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바로 눈앞으로 다가온 어미용의 거대한 발톱을 보며 안현수가 눈을 깜박였다.
“저요?”
-그래. 인간들, 그것도 악마나 천사들과 관련된 인간은 도울 수 없지만, 넌 우리들과도 관련이 있어 보이는군. 방금 전, 너와 계약한 용이 있다고 했지? 그 용을 찾을 수 있다면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거다.
어미용의 말은 정확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안현수가 용들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안현수의 직업은 용기사였다. 용기사는 용과 교감하고 용의 힘을 빌리며, 동시에 용의 성장을 돕는 직업이었다. 즉, 용기사라는 직업은 용과 인관의 공생 관계를 유지하는 직업인 것이다.
용들의 입장이 무엇이건 안현수와 계약이 되어있는 용은 무조건적인 안현수의 편이었다. 그것이 바로 용기사라는 직업이 가지고 있는 계약의 힘이었다.
“……결국 쭌이를 찾아야 한다는 거 아닙니까?”
-쭌이?
“아, 저와 계약한 용의 애칭입니다. 뭐라고 불러야 할까 하다가…….”
-재미있는 인간이군. 인간들에게 용은 신수에 가까운 존재일 텐데, 그런 이름이나 붙이고.
안현수에 대한 호감 때문일까? 까칠하던 모습은 없고, 어미용은 되려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었다. 어쩌면 그것은 안현수가 자신과 계약한 용에게 가지고 있는 애정을 알고 있기에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지도 몰랐다.
-너와 계약한 용이 소환에 응하지 않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며칠 전 천사들과 했던 약속 때문이지.
“약속이요?”
-어떤 상황이라도 용들은 중립을 지키기로 했거든. 용들은 직접 영역을 침범하거나 공격받는 경우를 제외하면 그들을 공격하거나 방해하지 않고, 그 누구도 도와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
약속에 포함되어 있는 ‘그 누구도’라는 대상에는 당연히 안현수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용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지만 엄밀히 말해 안현수는 용이라는 종족 안에 속해있지는 않았다.
-너와 계약된 용은 너를 도와서는 안 되는 대상 안에 집어넣은 모양이군. 소환에 응하면 도움을 주게 될 게 뻔하니, 애초에 소환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야.
어미용의 말은 즉, 안현수와 계약된 용은 안현수와의 계약보다 용이라는 종족과 천사라는 종족간의 약속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는 뜻이었다. 자칫 용이 천사들을 도왔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할 경우, 대천사 우리엘을 비롯한 천사들과 용들 간의 싸움이 불거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용이 소환되지 않는 사실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 이유가 있을 줄은 몰랐다. 종족과 종족간의 약속이라면 충분한 이유로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그 정도는 내가 손을 써 줄 수 있다.
“어떻게요?”
-다른 일이면 몰라도, 계약자와의 계약을 어기는 건 명백히 잘못 된 일이다. 너와 계약된 아이가 판단한 일이긴 하지만, 반대로 너를 돕는다고 해도 악마들을 도왔다고 보기는 어렵지. 그 아이는 단지 계약을 충실히 이행했을 뿐이니 말이야.
관점의 차이긴 하지만 어미용의 말은 틀린 데가 없었다. 안현수를 돕는다는 점에서 조금이나마 악마들의 편을 들었다고 볼 수 있지만, 그것은 엄연히 악마들의 편을 돕는다기보다는 계약자인 안현수이기에 도왔다고 볼 수 있었다.
-아마 너와 계약된 아이는 지금쯤 나와 네가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을 것이다. 내 허락이 떨어졌으니, 더 이상 너를 돕는 게 잘못 된 일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을 테지.
“당신 한 명의 허락으로 말입니까?”
-너와 계약된 아이가 누구이건, 내 말을 무시할 순 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궁금하군. 너와 계약한 용이 누구일지 말이야. 한 번 이 자리에서 불러내 보거라.
어미용은 자신이 넘쳐보였다. 자신의 말을 무시할 용은 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아마도 용들 사이에서 그의 입지가 그 정도로 크다는 뜻일 것이다.
어미용의 말대로 안현수는 다시금 용과의 교감을 시도했다. 잠시 눈을 감고 있던 안현수가 중얼거렸다.
“……진짜네.”
몸을 돌린 안현수가 어미용의 반대편,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대고 손을 뻗었다. 그러자 허공의 위로 십 미터 정도 되는 지름의 원이 만들어지며 그 안에서 용의 머리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키에에에엑-!
귀가 찢어질 듯한 기다란 울음소리가 동굴을 가득 메웠다. 성년이 된 안현수의 용은 한 번 모습을 보일 때마다 더 큰 덩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에 비하면 훨씬 거대해지긴 했지만 에이전트 급의 어미용 앞에서 안현수의 용은 아기용이나 별반 다를 게 없어보였다. 안현수의 용은 소환과 동시에 안현수에게 고개를 들이밀며 볼을 부볐다.
“야, 야. 그만! 옛날이면 몰라도 지금은 너무 커서 부담스럽다. 자, 자. 착하지 쭌아?”
그르르르르-.
안현수의 만류에 용은 아쉬운 울음소리와 함께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기분은 좋은지 연시 그르릉거렸다. 그 모습이 용이라기보다는 거대한 강아지같아 혜미를 비롯한 일행으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 아이였구나. 몇 년 사이 몰라볼 만큼 컸군. 얼마 전까지만 해도 헤츨링이었던 아이가, 벌써 성년이 되다니.
어미용이 입을 열자 안현수의 용은 그의 눈치를 보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같은 동족인데도 불구하고 겁을 먹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예의를 갖추는 것 같기도 했다.
-겁먹지 마라. 누가 해치기라도 하느냐?
그르르르-.
-아까 한 이야기는 다 들었겠지? 굳이 천사들과의 약속에 신경 쓸 필요 없다. 너 같은 어린 용 하나 챙기지 못할 만큼, 우리가 천사들에게 머리를 숙일 필요는 더더욱 없지. 넌 그저 네 계약자나 잘 챙기면 된다.
안현수의 용이 하는 말을 제대로 들리지 않지만, 어미용의 말은 모든 일행에게 확실히 들렸다. 고개를 끄덕이는 반응으로 보아 안현수의 용도 썩 나쁜 반응 같지는 않았다.
“……대체 저 어미용은 뭐 하는 용이지?”
“종족의 왕 같은 게 아닐까요? 악마들로 비교하자면 마왕같은…….”
“8천 년이나 산 에이전트 급의 용이라면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안현수씨의 용이 순순히 저 용의 말을 따르기도 하고 말이죠.”
우성과 전현승, 에든은 서로 각자 어미용을 보며 속닥거렸다. 용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해 에이전트 급 용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몰라도, 그의 말 한 마디에 천사들과의 약속이 없던 걸로 될 정도면 무게감이 보통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어미용이 어떤 존재이든 일행에게는 첫 희소식이었다. 안현수의 용이 있다면 그와 함께 있던 벨제뷔트의 거취를 알아낼 수 있었다. 잠시 틀어졌던 계획이 어미용의 도움으로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도움에 감사합니다.”
-도움이라고 보긴 힘들지. 널 도왔다기보다는, 저 아이가 원하는 걸 들어주었다고 보는 게 정확하겠지. 저 아이도 내심 너를 돕고 싶은데 그러질 못하는 걸 안타까워하고 있었던 모양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쭌이가 이렇게 울고 있던 건 처음이거든요.”
겉으로 보기엔 울고 있는 건지, 웃고 있는 건지 표정을 알 수 없지만 용과 교감하는 안현수에게는 그런 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감사하다는 말에 어미용이 굳이 그 말을 정정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안현수와 계약한 용은 예외로 치더라도, 그 외은 다른 용이 안현수를 비롯한 일행을 도왔다는 사실은 문제가 되었다. 그렇기에 어미용은 안현수를 도왔다기보다는 그와 계약한 용을 도왔다는 의미로 돌린 것이다.
안현수는 여기서 더 어미용에게 감사를 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 일을 가지고 자신이 더 감사를 표하는 건 오히려 어미용에게나 다른 용들에게나 난처할 뿐이었다.
결국 안현수는 고개를 작게 숙이는 것으로 어미용에게 인사를 마쳤다. 그리곤 원래의 계획대로 자신이 소환한 용에게로 시선을 돌려 물었다.
“쭌아. 예전에 네가 네 동굴에 들어온 악마에 대해 이야기 했었지? 혹시 그 악마가 지금도 네 동굴에 있어?”
그르르르-.
“정말이지? 다행이다. 그럼…….”
안현수는 용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현재 악마의 상태나 천사들의 동향 등, 하나하나 물을 때마다 용은 성실히 대답해주었다.
물론 그 대답을 다른 일행이 들을 수는 없었다. 어미용과는 달리 성년이 되고 얼마 되지 않은 안현수의 용은 다른 종족의 언어를 할 수 없었다. 사실상 용들이 다른 종족과 소통할 수 있는 단계는 성년이 되고 한참 뒤의 일이었다.
“그럼 그 악마가 있는, 네 동굴로 우리를 좀 안내해 줄 수 있을까?”
그르르르-.
“뒤에 있는 일행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얼마 전에도 봤잖아? 오래 전부터 나와 함께해온 믿을만한 일행들이야.”
안현수의 용은 잠시 다른 일행들을 한 명 한 명 훑었다. 용 또한 안현수와 교감하며 그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지만, 단순히 교감을 통해 느끼는 것과 직접 눈으로 보는 건 다른 모양이었다. 혜미와 혜정부터 시작해 전현승과 우성까지 하나하나 눈을 맞춘 용은 어금니를 드러내며 머리를 끄덕였다.
“고맙다, 쭌아.”
긍정적인 반응에 안현수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용의 서식처는 아무리 계약자인 그라고 하더라도 함부로 건드리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특히나 계약자인 안현수 혼자만이 아닌, 다른 일행들까지 우르르 데리고 가는 건 특히나 민감했다. 안현수야 오랫동안 함께 한 일행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용은 낯선 이방인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용은 자신의 계약자인 안현수가 믿는 사람들을 자신도 함께 믿어주었다. 그것은 우성을 비롯한 다른 일행들을 믿었다기보다는, 전적으로 안현수를 믿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저 아이가 너를 꽤 잘 따르는구나.
그 모습을 지켜보던 어미용은 아기용을 등에 올리며 말했다.
-부디 그 아이가 널 선택한 걸 후회하지 않게 행동하길 바란다. 우리 용들은, 믿을 땐 한없이 믿지만 그 믿음이 배신당했을 땐 많이 무서워지니 말이야.
“걱정 마세요. 배신할 일 없으니까요.”
-그리고… 그 아이와 함께 있는 악마는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어미용이 처음으로 벨제뷔트를 언급하자, 막 움직이려던 일행이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벨제뷔트가 용의협곡에 들어선지 벌써 몇 년이나 지났는데, 벨제뷔트의 존재를 안현수의 용만 알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벨제뷔트를 만나보셨습니까?”
벨제뷔트의 이름이 언급되자 가장 먼저 우성이 앞장서 물었다. 어미용의 시선이 안현수에게서 우성에게로 돌아갔다.
-만나보았다고 할까… 본 적은 있지. 소름끼치는 기운을 풍기는 악마의 등장에, 나를 비롯한 몇몇 고룡이 그를 보기 위해 저 아이의 동굴에 찾아갔으니 말이야. 악마 같은 게 우리 영역을 침범했다는 생각에 처음에는 쫒아내려 했는데, 그럴 수가 없더군.
“……왜입니까?”
-악마들은 그를 최고악(最高惡)이라고 부른다지? 최고라는 이름이 괜히 붙은 게 아니더군. 상처입고, 지친 와중에도 그에게서 풍기는 느낌은 너무 위험했다. 어딘가 모르게 위태롭고 이성적인 사고를 하지 못해서 더더욱 그렇게 보이더군.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아 보여, 우리는 그를 그 자리에 그냥 두기로 결정했다.
한 마디로 용들에게 있어 벨제뷔트는 언제 터질지 모를 폭탄 같은 존재였다. 자신들의 영역에 그냥 두는 것은 달갑지 않으나, 그렇다고 건드릴 수도 없었다.
“그 말은, 벨제뷔트가 제 정신이 아니라는 소리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