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결국 퀘스트에 참여할지, 참여하지 않을지를 결정하라는 소리였다. 혜정이야 ‘벨제뷔트의 사제’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이상 퀘스트 참여는 필수적이었고, 안현수 역시 용의 협곡에 대한 단서를 가지고 있는 만큼 필요한 존재였다. 그리고 세 사람이 가는데 혜미가 따라가지 않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전현승과 에든, 에릭은 고민에 빠졌다. 과연 이 퀘스트가 성공 가능성이 있을지, 그리고 선악공성을 포기하면서까지 진행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서 머릿속으로 저울질이 시작되었다.
“참가하겠습니다.”
“전현승?”
“선악공성보다는 그 편이 더 재미있을 것 같고, 전 꽤 도박을 좋아하는 편이거든요. 무엇보다 우성씨 말대로 벨제뷔트가 잘못되면 악마 진영 자체가 위험할지도 모르고 말이죠. 무엇보다 이 퀘스트는 선악공성과는 달리 시간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전현승의 승낙은 이미 예상했던 대로였다. 벨제뷔트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그 역시 알고 있을 것이고, 항시 돌아오는 선악공성이라는 이벤트와는 달리 벨제뷔트와 관련된 문제는 시급을 다투는 문제였다.
‘시간이 없다’는 전현승의 말에 에든의 표정도 사뭇 달라졌다. 다시금 돌아오는 선악공성이라는 기회가 아쉽기는 하나, 그 말대로 선악공성은 다음 9회 차에도 돌아오기 마련이었다. 아니, 아포칼립스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선악공성이라는 이벤트는 매번 벌어지고 있었다.
“……그 말도 맞는 것 같군.”
“그렇지?”
“그럼 위험부담은 어떻게 할 거지? 중간지역을 뚫고 가긴 쉽지 않을 텐데. 더군다나 용의 협곡이 어디에 있는 줄 알고?”
“중간지역의 대략적인 지도는 예전 플레이어들이 그려놓은 자료가 있을 거다. ‘더 플레이어’만 뒤져봐도 그 정도 자료는 나와. 뭐, 그 지도 안에 용의 협곡이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말이야.”
단 한 번, 중간 지역을 개척하고 천사 진영으로 넘어가겠다는 시도가 있었다. 대형 클랜들이 연합하고 몇 명의 마검 사용자들을 비롯한 여러 랭커 플레이어들이 동원된 퀘스트였다.
하지만 중간 지역 개척이라는 그 퀘스트는 사실상 절반의 성공이나 마찬가지였다. 중간지역 내부의 모습을 지도로 그리고, 결국 중간지역을 통과하는데는 성공했으나 살아 돌아온 생존자가 없었던 것이다.
그 정도로 중간 지역이라는 장소는 위험한 곳이었다. 사실상 현재의 대악마 클랜으로서는 개척이 불가능한 곳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아포칼립스에서 다음 선악공성까지 남은 시간은 300일 정도입니다. 현실 시간으로는 한 달 가량 정도고요.”
“별로 길게 남진 않았군요.”
“네. 하지만 그 시간 안에 훨씬 더 개인 역량을 끌어내야 합니다. 혜미와 혜정은 물론, 에릭씨까지. 현재로서는 이 네 사람의 능력이 대악마 클랜 내에서 집중적으로 떨어지는 게 사실입니다.”
우성은 대악마 클랜원 중 개인 역량이 준 랭커 수준에 이르는 플레이어를 세 명으로 구분했다.
우성과 전현승, 그리고 안현수와 에든.
우성이나 전현승의 경우에는 두 말할 것도 없었고, 안현수 역시 거의 준 랭커 플레이어에 가까운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용을 소환해 싸운다면 웬만한 준 랭커급 플레이어와도 싸워볼 만할 것이다.
에든 역시 예전에 비하면 능력이 훨씬 더 높아졌다. 우성과 함께한 성마검 벨제뷔트 퀘스트부터 시작해 루시퍼에게서 얻은 보상, 이번 선악공성까지. 그의 실력은 안현수에 비하면 다소 부족하다 느껴질 수 있으나, 충분히 한 사람 몫 이상을 해낼 만큼은 되었다.
하지만 그에 비해 에릭, 혜미, 혜정의 실력은 다소 부족한 감이 있었다. 에릭의 경우에는 전투 감각은 뛰어난 편이라 방해는 되지 않았어도 혜미와 혜정은 가진바 능력에 비해 싸움에 대해서 너무 무지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다른 일행 모두가 아직까지는 중간 지역에 발을 들여놓기는 부족합니다. 그리고 남은 300일은 그 부족함을 메우기엔 촉박한 시간입니다.”
“서론이 길다.”
하고자 하는 말을 이미 눈치 챈 안현수는 벌써부터 몸이 근질거리는지 발을 동동 굴렸다. 그의 말대로 우성이 하고자 하는 말은 이런 긴 서론이 필요 없는 말이었다.
“300일 뒤까지,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지금보다 훨씬 강해지길 바랍니다.”
**
악마와 천사란 세상이 시작되는 순간과 함께, 인간보다 훨씬 더 오랜 역사를 가진 종족이었다. 악(惡)과 선(善)을 대표하는 두 존재는 사실상 종족이라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어쩌면 신성한 존재들일지도 모른다.
신(神)이라고 해서 영원하지는 않았다. 영생이라는 권능은 몇몇 선택받은 신이나 특별한 존재에게만 허락된 능력이었다. 악마와 천사들을 대표하는 마신과 천신은 아쉽게도 영생이라는 권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하지만 악마들과 천사들 중, 각각 두 명씩 영생이라는 위대한 권능을 지닌 존재가 있었다.
바로 악마들의 창세신인 대악마(大惡魔) 아포피스와 디아블로, 그리고 천사들의 창세신인 태양신 라(Ra)와 치천사 세라핌이었다.
세라핌이라는 이름의 천사는 잊혀진 천사였다. 디아블로와는 달리, 그는 천사들 사이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대천사장 라파엘이나 몇몇 대천사들 정도나 그의 존재를 알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천사들, 그리고 악마들 사이에서까지 알려져 있는 치천사 세라핌의 다른 이름이 있었다.
“가이아(Gaea)시여.”
뒤돌아 있던 거대한 천사는 감고 있던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백발의 긴 머리를 가진 그녀는 머리색 만큼이나 투명하고 맑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라파엘, 오래간만이구나.”
“삼천 년… 루시퍼가 돌아선 이후로 처음 뵙는 것 같습니다. 그간 적적하셨겠습니다.”
“글쎄. 별로 적적하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너와는 달리, 미카엘과 우리엘 녀석이 종종 와 주었거든. 그리고 내 이름은 세라핌이다. 라파엘, 내 이름을 알고 있는 어린 종아. 가이아라는 이름은 날 신으로 만든 어리석은 천사들과 인간들이 지은 게 아니더냐.”
십 미터는 훌쩍 넘을 듯 거대한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게 가이아는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다웠다. 다른 대천사들과는 달리 그녀는 단 한 쌍의 날개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그것이야말로 최초로 만들어진 천사의 날개였다.
“……죄송합니다. 세상에서는 당신을 가이아라고 부르기 때문에 잠시 헷갈린 모양입니다.”
“죄송할 것 까지는 없다. 너뿐만 아니라 요즘은 미카엘 녀석도 나보고 가이아라고 부르더구나. 이러다 정말 다음 번 천신은 내가 되는 게 아닌지 모르겠어.”
“그런 말씀 마십시오. 천신이 된다 함은, 영생을 버리시겠다는 말씀 아닙니까?”
“그렇게 들릴 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네 말대로 적적… 아니, 불안하단 말이지. 내가 개입할 수 없는 이 세상이 잘 돌아가고 있을지.”
라파엘은 이런 가이아의 고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항상 자신이 없는 세상이 불안하다던 그녀였지만, 정작 세상은 똑같기만 했다. 항상 싸우고, 죽고, 죽이고는 전쟁은 매번 반복되고 있었다. 결코 평화롭다고 할 수 없지만, 세상은 여전히 돌아갔다.
“……그러게 왜 그런 약속을 하셨습니까.”
“더 이상 무언가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가이아… 아니, 세라핌님이 계셨다면 전쟁은 진작 끝났을 것입니다.”
“그럴까? 디아블로 또한 위험한 존재다. 그는 힘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을 아는 눈과 귀, 그리고 지혜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라파엘, 너는 사탄과 벨제뷔트를 만나지 못했나 보구나.”
최고악 사탄, 그리고 벨제뷔트.
이 두 존재는 가이아만큼은 아니더라도 길고 긴 시대를 살아온 마왕이었다. 그리고 또한, 태초악 디아블로와 비견할 만한 힘을 가진 존재들이었다.
“라파엘, 넌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사탄이 스스로 마신이 되기를 결심한 것을 말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 밖에 있는 수많은 천사들이 지금쯤 피를 뿌리고 있었을 테니까.”
“……무슨 뜻인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가이아님의 말씀과는 다르게, 저는 벨제뷔트를 만나보았습니다.”
“네가? 벨제뷔트를 말이냐?”
고요했던 가이아의 눈이 처음으로 라파엘에게로 향했다.
“삼천 년 만에 나를 찾아온 이유가 거기에 있었군.”
“꼭 이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간 소홀했다는 생각에 이야기나 나눌 겸 온 겁니다. 누가 뭐래도 세라핌께서는 저희의 어머니시니까요.”
“어머니라… 어울리지 않는 말이군. 너희가 태어난 건 나로 인해서가 아니다.”
가이아는 고개를 젓더니 라파엘을 응시했다. 하얀 눈동자엔 빨려 들어갈 듯 깊고 맑은 푸른 보석이 박혀있었다.
“이제 말해 보거라. 벨제뷔트를 만났다니, 어떻게 말이냐? 그는 나 못지않은 힘을 가진 위험한 존재다.”
“세라핌이시여. 부족하지만 대천사장 자리를 맡고 있는 저 라파엘과 미카엘, 우리엘, 그리고 자마엘이 힘을 합쳐 벨제뷔트를 상대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대천사 자마엘이 영면에 빠졌습니다.”
“……자마엘이?”
“네. 세라핌의 소중한 자식이 말입니다.”
대천사 자마엘은 라파엘, 미카엘과 함께 오랜 시간을 존재해온 천사였다. 벨제뷔트를 사로잡은 건 이미 십 년도 더 된 일이지만 영생을 존재해온 가이아에게는 찰나와도 같은 시간이라 십 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가이아는 그가 죽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다.
“안타깝군.”
순간 흔들렸던 가이아의 눈동자는 이내 평온을 찾았다. 아들, 딸 같던 천사의 죽음도 그녀에게는 익숙해진 일이었다. 이미 그녀는 영생을 존재해오며 가까운 거리에 있는 누군가의 죽음을 몇 번씩이고 경험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느냐? 네가 살아있다는 건, 벨제뷔트를 죽이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냐?”
“아닙니다. 저희는… 벨제뷔트를 사로잡아, 루시퍼때와는 반대로 교화(敎化)를 시도했습니다.”
“……교화를? 제 정신이냐, 라파엘?”
가이아의 눈매가 둥글게 휘어졌다. 화가 난 것인지 어이가 없다는 것인지, 그녀의 표정은 라파엘조차 읽기가 힘들었다.
“그를 교화할 수만 있다면 이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틀린 생각은 아니다. 하지만 그를 죽일 수만 있다면, 전쟁을 보다 유리하게 만들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해보지 못한 게냐?”
“전 이 전쟁이 끝나기를 원합니다, 세라핌이시여.”
“과한 욕심이다. 우리들, 그리고 저들의 탄생과 동시에 시작된 싸움이다. 이 싸움을 끝내는 건 네 몫이 아니야.”
라파엘 또한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그 역시 이 전쟁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세상과 함께 시작된 이 싸움을 끝내기가 어찌 쉽겠는가? 그것은 중간지역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교화는… 절반뿐이지만 성공했습니다.”
‘절반’이라는 말에서 가이아는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눈은 이미 라파엘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오기라도 한 듯, 후회하고 있는 그의 감정까지도 읽어내었다.
“그것이 자마엘의 희생만큼이나 가치가 있는 일이더냐?”
“……그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만들 것입니다.”
“고작 그런 말이나 하려고 나를 찾아왔느냐?”
라파엘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는 의미보다는, 모르겠다는 의미였다. 더 이상 물을 게 없어진 가이아는 가볍게 혀를 차며 들었던 눈꺼풀을 내렸다.
“그 후회가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겠지만, 바른 길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마치 제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잘못된 길이라… 그렇게 들렸느냐?”
“네. 하지만 전 잘못된 길은 가지 않았습니다. 전… 그저 조금 더 빠른, 지름길을 가고 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