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퍼억-.
박윤성은 짜증이 솟구친 나머지 신경질적으로 앞에 보이는 나무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그러자 주먹이 닿은 나무 중앙이 움푹 파이며 허리가 우수수 쓰러졌다.
“며칠 안 됐잖습니까. 조금만 더 참으십쇼.”
“며칠이나 된 거지. 이 좁은 협곡 뒤지는데 하루면 충분하잖아?”
“문제는 용들과의 충돌을 자제해야 한다는 겁니다. 용들이 거취 할만한 장소는 최대한 피하다 보니 오래 걸릴 수밖에 없지요.”
“그러다 벨제뷔트가 용들과 함께 있으면?”
“그 땐 어쩔 수 없이 용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겠죠. 그래도 가능한 대화로 풀어볼 겁니다. 천사들도 그렇게 해 달라고 부탁했고요.”
“그게 협박이지, 어디 부탁인가? 무려 대천사씩이나 되는 녀석이 한 말인데.”
박윤성은 옆에 있는 같은 클랜의 플레이어와 대화하며 화를 식혔다. 며칠째 개미 한 마리도 보지 못하고 하염없이 돌아다니고 있다 보니 성질 급한 그의 성격상 폭발하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였다.
“용들이 뭐 그렇게 무섭다고 그 난리들이지? 천사장이 둘에, 대천사까지 있으면서.”
박윤성은 처음 용의협곡에 들어섰을 무렵, 박윤성을 비롯한 천사진영의 플레이어들은 몇 마리의 용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운동장만한 크기의 거대한 몸집과 단단하고 날카로운 어금니는 한 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았다.
그들은 용을 몬스터라고 부를 수 없었다. 오랜 세월을 존재해오며 에이전트급 용이 된 그들은 이미 천사, 악마 못지않은 지성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가진바 지성은 천사나 악마들보다 훨씬 위일지도 모른다.
인간, 천사의 언어로 말을 건네는 그들과 대천사 우리엘은 협상을 맺었다. 천사들은 용을 건들지 않으며, 그들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이상 용들도 천사들의 편의를 봐준다는 것이었다. 사실상 대천사 우리엘의 존재 때문에 용들이 천사들에게 잠시 머리를 숙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천사들이 용들을 무시하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그들은 혹시나 플레이어들이 용들에게 실수를 할까봐 단단히 일렀다. 용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라고 말이다.
“윤성님도 보시지 않았습니까? 에이전트급 용이 얼마나 무서운지요.”
“무서워? 그냥 덩치만 크던데.”
“덩치도 덩치고, 그런 덩치가 천사나 악마처럼 말을 할 수 있다는 게 전 소름이 끼쳤습니다. 더군다나 용들이 무서운 이유는 단순히 거대한 덩치 하나만이 아니지 않습니까?”
플레이어는 혹시라도 박윤성이 실수라도 할까봐 단단히 주의시켰다. 물론 과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진심으로 눈앞에서 마주한 용이라는 존재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주의에도 불구하고 박윤성은 아직도 왜 용이 무섭다는 건지 이해를 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글쎄, 너완 달리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아니, 제 말은…….”
“됐다. 나도 쓸데없이 싸울 생각은 없어. 용들이야 그렇다 쳐도, 우리엘과 싸울 생각은 없으니까. 하여간 대천사라는 녀석이 겁은 많아요.”
박윤성의 중얼거림에 옆에 있던 플레이어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건 몰라도 박윤성이 대천사 우리엘을 신경쓰고 있다는 사실은 고무적이었다. 대천사 미카엘의 계약자인 만큼, 박윤성은 대천사의 힘을 잘 알고 있었고 대천사라는 존재들이 어느 정도 힘을 가지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그럼 이제 용의 서식지 외에는 다 뒤져본 거 아닌가?”
“그럴 겁니다. 이제 남은 건 천사들이 저 협곡 아래를 수색하는 것뿐입니다.”
“벨제뷔트가 정신수양이나 하자고 여기 숨은 게 아닌 이상, 폭포 아래에 있지는 않겠지. 그 녀석이면 용 한 마리쯤 죽이고 그 자리를 빼앗았을지도 모르지.”
다른 플레이어들도 사실은 박윤성과 생각이 같았다. 이정도 쯤 뒤졌는데 아직도 나오지 않았다는 건, 벨제뷔트가 어느 용이 거취하고 있는 동굴에 함께 숨어있다는 뜻이었다.
“그나저나 벨제뷔트를 발견하면 한 바탕 싸우겠지?”
“아무래도… 교화(敎化)를 하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겠죠.”
“그럼 그 때는 드디어 그 녀석 실력을 볼 수 있겠네. 소문만 무성한 건지, 아니면 진짜인지.”
박윤성의 말에 주위에 있던 플레이어들은 박윤성이 ‘그’에게 은근한 경쟁심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제 아무리 박윤성이 실력 있는 랭커 플레이어에 ‘성검 미카엘’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도, 이 자리의 어느 누구도 박윤성이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기대되네. 가이아(Gaea)의 검을 가진 플레이어가, 과연 어느 정도 활약을 보여줄지.”
**
“그래서, 벨제뷔트는 아직 준이가 있는 동굴에 있는 거냐?”
벨제뷔트를 찾기 전, 우성은 가장 큰 실마리를 안현수에게서 찾았다. 용의협곡이 다른 숲에 비해서 작은 편이라고 한들, 그 규모는 7명밖에 되지 않는 일행이 뒤지기엔 너무 넓었다.
하지만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쉬웠다. 애초 일행이 벨제뷔트가 있는 장소를 알아낼 수 있었던 출처인 안현수를 이용하면 되는 것이다.
벨제뷔트는 안현수의 용과 같은 동굴에서 몸을 추스르고 있었다. 천사들과의 싸움으로 인해 큰 상처를 입은 그는 아포칼립스에서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용의협곡 어딘가에서 상처를 회복중이었다. 더불어 성마검 벨제뷔트를 보아 반쯤 천사들에게 교화된 자신의 성향까지도 다시 예전으로 되돌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런 것 같다.”
“그럼 현수오빠가 용을 불러내서 그 용을 따라가면 되는 거 아니야?”
간단한 게 아니냐는 듯 혜미가 물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하지만 실상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소환이 안 돼.”
“안 돼?”
“교감은 당장 눈앞에 있는 용뿐만이 아니라 나와 연결된 준이와도 소통할 수 있는 스킬이야. 교감이 용기사 직업의 근본이 되는 이유가 용과의 교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용을 소환할 수도 없는 거거든.”
“그런데?”
“아기용을 만나고 용의협곡에 들어섰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난 준이와 교감을 시도했어. 하지만 전혀 교감이 안 돼. 교감이 되질 않으니 소환이 될 리가 있나. 조건 미달인 거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우성을 비롯한 일행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벨제뷔트를 찾는 과정을 전적으로 안현수에게 기대고 있었는데, 그 믿음이 깨어진 것이다. 안현수가 벨제뷔트의 옆에 있는 용과 소통할 수 없다면 쉬운 길을 버리고 멀고 복잡한 길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발로 뛰어서 찾는 수밖에는 없나?”
“이 넓은 숲을?”
안현수의 반문에 우성은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지 깨달았다. 천사들처럼 수가 많은 것도 아니고, 고작 7명이서 용의협곡 전체를 뒤진다는 건 보통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더군다나 일행은 천사들의 눈을 피해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방법이 없나?”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일단 용의 협곡에 도착하지만 하면 안현수가 용을 소환해 벨제뷔트를 금세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첫 단추가 꿰어지지 않자, 그 뒤의 모든 생각들이 엉켜버렸다.
“아기용에게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요?”
그 때, 혜정이 아기용을 가리켰다. 천사 진영의 플레이어들을 본 뒤로 한동안 으르렁거리던 아기용은 다시금 안현수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있었다.
“물어봐?”
“네. 아기용이면 그래도 다른 용들을 알고 있을 거고, 다른 용들에게 어떻게 물어보면 벨제뷔트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
‘물어본다’는 간단한 생각이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안현수에게 이 정도 호감을 보이는 걸 보면 아기용과 함께 있는 일행을 다른 용들이 적대시 하지는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안현수 본인도 용기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어 다른 용들과 꽤 친밀한 교감을 나눌 수 있었고 말이다.
천사들과는 달리, 일행에게는 안현수라는 키워드가 있었다. 이 점을 잘만 이용하면 용들에게 직접 벨제뷔트의 거취를 물어본다는 생각도 실현이 불가능하지 않았다.
“그거 일리 있네.”
너무 간단한 생각이기에 떠올리지 못했던 터라 전현승은 무릎을 탁 쳤다. 다른 일행들 또한 혜정의 아이디어가 꽤 괜찮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벨제뷔트를 찾는 건 안현수, 그리고 아기용의 몫이나 다름없었다. 안현수는 다리 옆에 달라붙어 있는 아기용과 시선을 맞추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혹시 엄마가 어디 있는지 알려줄 수 있을까?”
그르릉-.
“나쁜 짓 하려는 게 아니야. 그냥,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 엄마는 어디에 있니?”
안현수는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아기용을 달랬다. 엄마의 이야기가 나온 탓인지 잠시나마 안현수와 떨어졌던 아기용은 그의 눈을 잠시 마주치더니 몸을 휙 돌렸다.
“알려줄 생각이 없나 봐요.”
“아니. 따라 오라는데?”
분명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안현수는 아기용이 하고자 하는 말을 금세 이해하곤 어깨를 으쓱였다. 안현수가 가장 먼저 아기용의 뒤를 따라붙자 다른 일행들이 우르르 그 뒤를 마저 따랐다.
아기용은 협곡과는 전혀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폭포를 중심으로 한 협곡이 용의협곡의 중앙이긴 했지만 인근 숲까지 용들의 서식지라는 건 변함이 없었다. 아기용을 숲 속에서 만나기도 했으니 아기용과 그 어미용은 아마도 숲속에 서식하던 용인 모양이었다.
“어디까지 가는 거지?”
삼십분 쯤 걸었을까? 아기용의 뒤를 따라 느리게 걷긴 했지만 꽤 긴 거리를 이동한 것 같았다. 그런데 여전히 보이는 건 무성한 숲일 뿐, 용이 있을 만한 동굴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르릉-.
그 때, 앞장서 걷고 있던 아기용이 갑작스레 걸음을 멈추며 뒤를 돌았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해 안현수는 다시금 시선을 낮추고 아기용에게 물었다.
“여기야?”
그르릉-.
“땅 아래라고?”
안현수가 자신이 서 있는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푹신한 모래바닥이었는데, 아기용은 발을 동동 구르며 이 아래가 자신의 집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안현수는 조금 더 세게 발을 굴렸다. 하지만 역시나 땅 아래에서는 어떠한 미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나 아기용이 길을 잃고 자신의 집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안현수는 다시금 걱정이 들었다.
구구구구-.
그 때, 방금 전 안현수가 두드린 지면이 우르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지진이라도 난 듯 무너지는 지면에 일행이 우왕좌왕했지만, 안현수는 본능적으로 그 아래에 누가 있는지 알아챘다.
“정말로 네 엄마가 여기 있었구나.”
무너진 지면 사이로 안현수가 자진해서 뛰어들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뛰어든 안현수의 모습은 금세 땅 속 깊숙한 곳으로 사라졌다.
“……정말 이 안일까요?”
“일단, 들어가나 보죠.”
안현수의 뒤를 이어 우성이 갈라진 땅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전현승, 에든 순으로 일행 모두가 지면 아래로 몸을 날렸다.
그그그그그-.
아기용을 비롯한 대악마 클랜 모두가 사라진 자리, 갈라진 땅은 금세 다시 원래의 모습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