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누구 마음대로 간다, 만다 하는 거지?”
어느새 다니엘의 뒤로 돌아온 우성이 그의 목을 향해 검을 들이밀었다. 다니엘은 그런 우성을 향해 손을 뻗었는데, 그와 동시에 다니엘과 우성의 사이로 무형의 막이 생겨났다.
쩡-!
우성의 검은 다니엘이 만들어낸 막을 뚫지 못했다. 하지만 다니엘은 우성의 검이 자신이 만들어낸 무형의 막에 금을 냈음을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과는 달리, 다니엘은 우성이 자신을 노리고 있음을 확실히 인지하고 방어에 나섰다. 그럼에도 우성의 검은 다니엘이 만들어낸 막에 흠을 내었다. 만약 다니엘이 우성의 검을 막고자 신력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막이 완전히 깨어질지도 몰랐던 것이다.
“진짜 보통 이방인이 아니군.”
“아직 몸뚱이가 이래서 제대로 힘을 쓸 순 없지만, 다니엘 너 하나 발을 묶어두는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다.”
“몸뚱이라… 자기 몸에 사용할 만한 단어는 아니군. 마검에 먹히기라도 한 건가?”
“먹혔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못하군. 굳이 정정하자면, 공생이라고 할까?”
다니엘은 우성의 상태가 이전과 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붉은색으로 물들었던 눈은 어딘가 모르게 불안정해 보였는데, 지금은 흔들림 없이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것을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우성의 몸을 지배하고 있던 두 개의 자아 중 하나가 물러나고, 완벽한 하나의 자아가 몸에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누가 보기에도 우성의 상태는 평소와 많이 달랐다.
“네가 누군지 궁금하긴 하다만… 지금은 한가로이 잡담을 나눌 때가 아니라서 말이다.”
“그런가? 유감이군. 난 좀 더 여기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말이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우성은 재차 다니엘을 향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우성의 휘두르는 검의 궤적을 따라 검은 마기와 푸르스름한 마력이 흩어져 날아갔다.
퍼억-!
그 순간, 우성과 다니엘의 사이로 한 명의 천사장이 끼어들었다. 천사장은 손에 들고 있는 거대한 창으로 우성의 검을 막고는 다른 한 손으로 신력을 쏘아냈다.
쏴아아아-!
다니엘만큼은 아니더라도 천사장이 쏘아낸 신력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것은 웬만한 군주급 악마들도 견디기 힘든 힘이었다.
하지만 다니엘은 천사장이 쏘아낸 신력정도로 우성을 어찌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우성은 다니엘이 쏘아낸 신력을 맞고도 살아남을 정도로 질긴 상대였다. 천사장이 쏘아낸 신력은 어느 정도 피해는 입힐 수 있을지언정, 우성을 죽일 순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금세 모습을 드러낸 우성은 어디 하나 다친 데 없이 멀쩡했다. 쏘아낸 신력을 정면으로 맞았다면 또 모를까, 우성은 검으로 자신의 몸을 보호했다.
방해꾼은 우성만이 아니었다. 피엘과 리우, 전현승이 연이어 사방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다른 때라면 그리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한 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한 다니엘은 애가 탈 지경이었다.
“이것들이…….”
“무시해라, 다니엘.”
고오오오-.
“넌 도망갈 생각만 해라.”
가비엘이 쥐고 있던 망치가 움직였다. 십여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망치의 주위로는 악마들의 상극인 신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벨리알이 그것을 보며 호승심에 움직이려던 순간이었다.
“함부로 덤비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벨리알.”
루시퍼가 그의 앞을 막아서며 행동을 제지했다. 벨리알은 자신의 맢을 막아서는 루시퍼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마왕과 같은 힘을 가진 그를 무작정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무슨 소리냐?”
“가비엘 녀석, 무리하고 있다. 저건 라파엘이나 쓸 수 있는 건데 말이지. 뭐, 그만큼 위험하긴 하지만.”
루시퍼는 벨리알을 만류하며 가비엘이 들고 있는 거대한 망치를 바라봤다. 그것은 대천사장인 라파엘이 휘두르던 망치로서, 천신이 세상을 벌할 때 쓰이는 무기로도 알려져 있었다. 천신의 힘을 빌려 갓 핸드를 사용할 수 있는 대천사는 몇 있었지만, 천신의 망치는 오직 대천사장 라파엘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후웅-.
“온다.”
루시퍼의 네 쌍의 날개가 펄럭였다. 벨리알의 멱살을 잡고 순식간에 하늘을 향해 비상하며 루시퍼가 가비엘이 휘두른 망치를 피해냈다.
쿠아앙-!
가비엘이 휘두른 망치가 떨어지는 순간, 방금 전까지 루시퍼와 벨리알이 서 있던 지면에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겨났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땅속 깊숙이 신력이 퍼지며, 그 주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쩍, 쩌저저적-.
망치가 떨어진 자리를 중심으로 땅에 금이 가며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서서히 지면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천사들은 날개를 펼쳐 무너진 지면으로부터 멀어졌지만, 비행 능력이 없는 플레이어들은 일일이 분주히 다리를 움직여야 했다.
단 한 번, 망치를 휘둘렀을 뿐인데 결과는 참담했다. 평원 일대 한쪽이 무너져 내리며 끝없는 구덩이가 생겨났고, 몇몇 플레이어들은 자리를 찾지 못해 그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기까지 했다. 그 속에는 비단 악마 진영의 플레이어들만이 아니라 천사 진영의 플레이어들도 속해있었다.
“……역시, 대단하군.”
“휴. 그대로 부딪혔으면 큰일 날 뻔했네.”
가비엘이 휘두른 망치의 위력을 확인한 벨리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심 호승심이 생긴 그는 가비엘과 정면으로 부딪힐 생각이었는데, 위력을 보아하니 자칫 큰 피해를 입거나 그대로 죽을 뻔했던 것이다.
가비엘은 네 쌍의 날개로 하늘로 날아올라 다시금 망치를 휘두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단 한 순간에 가비엘과 다니엘의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플레이어들과 벨리알, 루시퍼는 다니엘의 모습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혼란을 틈타 다니엘은 가비엘을 두고 도망친 것이다.
“하여간 비둘기주제에 쥐새끼처럼 도망치는 것 하나는 빨라.”
“별로 관심 없다.”
“아, 맞다. 루시퍼 넌 가비엘만 죽이면 된다고 했지? 그런데 어쩌냐? 그렇게 쉬워보이지는 않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벨리알은 이미 가비엘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루시퍼 역시 굳이 혼자서 가비엘을 상대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천신의 망치를 꺼내든 가비엘을 혼자서 상대하다가 자칫 피해라도 입기보다는 벨리알과 손을 잡는 게 나은 선택이기 때문이었다.
“그거야 벨리알, 네 생각이겠지.”
루시퍼가 날개를 펼쳐 가비엘을 향해 날아갔다. 벨리알의 앞을 넘어 가비엘을 향해 정면으로 날아간 그는 기다란 손톱을 휘둘렀다.
후웅-.
그런 루시퍼를 향해 가비엘이 망치를 휘둘렀다. 십여 미터의 거대한 망치였지만, 그것을 휘두르는 가비엘은 전혀 무거워 보이는 기색이 없었다. 하지만 그 위력은 앞서 보았듯 무시무시했다.
콰앙-!
가비엘이 휘두른 망치와 루시퍼의 손이 부딪혔다. 무시무시한 신력이 응축된 망치는 루시퍼를 위에서 짓눌렀다. 하지만 루시퍼가 뻗은 손에서 역시 그에 못지않은 마기가 뿜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가비엘이 휘두른 망치는 대천사의 것도 아닌, 천신의 힘을 빌린 무기였다. 그것을 정면에서 받아낸 루시퍼는 조금 힘에 부치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팔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다 할 수 있었다.
쉬이익-.
그 틈을 노려 피엘과 전현승, 리우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방어형에 치중된 다니엘과는 달리 가비엘은 그 셋의 검을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눈앞에 있는 루시퍼를 무시할 수도 없어, 가비엘은 다른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고오오-.
천신의 손이 내려와 피엘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앞서 나가를 짓눌렀던 것처럼 천신의 손은 피엘의 몸을 짓누를 것처럼 내려왔다.
다른 때라면 피엘은 그것이 무엇이든 검을 휘둘러 베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천신의 손은 마왕이라 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는 절대적인 힘이었다. 그것을 막아낼 순 있어도 파할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피엘은 천신의 손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전현승과 리우 역시 마찬가지로 몸을 사렸다. 천신의 손뿐만이 아니라 대천사 가비엘 본연의 힘 역시 그들은 쉽게 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역시나 루시퍼를 제외하고 가비엘이 가장 신경 써야 할 대상은 따로 있었다.
“이야, 진짜 막았네?”
느물거리는 음성을 흘리며 가비엘의 뒤를 덮친 존재는 바로 벨리알이었다. 그림자처럼 모습을 숨긴 그는 루시퍼와 피엘을 비롯한 이들이 시선을 끄는 동안 순식간에 가비엘의 뒤로 돌아왔다.
다른 때라면 벨리알을 놓칠 가비엘이 아니었지만 워낙 루시퍼를 상대로 집중하고 있었던 터라 가비엘은 벨리알을 놓치고 말았다.
콰앙-!
“큭.”
“어, 막았어?”
단숨에 머리를 날려버릴 생각으로 마기를 뿜은 벨리알은 가비엘이 그것을 간신히 막아내자 눈을 가늘게 좁혔다. 사실대로 말해 막았다기보다는 겨우 신력을 방출해 충격을 완화했다고 말해야겠지만, 루시퍼가 시선을 끌어주는 틈을 노려 완벽한 타이밍이라 생각한 벨리알에게는 그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브리엘 동생이라더니… 꽤 하네?”
벨리알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지척에서 붙어 빠르게 검을 휘두르는 터라 가비엘은 손에 들고 있는 망치를 제대로 휘두를 수가 없었다. 은밀하게 접근해 싸우는 벨리알의 싸움은 천신의 손과 거대한 무기를 이용해 싸우는 가비엘과 정 반대로 천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신경 쓸 데가 많아 보이는군.”
푸욱-.
가비엘의 눈이 번쩍 떠졌다. 어깨에서 느껴진 통증과 뚝뚝 흐르는 핏물을 보던 가비엘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매우 익숙한, 그리고 평소 그토록 저주하던 얼굴이 가까이 보였다. 두 개의 송곳니를 가진, 새하얀 피부를 가진 타락천사 루시퍼였다.
“루시퍼…….”
“그렇게 애절하게 부르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사실 나도 그렇게 썩 마음이 편치는 않아서 말이야.”
푸욱-.
벨리알의 검이 가비엘의 배에 꽂혔다. 가비엘은 비명도 지르지 않고 꿋꿋이 루시퍼의 얼굴을 노려봤다. 그러곤 천천히 덜덜 떨리는 손을 뻗었다.
서걱-.
“어허, 어딜.”
가비엘의 팔이 저 땅 아래로 떨어졌다. 루시퍼의 얼굴을 향해 신력을 쏘아버리려던 가비엘의 목적은 손과 팔을 잃어버림으로써 제지되었다. 한 치 망설임 없이 가비엘의 팔을 베어버린 루시퍼는 피 묻은 자신의 팔을 보며 물었다..
“죽기 전 소감은 어떤가, 가비엘?”
“……그냥 죽여라.”
“깨끗한 마무리로군. 너답다.”
턱-.
루시퍼의 손이 가비엘의 머리 위로 올라갔다. 피 묻은 손이 깨끗한 순백의 머릿결을 더럽힌 그 순간이었다.
콰앙-!
루시퍼의 손바닥 아래에서 폭발이 일어나며 가비엘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고결한 대천사의 죽음이라기엔 너무나도 끔찍한 마지막이었다. 덩그러니 남은 네 쌍의 거대한 날개만이 그의 존재가 대천사였음을 알려주었다.
덩그러니 남은 몸뚱이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를 보며 루시퍼는 감정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무덤덤한 것 같기도 하면서 슬픈 것 같기도 하고, 입가가 비틀어지며 웃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스스로도 자신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당장 알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다니엘은 도망친 건가?”
벨리알은 멀리 천사들의 포탈을 바라봤다. 얼만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생겨난 것인지는 몰라도, 지금 당장 뒤쫒기엔 늦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 순간, 벨리엘은 잊고 있던 한 사람이 떠올랐다.
“……어, 그러고 보니 그 이방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