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플레이어-193화 (192/258)

193화

“포기냐?”

“아뇨. 도전입니다.”

디아블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씩 웃었다. 그는 은연중 알고 있었다.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 모르나 우성이 그 누구보다 힘에 대한 욕구가 강하다는 것을 말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딸 서현이의 목숨을 구하겠다는 생각 하나로 아포카립스를 플레이한 우성이었다. 하지만 보름뿐이었던 서현이의 수명이 점차 늘어나며 안정을 찾고, 아포칼립스에서의 기반도 차차 다져나가기 시작하자 우성은 알게모르게 어떤 욕심이 생겼다.

더 많은 포인트, 생명, 힘.

처음에는 힘 같은 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개미에게 밟혀 죽을 만큼 약하더라도 서현이만 살릴 수 있다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던 우성이었다.

하지만 아포피스의 영향일까? 시간이 지나며 우성은 점점 더 강해지길 갈망하고, 아포피스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다룰 수 있기를 바랐다. 우성 스스로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럼, 곧바로 의식을 시작하지.”

우성은 디아블로를 따라 일어났다. 의식이라고 해봤자 이전 루시퍼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크게 필요한 도구 같은 건 없었다. 장소 또한 볼락의 집무실이었는데, 이만하면 차고 넘칠 만큼 넓었다.

디아블로는 집무실의 정 중앙으로 걸어갔다. 우성은 그의 뒤를 몇 걸음 떨어져 걸었다. 하겠다고 결심하긴 했지만 금방 들이닥칠 고통을 떠올리면 아직까지도 떨렸다.

“의식이라면 어떻게 진행하는 겁니까?”

“걱정 마라. 루시퍼 녀석이 했던 것처럼 대충 병에 담아서 던져 주지는 않을 테니.”

디아블로는 루시퍼가 어떤 방법으로 우성에게 마기를 전해줬는지까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우성은 문득 세상에 모르는 게 없는 악마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대체 어떻게 이런 것까지 알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디아블로는 검지를 피더니 몸을 낮췄다. 기다란 손톱을 바닥에 가져다 대자, 집무실의 대리석 바닥이 연기를 뿜으며 녹아내렸다.

치이이이익-.

디아블로의 손가락 끝이 움직이며 바닥에 지름 2미터 정도의 원을 그렸다. 한 치 흐트러짐도 없이 완벽하게 그려낸 원 안으로 다시금 복잡한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한 눈에 봐도 어떤 형태의 마법진임은 알 수 있었다. 그 용도야 뻔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성에게 디아블로의 마력을 전해주기 위한 마법진일 것이다.

우성은 천천히 디아블로가 마법진을 그리는 것을 지켜봤다. 간혹 혜미나 혜정이 고위 마법을 사용할 때 마법진을 그리는 걸 보았던 우성이었다. 그밖에 여러 마법사들이 자신이 사용하기 어려운 상위 마법을 사용할 때 마법진의 힘을 빌리곤 했다.

하지만 지금 우성이 보고 있는 마법진은 지금껏 그가 보아온 어떤 마법진보다도 더 복잡하고 정교했다. 마법사가 아닌 터라 우성은 그 마법진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아마 웬만한 랭커 플레이어라도 지금 디아블로가 그리는 마법진을 이해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걸 저 이방인이 견딜 수 있겠습니까?”

그 때, 옆에서 디아블로가 그리는 마법진을 보고 있던 볼락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군주급 악마인 그는 디아블로가 그린 마법진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견뎌내지 못하면 죽는 거지.”

“불가능합니다.”

“저 이방인은 그분의 검을 가지고 있어.”

디아블로의 대답에 볼락은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또 다시 다른 말을 꺼내봤자 아포피스의 검을 무시하는 모양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우성이 디아블로가 그려낸 마법진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너무 그런 표정 지을 것 없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저 이방인은 꽤 강해. 아, 물론 정신력뿐이지만 말이야.”

“그렇습니까?”

디아블로가 굳이 우성을 치켜세울 필요는 없었다. 볼락은 그가 우성을 이렇게까지 평가하자 우성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보게 됐다.

불과 얼마 전에 보았을 때만 해도 마수의 숲에서 겨우 살아 돌아왔던 우성이 디아블로에게 이런 평을 받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비록 다른 게 아닌 정신력 면에서의 평가이긴 했지만 말이다.

마법진이 그려지는데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큰 원을 그린 디아블로는 막힘없이 그 원 안을 채워나갔다. 3분도 채 되지 않아 마법진을 모두 드려낸 디아블로는 손톱 끝을 손바닥에 문질렀다.

“다 끝났다.”

우성은 디아블로가 완성한 마법진을 바라봤다.

어떻게 생겼다고 이루 말로 정의할 수 없는 형태의 마법진이었다. 마법진이라면 일정한 형태와 규칙을 가지고 있는 게 대부분이었다. 별 모양이나 네모, 세모 등의 그리기 쉬운 형태부터 시작해더 고차원적으로 복잡한 마법진들이 있긴 하지만 디아블로가 그린 마법진은 복잡하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과연 이것이 평면에 그린 게 맞을까 싶을 만큼 입체적이었다. 마법진이 발동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들어가라.”

마법진 위에서 내려온 디아블로가 우성의 등을 떠밀었다. 툭 건드렸을 뿐인데 우성은 그 힘에 떠밀려 마법진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우웅-.

마법진 위에 서자, 아래쪽에 그려진 마법진이 붉게 빛나며 잘게 떨렸다. 우성은 순간 전혀 다른 또 다른 공간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들어 눈을 크게 깜박였다.

‘신기한데?’

어느새 두려움은 잊혀졌다. 우성은 자신이 서 있는 마법진 위를 발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그럴 때마다 마법진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잘게 떨며 우성을 향해 어떤 말을 전했다.

어떤 언어는 아니었지만 우성은 마법진이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마검의 울음처럼 어떤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떨림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하나였다.

‘가소롭다고?’

[너 같은 건 내 위에 올라설 자격이 없다.]

마법진이 전하는 말에 우성은 살짝 자존심이 상했다. 마검도 아니고, 고작해야 마법진 따위가 자신을 평가하고 가소롭다고 표현하다니.

‘그래. 누가 이기나 보자.’

우성은 반드시 이번 퀘스트를 무사히 마치고 말리라 다짐했다. 떨리던 가슴이 진정되고, 승부욕이 발동됐다. 우성은 마법진 밖에 있는 디아블로와 볼락을 바라봤다.

디아블로는 우성을 마법진 안으로 밀어놓고는 또 다른 마법진을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우성의 아래에 있는 마법진처럼 엄청 복잡하지는 않았다. 1분도 채 되지 않아 마법진을 그려낸 디아블로는 이번엔 자신이 그 위에 섰다.

우우우우우우웅-.

그 순간, 우성이 서 있는 마법진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은 진동정도였던 그 떨림은 점차적으로 그 크기를 키우더니 이내 우성의 마법진 전체가 일그러질 정도로 커졌다.

“으윽.”

우성은 갑작스럽게 밀려드는 머리 통증에 주저앉았다. 방금 전 디아블로가 붉은 빛을 뿜으며 가해왔던 통증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수준의 고통이었다.

“끄아아아아아아아-!”

“견뎌라. 정신을 잃는 순간, 머리가 터져 나갈 테니.”

우우우우우웅-.

디아블로의 목소리에 우성은 주저앉은 채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의 온 몸에서는 푸르스름한 안개가 흩어져 나오고 있었다.

흩어져 나온 안개는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고 마법진을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그렇게 내려온 마법진은 하나의 선을 타고 우성의 아래쪽에 있는 마법진으로 빨려 들어왔다.

얇은 실처럼 빨려 들어온 마력은 우성의 마법진을 파랗게 채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디아블로가 흘려보낸 마력이 우성의 아래에 그려진 마법진을 가득 채운 순간이었다.

“끄아아아아악-!”

**

정신을 잃으면 안 된다. 단 하나의 과제일 뿐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우성에게는 이것보다 더 어려운 과제도 없었다.

정신의 끈을 붙잡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우성에게는 10레벨이 넘은 플레이어 특성 <불굴의 의지>가 있었고, 꽤 높은 정신력 스텟이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큰 오산이었다. 정신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고통 또한 너무 컸다. 차라리 이대로 정신을 잃어버리면 편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못… 참겠네.”

얼마나 입술을 세게 깨물었으면 찢어진 입술 사이로 피가 새어나왔다. 온 몸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통증을 참으며 우성은 품안에 손을 넣었다.

엄지손가락만한 투명한 유리병 하나가 우성의 손에 잡혔다. 총 세 병 중, 두 병을 사용하고 하나 남은 ‘신성한 정신력의 물약’이었다.

퐁-.

주저할 것 없이 마개를 연 우성이 힘겹게 입안으로 물약을 밀어 넣었다. 보라색 물약이 입안으로 들어옴과 동시에 우성의 눈앞으로 정신력이 대폭 늘어났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한결 낫군.’

몸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여전했지만 머리에서 느껴지는 통증만은 조금 줄어든 느낌이었다. 흐려지던 눈 또한 조금 더 맑아졌다.

우성이 ‘신성한 정신력의 물약’을 마신 이유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함이 아니었다. 만약 한 시라도 빨리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면 물약을 복용하는 대신, 그대로 붙잡고 있던 정신을 놓았을 것이다. 하나의 생명을 잃긴 하겠지만 그 정도는 이번 선악공성에서 얻어낸 포인트와 비교하면 감수할 만했다.

하지만 우성은 디아블로가 가한 시련을 통해 마력 스텟을 올리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대로 정신을 놓고 죽게 된다면, 하나의 생명과 더불어 추가적인 패널티가 더 주어지게 될 것이다.

정신을 잃고 편해진다는 선택은 지금 고통스러운 순간에서 도망가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 때문에 우성은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물약을 마심으로서 정신을 더욱 붙잡은 것이다.

“다 죽어가더니, 그 약을 마시고 다시 살아났군. 그건 뭐지? 정신을 붙잡아 주는 각성제 같은 건가?”

아무리 디아블로라 하더라도 플레이어들이 만든 물약에 관해서까지 알지는 못하는 것일까? 디아블로는 처음으로 우성에게 질문을 던졌다.

“알… 거… 없습니다.”

“알려줄 생각이 없는 건가? 하긴, 굳이 널 통해서 알 필요는 없겠군. 네가 정신을 잃고 숨이 끊어지면, 해부라도 해 보면 되겠지.”

“그럴 일… 없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뭐, 그건 그거대로 괜찮은 결과일 테니 아쉬움은 없다.”

디아블로 역시 우성이 견뎌내기를 바라는 모양이었다. 하긴, 아포피스의 열렬한 신봉자인 만큼 우성에게 거는 기대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

마법진을 타고 흐르는 디아블로의 마력은 우성이 지금껏 겪어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일부일 뿐인데도 우성이 본래 가지고 있던 마력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마력이 우성의 몸 안에 강제로 빨려 들어오고 있었다.

이 모든 마력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는 아포칼립스라는 게임의 시스템이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일전에 루시퍼의 마기를 흡수했을 때에도 모든 마기를 다 우성의 것으로 만들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만한 양이면…….’

고통스럽긴 하지만 이제 조금은 견딜 만하다. 물론 점점 더 고통이 더 강해지고 있지만, 신성한 정신력의 물약을 복용한 이상 버텨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 즈음, 바로 옆의 마법진에 앉아있던 디아블로가 일어났다. 더 이상 그의 몸에서는 푸른 마력이 일어나지 않았다.

‘끝인가?’

“아직 안 끝났다.”

마법진 밖으로 나온 디아블로가 우성의 옆으로 다가왔다. 디아블로의 얼굴을 보려던 우성은 그때서야 볼 수 있었다.

자신의 주위, 정확히는 자신이 서 있는 마법진 위의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는 투명한 마력의 존재를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