
“…….”
우성은 본능적으로 여기서 솔직한 대답을 내놓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대답이 어쩌면 현재의 벨제뷔트가 천사들에게로 돌아서는 계가기 될지도 모른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벨제뷔트의 물음에 대한 대답을 하자면 ‘그렇다’고 할 수 있었다. 악(惡)도, 선(善)도 아니지만 인간들은 은연중 악(惡)을 멸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때문에 악마들의 존재는 성경에서도 정의의 반대로 표현되곤 했다. 악(惡)을 정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우성 역시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하지만 악마 진영에서 활동하며, 천사들을 만나오고 천사 진영의 플레이어들과 몇 번 마주한 결과, 우성은 자신이 알고 있던 선(善)이라는 개념을 깨뜨리고 말았다. 절대적인 선(善)이란 없으며, 어느 쪽이 옳거나 틀린지는 정해져 있지 않다고 말이다.
“그것은… 틀린 생각입니다.”
“틀리다? 무엇이 말이냐?”
“벨제뷔트님의 말씀대로 인간은 중립의 존재입니다. 하지만 벨제뷔트님의 착각처럼 많은 인간들이 악(惡), 즉 악마(惡魔)들을 싫어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착각이라… 꽤 당돌한 표현을 쓰는군.”
심기가 과히 좋지 않은 듯, 벨제뷔트는 눈을 날카롭게 치켜떴다. 하지만 우성은 이 자리에서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거슬리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사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벨제뷔트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우성은 가빠오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간신히 아포피스에게 의지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말을 잇는 것조차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우성의 눈을 한동안 응시하던 벨제뷔트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말을 들어볼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계속 말해 봐라.”
“……감사합니다. 벨제뷔트님의 생각이 잘못됐다고 말씀드리는 이유는, 인간들은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치우지지 않았다?”
“네. 인간들은 절대적인 악(惡)으로 태어나는 악마들과는 달리,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많은 인간들이 천사들을 경배하는 것과는 반대로, 악마들을 숭배하는 인간들도 적지 않습니다.
전혀 상관없이 숲이나 땅을 동경하는 인간들도 있죠. 심지어 그들은 자신들이 먹는 소나 돼지 따위를 신으로 떠받들기도 합니다.”
“소 돼지를?”
벨제뷔트는 다시 한 번 우성의 눈을 마주했다. 이번엔 위협을 가하기 위함보다는, 그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우성의 말은 진실이었다.
“이상한 종족이군. 인간들은.”
“네. 많은 인간들이 천사들을 숭배하긴 하지만, 그게 인간들의 정답은 아닙니다. 정해진 정답이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들입니다.”
“그런가?”
“네. 하지만 벨제뷔트님은, 인간이 아닌 악마입니다. 정해진 정답이 없는 인간들과는 달리… 악마들에게는 악(惡)이라는 절대적인 정답이 정해져 있습니다.”
마치 미리 생각해 두었던 생각처럼 우성은 막힘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것은 짧지 않은 시간을 고민해 오던 벨제뷔트의 물음에 꽤나 큰 화두를 던졌다.
“정답이… 정해져 있다.”
스스스스-.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성은 벨제뷔트의 주위에 떠다니는 잿빛 구체가 조금 더 검어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니, 확실히 검어졌다. 그 색의 변화는 단순히 구체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벨제뷔트의 주위를 감싸고 있던 안개도 조금이지만 검은색을 띄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눈빛만 겨우 드러낼 정도의 안개가 옅어지기 시작해, 이제는 벨제뷔트의 모습을 모두 드러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군.”
안개가 걷히고, 모습을 훤히 드러낸 벨제뷔트는 그야말로 거대했다. 앉아있음에도 우성과 눈높이가 거의 비슷했고, 단단한 근육의 갑옷으로 둘러싸고 있는 몸은 완벽하다는 말이 딱 어울렸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특징은 선홍색의 머리와 기다란 두 개의 어금니였다. 허리까지 늘어진 선홍색 머리는 핏빛을 연상케 만들었고, 두 개의 어금니는 유일하게 그를 인간과 차별화 시킬 수 있는 특징이었다.
덩치가 과하게 크다는 점과 아랫입술 밑까지 내려온 어금니만 제외하면 꽤 미남자로 보였다. 이목구비도 뚜렷하고, 눈도 붉은색이라 신비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잘생긴 ‘악마’라는 느낌이지 잘생긴 ‘사람’이라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았지만 말이다.
‘악마는 악마로군.’
스스로의 모습을 보고 천사를 떠올렸다고 하니,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한 눈에 보아도 사람인지 악마인지 헷갈렸던 디아블로라면 몰라도, 저렇게 생겼다면 악마라는 자각 정도는 금방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앉아 있던 벨제뷔트는 한 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났다. 앉아 있던 상태에서 다리를 펴고 일어나자 덩치는 훨씬 거대해보였다. 바로 눈앞에서 그를 마주하고 있던 우성은 고개를 높이 들어야했다.
“오랜만에 다리를 펴고 일어났더니 좀이 쑤시는군. 몇 년 만인지 모르겠어.”
“좀이 쑤시는 게 아니라, 상처가 쑤시는 게 아닙니까?”
“아, 이거 말이냐? 한동안 꽤 아프긴 했는데, 이젠 괜찮다. 천사 놈들의 창칼에 하도 찔려서 말이지.”
벨제뷔트의 상체는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상처가 썩은 것인지 베이고 뚫린 상처부위가 파랗게 올라왔고, 화상처럼 잔뜩 그을린 자국들도 남아있었다. 천사들에게 상처를 입은 뒤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물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여기 상처는 조금 따갑군. 미카엘 녀석, 왜 대천사장 안 되고 대천사에 머물러 있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그 녀석 정도면 대천사장이 되고도 남았을텐데.”
벨제뷔트는 대천사들과 싸웠을 때를 떠올리는지 희미하게 웃었다. 그것은 본능적으로 전투를 즐기는 악마들의 성향이 투영된 것이었다. 천사들 중 싸움을 즐기는 이들은 극히 드문 반면, 악마들 중 대다수는 피와 살점이 튀는 싸움을 즐겼다.
우성은 그 모습을 보며 벨제뷔트가 악마들에게로 조금 더 다가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주위를 떠다니는 구체가 아직 완전히 검어지지 않은 걸 보면 완벽하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조금 더 검은 빛에 가까워졌다.
“재미있는 말 잘 들었다. 인간들 세치 혀가 제법이라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그 말이 꼭 틀린 말은 아니었어.”
“세치 혀라기보다는… 사실을 말씀드린 겁니다.”
“그런가? 뭐, 사실 다른 것보다는 너희를 부른 건 이 녀석에게 볼 일이 있어서인데 말이지.”
벨제뷔트는 한 걸음에 혜정에게로 다가갔다. 그녀는 벨제뷔트라는 거인이 자신의 앞에 서자, 조금 겁을 먹은 듯 우성의 뒤로 움츠렸다.
“쯧. 겁 한 번 많군. 이런 자그마한 인간이 내 사제라니…….”
“무, 무슨 일이신데요?”
“다른 건 아니고…….”
벨제뷔트는 몸을 돌려 등을 보였다. 그의 등을 확인한 일행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이 상처를 좀 치료해 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