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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플레이어-214화 (213/258)

214화

“도착한 모양입니다.”

우성은 가까운 곳에 보이는 잿빛 구체를 보며 말했다. 라이트 마법의 빛이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는 그곳에는 꽤나 큰 덩치의 인영이 벽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멀리서 느껴지던 존재감과는 달리, 막상 눈앞에서 마주하자 우성은 머릿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아포피스와는 별계로 우성의 온 몸은 더 이상 다가가지 말라고 머릿속에 경종을 울렸다.

‘벨리알이나 루시퍼와는 다른 느낌인데.’

같은 마왕이라고 해도 벨리알과 루시퍼는 느낌이 달랐다. 벨리알은 한없이 가볍고 욕망으로 가득 찬 마왕이었지만, 루시퍼는 반대로 무겁고 오싹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우성은 그 둘 중 어느 누구에게서도 무섭다는 느낌은 받지 않았다. 벨리알의 경우 <대리인>을 사용하지도 않은 채 바로 눈앞에서 마주했음에도, ‘역시 마왕은 마왕이구나’ 하는 감상이 전부였다.

하지만 막상 벨제뷔트를 멀리서 지켜본 우성의 가슴속에는 지금껏 한켠에 잊고 있던 ‘공포’라는 감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애써 아포피스를 움켜쥐며 두려움을 떨쳐내려 했지만, 그 시도도 영 시원찮았다.

일행은 좀 더 앞으로 나가 벨제뷔트의 모습을 더욱 자세히 관찰했다. 일행의 발자국 소리는 몰라도 함께 있던 안현수의 용이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동굴이 쿵쿵 울렸다. 분명 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벨제뷔트는 전혀 미동도 않고 그 자리에 의연히 앉아있었다.

이윽고 혜미가 만들어낸 라이트 마법의 빛이 벨제뷔트에게 닿았다. 그의 주위로 떠다니는 잿빛 구체들은 몸을 보호하듯 둥실둥실 떠다녔고, 옅은 안개가 그의 몸을 가리고 있었다.

안개 사이로 드러난 벨제뷔트는 꽤 건장한 남성으로 보였다. 아니, 단순히 건장하다는 말로는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인간으로 치면 거인으로 볼 수도 있을 법했다. 뿔도 달려있지 않고, 인간과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음에도 2미터 50센치는 됨직한 키를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모습 때문에 겁을 먹거나 한 건 아니었다. 어미용은 거대한 동굴을 가득 메운 덩치로 인해 위압적이었다면, 벨제뷔트는 단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거대한 느낌이었다.

“……이거 진짜, 도망가야하는 게 아닌가 몰라.”

머릿속으로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위험한 메시지에 우성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도망가기엔 그간의 수고가 너무 아까웠다. 벨제뷔트 하나를 만나자고 그 위험한 중간지역을 뚫고 온 게 아니던가?

우성도 이런 반응인데, 다른 일행들은 더했다. 바로 가까이 있던 전현승은 점점 더 심하게 떨리는 검을 부여잡으면서도 자신의 공포심까지 이겨내기 위해 발버둥쳤다. 안현수나 에든, 에릭과 같은 경우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행히 육체적인 문제가 아니라 혜미는 다른 일행들보다 반응이 덜했다. 마법사 플레이어인 그녀는 상대적으로 전사 계열의 플레이어인 다른 일행들보다 정신력 스텟이 준수한 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멀쩡한 건 아니었다.

“진짜… 이러다 얼어 죽겠네.”

그녀를 포함한 다른 일행들은 본능적인 공포를 육체의 고통으로 바꾸었다. 덜덜 떨리는 공포를 가지고 몸이 으슬으슬 떨리며 춥다는 느낌으로 착각한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춥다는 정도로 표현하기에는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우성과 전현승밖에는 없었다.

“저런 놈이랑 계속 같이 살았던 거야?”

그르르르-.

안현수의 물음에 용은 구슬픈 울음소리를 흘렸다. 몇 년 동안 자신의 집을 빼앗기고, 저런 존재와 같은 공간에서 지내야 했던 용은 드디어 자신의 고통을 주인이 알아주었다는 생각에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게 다른 일행들이 벨제뷔트의 존재감에 압도되어 몸을 떨고 있을 때, 혜정이 다시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벨제뷔트의 사제인 그녀는 자신의 주인에게 이끌리듯 아련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그를 가리켰다.

“그분이 부르신…….”

“이제 다 왔으니 그만 정신 좀 차려라.”

벨제뷔트를 발견한 우성이 혜정의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보아하니 벨제뷔트의 사제로 각성했을 때처럼 뭔가 의식을 치르는 것 같지는 않았고, 아무래도 벨제뷔트가 자신의 사제인 그녀를 통해 무언가 의사를 전달한 모양이었다.

“그분이…….”

“……잠시 기절이라도 시켜야 하나?”

혜정을 이 상태로 둘 수는 없어 우성은 아포피스의 손잡이 부분으로 그녀의 뒷목을 살짝 쳤다. 그러자 혜정의 몸이 잠시 휘청거리더니, 우성에게로 몸을 기대었다.

“오빠……?”

“정신 차렸어?”

“정신이요? 제가 정신을 잃었어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무구한 눈으로 우성을 바라보며 혜정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모아져 있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저기, 벨제뷔트님께서 널 애타고 찾고 계시는 것 같더라.”

우성이 손가락으로 벨제뷔트를 가리키자, 혜정이 그곳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안색을 싹 굳혔는데, 아무래도 그녀 역시 벨제뷔트의 존재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익숙해요.”

“그야 네 직업의 근본이니까. 기억하지? 벨제뷔트의 저서를 가지고 전직했으니까.”

“네. 기억해요. 아, 그러고 보니 방금 전에 그때 들었던 목소리와 같은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아요.”

역시.

우성은 벨제뷔트를 향해 걸어갔다.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곤 있지만, 혜정을 통해 자신들을 부른 것이라면 다가가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뿌연 안개 때문에 제대로 모습이 보이진 않았지만 벨제뷔트는 분명 자신들을 제대로 보고 있지 않았다. 여전히 그 자리에 누워 동굴의 천장에 박힌 보상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있는지 의문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더 큰데.’

멀리서 어렴풋이 봤을 때도 꽤 거구였지만 가까이서 보자 더욱 거대해보였다. 벽에 기대어 누워있음에도 압도될 정도였다.

우성의 발소리가 지척까지 느껴지자, 그때서야 벨제뷔트의 고개가 돌아갔다. 안개에 가려져 눈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우성은 그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잘 찾아왔군.”

평범한 목소리였다. 조금 낮은 저음의 목소리였는데, 찾아본다면 비슷한 목소리를 어디선가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성대모사를 한다면 쉽게 따라할 수 있을 만큼 흔해빠진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 안에 담긴 혼탁한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단순히 다른 악마들처럼 마기를 풍긴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그 목소리 안에는 무기력함과 혼란, 파괴적인 본능이 섞여 듣는 이로 하여금 몸을 벌벌 떨게 만들었다.

“……당신의 사제를 따라왔습니다.”

“그 자세에게 내 의사를 전달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동굴에 들어왔기 때문이지. 칭찬하마.”

칭찬의 말치고는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어조였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당연했다. 그의 말 속에는 무기력함이 가득했다. 어떠한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은 말이기에 더욱 무서운 것이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그리고 그의 말 한마디에도 그가 정상이 아님은 알 수 있었다.

“부르신 이유가 뭡니까?”

“그러는 너희는 왜 나를 찾았지?”

“그거야…….”

우성은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이런 종류의 질문을 듣게 될지는 전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정확한 대답을 하자면 ‘퀘스트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SS등급의 최상위 퀘스트는 난이도가 높은 만큼 어마어마한 보상이 있을 게 분명했다. 그 보상으로는 포인트는 물론, 루시퍼나 디아블로처럼 스텟과 같은 무궁무진한 보상을 기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퀘스트와 관련된 문제를 일종의 NPC이기도 한 벨제뷔트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그는 이방인인 플레이어들의 존재를 알고 있지도 않았다.

“대답이 없군.”

“뭐라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결코 나쁜 의도는 아닙니다.”

“내 사제를 검으로 후려친 놈에게 들을 만한 소리는 아닌 것 같군.”

“그야…….”

“알고 있다. 그거야말로 나쁜 의도였다면 손잡이로 때리지는 않았겠지. 나 때문에 잃어버린 저 사제의 정신을 되찾아 주기 위함이었을 테지?”

우성은 벨제뷔트가 생각보다 냉정한 사고를 하고 있다는데 놀랐다. 부상은 입고 정신이 혼란스러운 중이라 멀쩡한 사고가 불가능할 줄 알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의외군. 난 내 사제가 나와 같은 악마일 줄 알았는데 말이야.”

“네?”

“인간들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그것도 한 명도 아니고 이렇게 많이. 인간들이 전쟁에 끼어들기라도 한 건가?”

벨제뷔트의 질문은 우성이 대답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인간들이 왜 악마와 천사들의 전쟁에 끼어들게 됐는지, 그 의문은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당연히 벨제뷔트의 질문에도 대답하기 어려웠다. 아무래도 오래 전부터 천사들에 의해 붙잡혀 있었던 데다가 그 후부터 쭉 중간지역에 있었던지라 ‘이방인’이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생소한 모양이었다.

이방인에 대해 생소하니 자연스럽게 인간이라는 존재가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이곳 세상에서 인간은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으니 말이다.

“저희가 왜 여기에 있게 된 건지는… 저희도 잘 알지 못합니다.”

“알지 못한다? 이상한 이야기로군.”

“이상한 이야기죠. 저희들 모두의 생각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저희는 정말이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나타났습니다. 마치 강제로 이 세상에 소환되기라도 하듯 말이죠.”

우성은 돌려서 그럴듯한 거짓을 말하기보다는, 이 존재 앞에서 믿기 어려울 일이더라도 사실을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 판단했다. 이 초월적인 존재는 한낱 인간이 내뱉는 조잡한 거짓말 따위는 금방 눈치 챌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벨제뷔트는 잠시 우성의 눈을 지켜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도 그는 우성의 말이 진실임을 믿어주었다.

“소환이라… 인간들이 우리 악마들을 소환하는 것처럼, 악마들이 인간을 소환하지 못할 이유는 없지. 물론 차원이 너무 달라 하나를 소환하는 데만도 꽤나 힘이 들 테지만 말이야.”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라는 것이 바로 벨제뷔트가 내린 결론이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고, 그렇다면 일단 믿어주겠다는 생각이었다. 벨제뷔트에게는 진실과 거짓을 꿰뚫어보는 눈이 있었다.

“감사합니다.”

우성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우성을 비롯한 일행의 모습을 발견한 벨제뷔트는 조금이지만 적대적인 느낌이었다. 지금껏 자신의 사제가 악마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벨제뷔트는 사제를 비롯한 일행들이 악마가 아닌 인간이라는 점에 반감을 가졌다.

하지만 우성의 솔직한 대답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속마음이 있는 건지 그는 적개심을 지우고 그냥 넘어가 주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경계 따위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존재만으로 살을 떨리게 만들었던 그가, 적개심을 품는다면 어떤 기운을 보일지 상상만 해도 치가 떨렸다.

그 때, 안도한 우성의 머릿속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벨제뷔트님께서는, 자신이 악마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계시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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