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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플레이어-210화 (209/258)

210화

“뭐야, 왜 갑자기 뚜껑이 닫혀?”

가장 뒤쪽에 들어온 에릭은 무너진 지면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지진처럼 갈라졌던 지면이 말끔하게 원래대로 돌아가 있었다.

“……용이 저희를 불렀나 보죠.”

“저희가 아니라, 이 아기용을 부른 게 아닐까요?”

“안현수는 같이 불렀을지도 모르죠. 저 녀석이야, 워낙 용들에게 사랑 받는 녀석이니까요.”

불빛 하나 없는 곳에서 중얼거리자 곧 밝은 불빛 몇 개가 떠올랐다. 혜미가 만들어낸 라이트(Light)마법이었는데, 빛 하나하나가 눈이 부실 만큼 밝을뿐더러 그 개수가 한 손에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동굴?”

“동굴이네요.”

땅 속으로 들어온 일행의 눈앞에 보이는 건 빛 한 점 없는 새까만 동굴이었다. 일행의 앞으로는 혜미가 만들어낸 빛의 구체로도 다 밝히기 어려울 만큼 깊고 긴 동굴이 펼쳐져 있었다.

그르르릉-.

아기용은 안현수의 옷깃을 물어 따라오라는 듯 잡아당겼다. 그들이 찾고 있는 건 아기용의 어미였지, 동굴이 아니었다.

동굴은 크고 깊었다. 혜미와 혜정은 중간에 다른 일행이 받아줘야 할 만큼 높은 곳에서 떨어졌다. 못해도 20미터는 넘게 떨어진 듯했다.

동굴의 구조는 단순한 수평이 아니었다.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갔다. 덩달아 천장도 높아졌는데, 아기용은 동굴 깊숙한 곳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어디가 끝인지 모르겠군.”

우성의 중얼거림이 동굴을 울렸다. 땅 속에 만들어져 있는 만큼 그리 넓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쉽게 끝을 보기 힘들 만큼 넓었다. 아기용이 걷는 속도가 느린 탓도 있지만 벌써 몇 분 동안 동굴 아래로 내려가고 있는 건지 모른다.

그래도 이런 장소라면 아기용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절대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용의 서식지이긴 하지만 던전이라면 던전일 수 있었는데, 멀쩡한 땅 아래에 이런 동굴이 숨어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르르릉-.

그 때, 앞장서 가던 아기용이 걸음을 멈추며 안현수를 돌아봤다.

“여기라고?”

안현수의 물음에 아기용은 다시 한 번 그르릉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동굴은 텅 비어있었고, 끝은 보이지 않았다. 처음 들어왔을 때와 바뀐 게 있다면 동굴의 높이가 훨씬 더 높아져 있다는 것이다.

“대체 여기에 뭐가 있다는…….”

“혀, 현수 오빠?”

그 때, 뒤쪽으로 빛을 비추었던 혜미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것 좀 봐…….”

“저거?”

혜미의 말대로 뒤를 돌아본 안현수가 그녀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봤다. 어느 순간부터 혜미가 만들어낸 빛의 구체들은 한 방향을 비추고 있었다.

“으아아악!”

쿵, 쿵-.

동굴을 가득 울릴 만큼 거대한 발소리. 그리고 안현수를 비롯한 일행을 한낱 미물처럼 짓밟을 듯 거대한 몸집. 안현수는 동굴의 천장에 머리를 맞댄 거대한 용의 등장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어마어마하군.”

안현수가 불러낸 용은 본 적이 있었지만, 아기용이 데리고 온 동굴에서 나타난 용의 덩치는 상상 이상이었다. 우성은 고개를 크게 꺾어 어금니를 드러내며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용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이 정도면 성인 용 수준은 가뿐히 넘겠지?”

“다, 당연하지.”

우성의 물음에 안현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놀란 심장을 진정시켰다. 안현수가 불러내는 용도 그리 작다고 볼 순 없지만, 지금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용과 비교하면 어린애 수준이었다.

대체 몇 미터나 되는 걸까? 대악마 클랜을 내려다보는 용은 작게 봐줘도 오십 미터는 넘어보였다. 등 뒤로 달린 한 쌍의 날개는 이 넓직한 동굴이 비좁아 보일 정도였다.

그르르릉-.

아기용은 처음으로 안현수에게서 떨어져 새로이 나타난 용의 옆으로 달려갔다. 거대한 용은 거대한 앞발로 아기용을 자신의 품으로 꼭 안으며 우성을 비롯한 대악마 클랜을 노려봤다.

“……현수야.”

“응?”

“통역 좀 부탁한다. 저런 거랑 싸우긴 싫다.”

우성의 부탁에 안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용과 싸우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저 거대한 덩치를 보니 싸울 마음이 있었더래도 싹 사라질 듯했다. 만약에 어미용이 자신들을 적대시한다면, 안현수의 역할이 중요해질 것이다.

-그럴 필요 없다.

그 때, 동굴 안을 중저음의 목소리가 울렸다. 사람의 목소리 같지는 않고, 그렇다고 대악마 클랜 일행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짐승의 목소리를 사람의 언어로 바꿔 놓은 듯한, 기괴한 울림에 가까웠다.

“……당신입니까?”

-그래. 천사나 악마와의 대화는 몇 번 해 봤지만, 인간과의 대화는 처음이군. 그대들도 이방인이라는 존재인가?

이방인의 존재를 아는 건 천사와 악마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어미용이 이방인에 대해 알고 있자 우성은 대화가 쉽게 진행될 거라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아기용과는 달리 그는 인간인 자신들과도 소통이 가능했다.

-그런데 그대들은 얼마 전 본 이방인들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군. 그 녀석들과는 달리, 어두운 느낌이 훨씬 짙어.

우성은 혹시나 싶어 물었다.

“악마들을 싫어하십니까?”

-그렇지는 않다. 싫어하진 않지. 물론 좋아하지도 않고. 정확히는 관심이 없다. 천사건 악마건, 우리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들이지. 인간들도 다를 바 없고.

우성은 안도했다. 혹시라도 용이라는 존재가 악마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으면 자신들에게도 썩 좋지 않은 반응을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관심이 없다는 건, 오히려 편견 없이 자신들을 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아마도 당신이 본 이방인들은 천사 진영의 이방인들일 것입니다. 저희는 반대로 악마 진영의 이방인들이고요.”

-그럼 그대들은 그들과 적인가?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성의 대답에 어미용은 고개를 숙였다. 어미용과 눈을 맞추기 위해 고개를 들고 있던 우성은 그가 바닥까지 고개를 낮추자 그때서야 위로 꺾었던 고개를 숙일 수 있었다.

-신기하군. 꽤 오랜 시간 살았다고 자부했는데, 인간이 우리들과 눈을 똑바로 보고 대화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는데 말이지. 너희는 내가 겁나지 않으냐?

“해치지 않을 거라는 걸 압니다.”

-해칠 생각은 없다. 저 뒤에 있는 아이 때문이지. 하지만, 너희들은 아니다.

어미용은 우성의 옆에 서 있는 안현수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용과의 교감이 가능한 안현수는 어미용이 가지고 있는 감정을 알 수 있었다.

“……갈등 중이십니까?”

-역시, 넌 우리들과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구나.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기보다는… 그냥, 남들보다 당신들과 같은 존재들에 대해 잘 아는 정도입니다.”

안현수가 느끼기에 어미용을 갈등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갈등의 종류는 상당히 위험했다.

그는 안현수를 제외한 다른 일행들을 죽일지, 말지를 놓고 머릿속으로 고민했다. 안현수가 없었다면 할 필요도 없는 고민이었다. 안현수, 그리고 그와 함께 온 아기용이 아니었다면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한 죄를 물어 단박에 눌러 죽여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안현수라는 존재를 두고 저울을 재고 있었다. 죽이자니 안현수가 걸렸고, 죽이지 않자니 자신들의 영역을, 그리고 자신의 단잠을 깨운 죄가 괘씸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눈앞에 있는 대악마 클랜원들이 수십번도 더 죽었다 살아나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고룡(古龍)씩이나 되시는 분이, 인심 좀 쓰시지 그러십니까?”

-우리들의 이름을, 네가 어떻게 알지?

“그냥, 알고 있는 용이 있습니다. 그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던 중, 용들 중 가장 오랜 세월을 존재했으며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용을 고룡(古龍)이라고 부른다고 하더군요.”

헤츨링, 성룡, 에이전트.

이 3단계가 바로 용의 등급이었다. 대부분의 용들이 성룡으로 구분되는 반면, 에이전트 등급의 고룡(古龍)을 얼마 존재하지 않았다. 안현수와 계약된 용이 성룡급의 용이었고, 눈앞에 있는 용이 바로 고룡이라고 불리는 에이전트급 용이었다.

-여러 가지를 알고 있군.

“당신들에 대해서는 이방인 중 가장 잘 알고 있으리라 자부합니다. 그나저나 고룡씩이나 되셨으면 적어도 삼천 년은 넘게 사셨을 텐데…….”

-팔천 년이다.

“……오래도 사셨군요. 아무튼 그 정도 사셨으면, 자비라는 것도 좀 알고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팔천 년씩이나 사셨으면서 속 좁고 그러면 안 되죠.”

말도 안 되는 억지인 듯하면서도 은근히 ‘자비 없는 쪼잔한 용’으로 몰아가는 말이었다. 역으로 기분이 나쁠 법도 한 말이었는데, 어미용은 눈을 살짝 찌푸리더니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어금니를 드러냈다.

-재미있는 말을 하는구나. 신기한 인간이야. 우리들에 대해 이것저것 알고 있는 것도 그렇고, 썩 나쁘지 않은 기운까지 가지고 있는 걸 보면.

“칭찬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이제 보니 꽤 재미있는 물건을 가지고 있구나. 왜 너에게서만 다른 인간들과는 다른 특별한 기운이 느껴졌는지 알 것 같아.

그르르르르르-.

어미용의 울음소리가 동굴을 가득 메웠다. 그 순간, 거대한 동굴을 무거운 공기가 가득 메웠다.

아무리 에이전트급의 고룡이라고 하더라도 용이라는 존재가 너무 크게 느껴졌다. 얼마 전에 중간지역에서 만난 몬스터만 하더라도 충분히 상대가 가능해 보였는데, 도저히 눈앞에 있는 어미용은 어떻게 상대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만큼 에이전트급의 용은 거대한 상대였다. 더군다나 단순히 강한 것뿐만이 아니라 악마나 천사 못지않은 지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무서웠다.

-좋아. 살려주지. 너를 비롯해, 다른 인간들까지 말이지.“

의외의 대답이었다. 하지만 원하던 대답이었기에 안현수는 가슴을 쓸어기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역시. 마음이 바다 같으십니다.”

-자비를 베푼 게 아니다. 너희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도 어떤 뜻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

“……갑자기 무슨 뜻 모를 소립니까?”

어울리지 않는 엉뚱한 말에 안현수를 비롯한 일행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어미용은 달리 대답할 생각은 없는 듯 눈을 깜박이며 입을 다물 뿐이었다.

“알려주기 싫으시면 됐습니다.”

-그보다는 여기 온 용건이나 말해라. 혹시 너희들도 천사들과 같은 일로 온 것이냐?

“천사들의 용건이라면… 벨제뷔트를 찾는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간 일이 많긴 많았어. 벨제뷔트가 천사 녀석들에게 교화될 줄 누가 알았을까. 아직 반밖에 안 되긴 했지만 말이야.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리던 어미용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거기에 대한 답은 해 줄 수 없겠군. 천사들에게도 마찬가지였고 말이지. 이번 일에 우리는 천사와 악마, 어느 한쪽 편도 들지 않기로 결정했다. 미안하지만 벨제뷔트가 어디 있는지는 알려주기 어렵겠어.

“대략적인 힌트라도…….”

-안 된다.

대답은 단호했다. 어떠한 말로 구슬려도 원하는 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용을 찾을 수만 있다면 문제가 해결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다시 한 번 난간에 봉착한 것이다. 자꾸만 꼬여가는 일들에 우성은 복잡한 머리를 감쌌다.

-하지만…….

그 때, 어미용이 앞발을 안현수에게로 가져가며 다시금 말을 이었다.

-너라면, 실마리를 가지고 있을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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