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쏴아아아아-.
희미하긴 하지만, 분명한 폭포 소리였다. 위에서 아래로 물이 떨어져 단단한 돌에 부수어지는 소리는 조용한 가운데서 귀를 기울여야 겨우 들을 수 있었다.
“진짜네.”
“거의 다 와가긴 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어.”
협곡에서 떨어지는 폭포 소리가 들릴 정도라면 거리가 꽤 가깝다는 뜻이었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긴 하지만 막상 용의 협곡에 거의 다 도착했다는 생각이 들자 우성은 새삼 긴장이 되었다.
‘저 앞에 벨제뷔트가 있다는 건가?’
최고악 벨제뷔트. 그와의 만남은 우성이 아포칼립스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이어져왔다. 미카엘의 분신이 지키고 있던 벨제뷔트의 검, 그리고 안현수가 불러낸 용을 통해 알게 된 벨제뷔트 본체의 존재까지.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엔 하나 둘씩 퍼즐이 맞춰가듯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우성은 어쩌면 이것은 벨제뷔트가 자신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벨제뷔트의 사제인 혜정, 그리고 용기사인 안현수를 통해 나름의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이, 이거 왜 이래?”
그 때, 안현수가 팔을 덜덜 떨며 고함을 질렀다. 새파랗게 질린 손으로 신룡창을 바닥에 휘두르며 안현수가 입술을 깨물었다.
“말 좀 들어라!”
“왜 그래?”
“이거, 고장 난 거 같은데?”
장난스럽게 대답하긴 했지만 안현수의 말에는 나름의 진심도 담겨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팔이 떨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가 쥐고 있는 신룡창이 요란을 떠는 바람에 팔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고장? 기계도 아니고, 장비가 고장이 날 리가 있나.”
“그건 그런데… 그럼 이건 왜 말을 안 듣지?”
갑작스럽게 장비가 반응하는 경우는 우성도 처음 보았다. 언뜻 무언가와 공명하는 것 같기도 했고, 안현수의 말대로 고장이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용의 협곡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용의 협곡?”
“이름부터가 신룡창 아닙니까? 아시다시피 신(神)등급 장비는 그 무기를 만든 신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안현수씨의 무기인 신룡창은 아마 용들이 서식하는 이 앞의 용의 협곡과 연관이 있을 겁니다.”
전현승의 생각은 나름 일리가 있었다. 안현수의 직업이나 무기는 결국 용(龍)이라는 존재와 뗄 수 없었다. 용력이라는 힘, 그리고 용을 소환하는 능력까지. 안현수가 가지고 있는 직업인 용기사는 결국, 용이라는 존재의 힘을 빌려다 쓰는 것이었다.
‘그리고 신룡창은…….’
전현승의 말대로 신룡창을 만든 신은 용(龍)이라는 존재와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존재가 이 앞에 있는 용의 협곡에 있을지, 아니면 다른 신처럼 저 하늘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다른 건 모르겠고, 이거부터 어떻게 해 봐!”
“네 무기인데, 네가 알아서 해야지.”
방법을 알 수 없어 우성은 안현수를 믿는 수밖에 없었다. 안현수 역시 자신이 부린 투정이 괜한 것이라는 걸 아는지, 더 이상 불평 없이 이를 악물고 신룡창을 들어올렸다.
“말 좀 들어라!”
우우우우웅-.
결국 안현수가 생각한 방법은 온 힘을 쥐어짜 신룡창에 용력을 주입하는 것이었다. 사실 어떤 실마리를 잡았다기보다는 그저 생각나는 일이 이것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낌없이 쏟아 부은 용력은 창끝부터 손잡이까지, 신룡창을 전부 감쌌다. 푸르스름한 용력이 머금어지자 신룡창은 언제 그랬냐는 듯 울음을 멈추고 잦아들었다.
“됐다.”
용력을 잔뜩 소모한 안현수는 이마에서 땀을 흘리며 신룡창을 내려놓았다. 창끝이 바닥에 닿자마자 땅에 철퍼덕 주저앉으며 안현수가 손등으로 땀을 닦아냈다.
“이거 대체 왜 이런 거지?”
“……전현승씨의 말대로 용의 협곡과 연관 짓는 것 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는데.”
안현수도 그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추측에 불과했다. 정확한 원인은 아마 용의 협곡에 들어간 다음에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신룡창이 진정되자 일행은 다시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날이 거의 저물고 있는 터라 서둘러 가지 않으면 늦어버릴 것 같았다. 특히 중간지역의 몬스터들은 밤에 활동하는 몬스터들이 더 무서웠다.
걸음을 옮길수록 폭포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렇다고 아직 지도로 보면 용의협곡에 도착한 건 아니었다.
“폭포가 꽤 큰가봐.”
지도를 보며 이동하던 혜미는 한참을 걸어도 도착하지 않자 말했다. 폭포소리가 꽤 커졌는데도 아직 폭포가 보이지 않았고, 지도상에 보이는 폭포의 크기도 제법 컸다.
용의협곡은 거대한 폭포와 함께 이루어진 하나의 협곡을 중심으로 한 일대 숲을 의미했다. 협곡 주변으로 용들이 서식하며, 인근 숲까지도 용의협곡으로 분류되었다.
사실상 현재 일행은 용의협곡에 포함된 숲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이 근방 숲 어딘를 뒤져보면 용이 거취하고 있는 동굴같은 게 나올지도 모른다.
“잠깐.”
그 때, 폭포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기던 일행을 혜미가 멈춰 세웠다. 이동 중 계속해서 제3의 눈을 활성화 시키고 있던 그녀의 말이라 일행은 무슨 일인가 싶어 촉각을 곤두세웠다.
“몬스터입니까?”
“아니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며 혜미는 옆을 바라봤다. 우거진 나무들과 수풀들로 가려진 숲 속은 그렇지 않아도 어두운지라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사각-.
그 때, 혜미가 주시하던 숲 속에서 익숙하지만 자그마한 얼굴이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용… 인 것 같은데요?”
**
아그작-.
작은 입이었지만 날카로운 치아는 나무를 씹어 먹을 만큼 단단했다. 안현수의 옆에 착 달라붙은 아기용은 늑대보다 조금 큰 정도였는데, 안현수가 소환하는 용에 비하면 귀여울 만큼 작았다.
“아무래도 무리에서 이탈한 아기용 같습니다.”
“용들이 무리를 지어서 생활하지는 않죠. 아마도 어미용에게서 떨어진 것 같습니다.”
“그냥 이 근처 사는 아가가 아닐까요?”
안현수와 아기용의 주위를 둘러 싼 일행은 용이 나무를 씹어 먹는 걸 지켜봤다. 애꿎은 안현수만 아기용의 옆에 착 달라붙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 녀석 좀 어디로 데려가면 안 될까?”
안현수의 애절한 눈길에 전현승은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되겠습니까? 손만 뻗어도 금방 어금니를 드러내는데. 아무래도 그 용은 안현수씨가 마음에 드나봅니다.”
“아니, 난 우리 준이면 충분한데…….”
여간 부담되는 게 아닌 듯 안현수는 결국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그런 안현수의 마음을 몰라주는 아기용은 다 먹은 나무의 끝부분을 바닥에 떨어뜨리며 배가 부른 듯 늘어지게 하품했다.
안현수에게 기대어 잠을 자려는 아기용을 보며 전현승이 턱을 쓰다듬었다. 작은 새끼이긴 해도 용이 모습을 보인 걸 보면, 분명 용의협곡 안으로 발을 들였다는 뜻이었다. 환영할 만한 일이긴 했으나 문제는 안현수의 옆에 달라붙은 아기용의 처우였다.
“이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억지로 떨어뜨릴 수도 없고…….”
“죽일 수도 없죠. 용들은 동료애가 강합니다. 상처라도 입혔다가는 인근에 있는 용들의 분노를 살 겁니다.”
전현승은 용이라는 존재의 힘을 꽤 높게 평가했다. 그들은 중간지역이라는 최악의 숲에서 당당하게 하나의 구역을 차지한 존재였다. 더군다나 그들의 지성은 악마나 천사 이상이라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그럼…….”
“데려가는 수밖에는 없죠. 오히려 잘 된 걸지도 모릅니다. 아기용을 잘 보살폈다는 인식을 심어주면, 낯선 이방인으로서의 이미지를 무마할 수 있을 테니까요. 무엇보다 저희에게는 용들의 친구 안현수씨가 있지 않습니까?”
끝의 말은 조금 장난스럽긴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용기사라는 안현수의 직업과 그가 사용하는 용력이라는 힘은 분명 용들에게 친근한 것이었다. 어쩌면 아기용이 안현수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도 그가 가지고 있는 용력이라는 힘과 신룡창이라는 무기에 이끌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결국 ‘데리고 간다’라는 걸로 결정이 내려지자 안현수는 잠에 빠져드려는 아기용을 깨울 수밖에 없었다. 이제 곧 날이 저물 텐데, 적어도 폭포까지는 도착해야 편히 잠에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자, 자. 아기용아. 미안하지만 잠깐 일어나지 않을래? 우리가 갈 길이 급해서.”
크릉. 그르르릉-.
아기용은 졸린 눈을 비비며 안현수를 바라봤다. 확실히 다른 일행을 대할 때와는 달리, 순종적인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을 잘 듣는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안현수는 어디까지나 조금 친근한 이방인일 뿐, 다른 용들처럼 가족은 아니었다. 인간인 안현수의 말을 아기용이 고분고분 따라준다는 건 아무래도 바라기 힘든 일이었다.
그르릉-.
“어? 옳지, 착하다.”
의외로 안현수의 말에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는 아기용을 보며 일행은 신기하다는 듯 그 모습을 지켜봤다. 혹시 말을 듣지 않으면 자고 있는 용을 들고 가기라도 해야 하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아기용은 안현수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잘 따라주었다.
“용기사라는 직업 덕분인가?”
“그런가본데? 직업 특성에 ‘교감’이라는 스킬이 있는데, 이것 때문인가봐.”
안현수의 직업 특성은 용과의 교감이었다. 용을 다루어야 할 용기사라는 직업의 특성 상, 용과의 교감을 이루지 못하면 용력을 비롯한 용의 소환까지 어려움이 있었다. 때문에 용기사라는 직업을 가진 안현수는 직업 특성으로 용과 교감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아기용뿐만이 아니라 다른 용들과도 잘 어울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그 모습을 보며 우성은 용의협곡에서의 일정이 그리 어렵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안현수가 있는 이상 용들에게 섣불리 공격받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안현수를 따라 일어난 아기용은 여전히 졸린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안현수의 뒤를 졸졸 따랐다. 그 모습이 꽤 귀엽기도 해서 혜미와 혜정이 다가갔는데, 그러자 방금 전 귀엽던 모습은 사라지고 날카로운 어금니를 드러냈다.
결국 안현수 외에는 어느 누구도 아기용에게는 접근하지 못했다. 아기용의 식사가 끝나자, 완전히 날이 어두워진 상태였다.
폭포 소리는 바로 코앞이었다. 용의협곡에 들어섰다는 사실은 아기용의 등장으로 확인되었지만 일행은 폭포까지는 가기로 했다. 그곳부터가 진짜 용의협곡의 도착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릉, 그르릉-.
“응. 응. 그래?”
그 때, 안현수가 아기용과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알아듣는 건지, 아니면 알아듣는 척을 하며 놀아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행은 굳이 그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정말?”
그 때, 안현수가 얼굴을 굳히며 아기용을 내려다보았다. 표정의 변화를 확인했을 때에야 일행은 안현수가 그저 아기용의 그르릉 하는 소리에 맞장구를 치는 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일행은 신기하다는 눈으로 안현수를 바라봤지만, 그의 표정은 반대로 심각했다. 아기용에게 몇 가지를 물어보던 안현수가 일행들을 쭉 둘러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진짜 천사들이 와 있는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