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피엘과 우성, 전현승은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주위를 돌아봤다. ‘옆에 있다’는 볼락의 말과는 달리, 벨리알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 있다는 거지?”
“여기 있다는 거다.”
턱-.
피엘은 자신의 머리 위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손길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고개를 들어 자신의 머리를 짓누른 굵고 쉰 목소리의 주인을 보고 싶었지만, 그의 손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듣자하니 아까부터 재미있는 이야기만 나불대더라.”
“……이 손부터 놓고 이야기 하지.”
“말버릇도 재미있고. 하여간,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꽤 재미있는 이방인이야.”
퍽-.
피엘은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던 손을 치워냈다. 꽤 힘을 줬는지 둔탁한 소리가 나며 벨리알의 손이 그의 머리에서 떨어졌다.
피엘은 벨리알의 손이 머리에서 떨어지자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뒤에는 아무것도 없는 빈 허공이 있을 뿐, 기대하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날 찾나?”
또 다시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 마치 이 세계와 다른 세상에 살아가기라도 하듯, 그는 그림자마냥 아무런 소리도 기척도 존재하지 않았다.
“……재빠르기도 하군.”
“너 같은 거북이가 날 보고, 잡기는 이르지. 이방인 중 조금 잘 나간다고 꽤 건방져.”
피엘은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는 벨리알의 얼굴을 확인했다. 장난이 끝난 건지, 아니면 이만하면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생각했는지 그는 이번엔 자신의 모습을 감추지 않고 거만하게 다리를 꼬아 소파에 몸을 묻고 있었다.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벨리알은 겉보기엔 그리 강해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창백한 피부와 가느다란 팔뚝과 다리는 인간의 기준으로는 허약해보이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악마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뿔’이 존재하지 않아, 그가 과연 악마가 맞는지 의심될 정도였다.
“……뿔이 없군요.”
벨리알을 처음 본 우성의 첫 감상평은 이것이 전부였다. 새파랗게 질린 창백한 피부야 그렇다 치더라도, 뿔이 없는 악마는 처음 보는 경우였다. 반면, 피엘은 별다른 감흥이 없어보였다.
“마왕 정도 되는 악마는 자기 뿔을 감추곤 하지. 너무 커서 불편하거든.”
“나 말고 다른 마왕도 만나봤어?”
“마왕뿐만 아니라 니들 신도 만나봤다. 너야말로 마왕주제에 너무 건방떠는군.”
피엘은 마신 사탄의 선택을 받은 마검 사용자였다.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보자면 단순히 ‘마검’이라는 어마어마한 고급 장비를 가지고 있는 것뿐이지만, 악마들의 입장은 다르다.
‘마신’이란 즉 그들의 신이었다. 이곳 세상의 악마들의 눈으로 보았을 때, 피엘은 마신의 선택을 받은 인간이었다.
아마 보통 악마라면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피엘을 함부로 다룰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보통 악마’라고 부를 수 없는 존재였다.
“건방이라… 사탄님의 선택을 받았다고, 네가 신이라도 된 줄 아나봐?”
“그렇게 보이나?”
“이래서 난 이방인들이 싫단 말이지. 분수를 몰라요, 분수를. 쯧.”
벨리알은 혀를 차면서도 별다른 행동이나 기타 말을 아꼈다. 피엘의 분위기가 워낙 흉흉한 탓도 있었지만, 역시나 마검 사탄의 사용자인 그를 해칠 수도 없다는 이유가 컸다. 그는 ‘사탄님만 아니었어도’라고 중얼거리며 시선을 우성에게로 옮겼다.
“너냐?”
“네?”
“흠, 생각보다 훨씬 덜 떨어진 놈이네. 겉으로 보기에는 차라리 이쪽이 나은 것 같은데 말이지.”
벨리알은 우성을 빤히 보더니 금세 다시 피엘과 번갈아봤다. 서두 없이 중얼거리는 말이었지만 우성은 그 말이 자신과 피엘을 비교하는 말임을 알 수 있었다.
“……어때 보입니까?”
“지금 널 판단해 달라, 이거야?”
“그런 거겠죠.”
“거 당돌한 녀석일세. 판단이고 뭐고, 아직 젖도 못 뗀 애새끼를 보고 무슨 생각이 들겠냐? 이 녀석처럼 걸음마라도 하고 와라.”
젖도 못 뗀 애새끼.
참으로 자극적이고 야박한 평가였다. 스스로 이런 평을 받을 만큼 약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마왕의 앞이라 생각하니 이토록 자신이 초라해 지는구나 싶었다.
“뭐, 너무 신경은 쓰지 마. 난 이렇게 배워먹고 겁낼 것 없이 자라서 말이 막 나와서 그래.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대로 판단하고 말해. 남들 기준으로는 꽤 쓸 만할지 누가 알아?”
“위로는 됐습니다.”
“위로라고 할 건 없고. 사실 그분이 신경 쓰여서 말해주는 거니까, 그냥 새겨들으라고.”
그분이라면 당연히 아포피스를 뜻하는 것이다. 악마들의 창세신이라더니, 마왕까지 ‘그분’이라 칭할 정도인 모양이었다. 사탄처럼 감히 입에도 담지 못하는 것을 보니 말이다.
“그래서, 정확히 뭘 도와달라고?”
“이야기를 듣고 계셨던 것 아닙니까?”
“난 돌려 말하는 걸 싫어해. 힘을 빌리고자 한다? 그것까진 들었어. 정확히 어떤 일에 어떻게 힘을 빌리고 싶은지,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이 뭔지 말해. 듣고 나서 재미있을 것 같으면 도와줄게.”
벨리알은 거만하게 꼬았던 다리를 풀더니 냉큼 손에 잡히는 우성의 찻잔을 들어 입안에 털어 넣었다. 예상과는 달리 무섭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괴팍한 성격이라는 것만은 확실한 듯했다.
“……말 그대로입니다. 이번 선악공성에 나타난 대천사를 잡는데 힘을 빌려주셨으면 합니다.”
“이번에 나타난 대천사라면… 다니엘 녀석을 말하는 거군. 모습을 드러낸 녀석은 그 놈뿐이니까 말이야.”
마왕이라고 해서 모든 대천사를 알지는 못한다. 그들은 오랜 세월을 존재해왔고, 서로를 반드시 죽여야 할 숙적처럼 생각해왔으나 사는 세계가 너무 달랐다.
지금처럼 선악공성이 아니고서는 만날 수 없는 환경이 되어버린 게 이미 오래 전의 일이었다. 이미 벨리알이라는 악마가 탄생하기 전부터 그것은 지속되어오던 관례이자 현상이었다.
특히 악마들의 경우에는 천사가 악마를 증오하고 경멸하는데 비해 천사를 그렇게까지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마치 사자가 양을 잡아먹는 게 당연한 것처럼 그들에게 있어 천사란 ‘당연히’ 죽여야 하는 대상이었다.
그렇기에 악마들, 그리고 마왕들은 대천사라는 존재에게 큰 관심을 쏟지 않았다. 언젠가 만나게 되면 지금까지 그러했듯이 당연하게 죽이면 될 뿐이었다.
그런데 딱 보는 것만으로 상대 천사의 이름을 알고 있다? 우성은 어쩌면 벨리알과 다니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녀석을 죽이는데 한 손 거드는 거라면 환영하지. 사실, 나도 그 녀석이 여기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온 거거든. 그런데 귀찮게 다른 천사장 놈들과 이방인들이 달라붙어서 제대로 싸우질 못하겠더군. 특히 생각보다 이방인들이 많이 성가셔.”
벨리알은 어제의 전투가 생각나는지 새하얗게 질린 미간자리를 꾹꾹 눌렀다.
“생각보다 너희 이방인 것들도 만만치 않더란 말이지. 파리같이 손만 저어도 죽는 놈이 있으면, 제법 성가신 놈들도 있고. 다니엘 녀석만 없으면 어렵진 않겠지만, 싸우는 중에 옆에서 알짱거리니 상당히 귀찮더라고.”
“대천사와 1:1로 싸운다면 이길 자신이 있으십니까?”
“다른 마왕들 같으면 당연하다고 대답하겠지만, 사실 모르겠어. 그래서말인데, 몇 놈은 다니엘 녀석을 죽이는데 도와줬으면 해.”
“……?”
이건 또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였다.
우성은 ‘자신이 있느냐’는 질문 뒤에 당연하게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다. 마왕정도 되는 존재라면 오만함은 기본으로 밑바탕에 깔려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예상을 깨고 벨리알은 ‘모르겠다’는 대답과 함께 ‘도와달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우성이 알고 있는 악마들의 성격상, 특히 서로를 숙적으로 생각하는 성격에 이렇게 쉽게 도움의 손길을 뻗어오는 건 확실히 의외이긴 했다.
“왜 얼빠진 표정이야?”
“아니 그게…….”
“아, 그래. 이상하긴 하겠네. 사실 나도 내가 다른 마왕들이랑 다르다는 건 알고 있거든. 근데 그건 아마 내 성향 때문일 거야.”
“성향?”
“대부분 마왕들은 ‘오만’이라는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난 다른 녀석들과는 달리 ‘교활’한 편이거든. 별 힘을 들이지 않고 다니엘 녀석만 죽일 수 있다면 손 좀 빌리는 게 어때서? 좋은 게 좋은거 아니겠어?”
벨리알의 말에 우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자신이 교활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벨리알의 말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우성 역시 확실한 이득과 성공이 보장된 방법이 있다면 비겁함이나 자존심 따위는 한 겹 벗어 던지는 편이었다. 성향이 교활이라고는 하지만 벨리알의 이런 선택이 꼭 교활하다고 생각할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대답은?”
“아, 당연히 도와 드려야죠.”
“그래, 좋아. 다른 놈들은 다니엘 주변에 있는 이방인들과 천사들을 맡고, 너희 셋은 날 도와서 다니엘을 죽이면 되겠다.”
“저희 셋이요?”
“그래. 보아하니 이 녀석은 루시퍼의 검을 가지고 있는 것 같고, 너야 그분의 검을 가지고 있고. 특히 이놈은 꽤 물건이란 말이지. 사탄님의 검을 가지고 있다지만, 적어도 내가 본 이방인들 중에는 최고야.”
벨리알은 피엘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과연 마왕이 맞나 싶을 만큼 격 없고 가벼운 모습이었지만, 이미 앞에서 피엘을 힘으로 제압했던 만큼 그의 힘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너희 셋이면 될 거야. 사실, 쉽게 가자고 도와달라는 거지 나 혼자서도 다니엘을 죽이지 못할 것도 없고.”
“그렇습니까?”
“정 너희가 찝찝하면 몇 명 더 데리고 오던가. 듣자하니 사모스 녀석의 검을 가지고 있는 녀석도 있다던데.”
이번 선악공성에는 마검 사용자가 한둘이 참여한 게 아니었다. 마검 사탄의 사용자인 피엘을 비롯해 예외적으로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던 마검 메피스토의 사용자와 사모스의 사용자까지 등장한 상태였다.
물론 그들 모두가 북쪽지역에 소속되어 있지는 않았다. 아직 다른 마검 사용자들에 비해 수준이 다소 떨어지는 마검 메피스토의 사용자는 북쪽이 아닌 남쪽지역에 소속되어있는 상태였다. 대악마 클랜처럼 활동 지역을 옮길 권한이 있지도 않으니, 그는 이번 계획에 참여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마검 사모스의 사용자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미 그는 사방신(四方神) 클랜에 소속되어 있는 마검 사용자로서, 이번 계획에 참여하기로 되어있었다. 이미 도움이 확정되어 있는 상태에서 역할 배분을 나누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았다.
피엘 역시 그 부분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따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지.”
“아, 그래? 뭐, 사실 난 너 한 명만 있으면 될 것도 같은데.”
“그건 이쪽에서 사양하지. 가능하면 보다 확실하게 대천사를 잡고 싶어서 말이야. 네가 헛짓거리 하다가 당하기라도 하면 우리만 개죽음이 되지 않나?”
다른 누구도 아닌 마왕에게 개죽음이라니, 표현이 제법 거칠었다. 특히나 그의 말은 마왕인 벨리알의 실력을 과소평가 하는 발언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벨리알은 오히려 그런 피엘의 말이 재미있기라도 한지 킬킬 웃음을 흘렸다. 얌전히 탁자 위에 놓인 과자를 입 안으로 집어넣는 모습이 별로 화가 난 모양은 아니었다.
“그래, 그건 네 마음대로 해라.”
“그럼 지금부터 이렇게 네 명, 그리고 마검 사모스의 주인은 함께 행동하도록 하지.”
마왕 벨리알과 피엘, 우성, 전현승.
그리고 추가로 사방신 클랜의 마검 사모스의 사용자까지.
꽤나 파격적인 팀이었다. 마검 사용자만 무려 넷에, 그 면면을 살펴보면 하나하나가 보통 플레이어가 아니었다. 이만한 구성이면 상대가 설사 그 대단한 대천사라 하더라도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피엘은 큰일을 앞두고 우성과 전현승을 돌아보며 재차 다짐하듯 말했다.
“목표는 대천사 다니엘의 죽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