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플레이어-176화 (175/258)

176화

생각보다 빠른 이른 아침부터 천사들의 공격은 시작되었다. 서쪽지역은 특히나 첫째 날에 큰 대승을 거두어서 다음 날부터 공격이 무뎌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전혀 반대의 대응이 돌아온 것이다.

서쪽지역에 배정받은 플레이어들은 악마들의 지시에 따라 각자 장비를 점검하고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악마들의 지시를 받을 필요가 없는 대악마 클랜은 천사들의 공격 소식에 가장 곧장 북쪽 지역으로 향했다.

“자유라는 권한이 이런 데서 좋긴 하군요.”

몇 번 선악공성에 참여해 보았던 에든은 마음대로 전장에서 이탈해 지역을 옮기는 지금 상황이 꽤 신기한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이런 권한이 무슨 메리트가 있을까 했는데, 생각 이상으로 ‘자유’라는 권한은 필요한 상황이 많았다.

“네. 아무래도 전투 지역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대천사를 잡을 때 역시 혹시라도 불리하다 싶으면 바로 도망칠 생각입니다.”

“아, 그런 방법도 있군요.”

지금껏 에든은 대천사를 잡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만큼 대천사라는 존재는 아포칼립스에서 절대적인 힘의 상징이었고, 악마 진영의 플레이어들에게는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비록 이쪽에도 마왕이 있고 한 번 대천사를 잡아보았던 피엘이라는 플레이어가 있다지만 위험부담이 크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도망이라는 전제만 깔아놓고 생각해 본다면, 그 위험부담도 다소 낮아질 수 있었다.

‘물론 내가 도망칠 것 같지는 않지만.’

우성 역시 개죽음은 사절이었다. 지금만 해도 위험한 상황에서는 지체 없이 도망칠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이고, 나중은 나중이다. 어제처럼 <대리인>을 사용한 상태에서도 자신이 천사들을 앞에 두고 도망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특히나 대천사와 같은 고위 천사를 앞에 둔 상태에서라면 더욱 그렇다.

‘아마 절대 도망치지 않겠지.’

이번 선악공성에서 대천사와의 싸움은 우성에게 첫 죽음으로 돌아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성은 끝끝내 붉은악마 클랜, 그리고 피엘과 함께 대천사를 잡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유는 아직까지도 납득하지 못했다. 왜 자신이 그런 선택을 내렸는지 이해도 하지 못했다. 단지 그 결정을 내린 이유를 대천사를 잡았을 때 얻을 수 있는 ‘보상’에 집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도 슬슬 미쳐가나보군.’

<대리인>뿐만 아니라 이제는 아포피스라는 마검 자체를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성은 이번 선악공성이 끝나는 즉시 획득한 포인트로 정신력 스텟을 올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스텟 하나하나를 올리는데 드는 포인트가 만만치 않지만, 선악공성을 통해 얻은 포인트 역시 결코 적지 않았다.

일행은 서쪽지역을 뒤로하고 곧장 북쪽으로 향했다. 서쪽과는 달리, 북쪽지역은 아직까지 천사들이 들이닥치지는 않은 상태였다. 물론, 성 하나를 두고 대치하고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우성은 곧장 안병환을 찾았다. 이미 그와는 이야기를 끝마친 상태라 놀라지는 않았지만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건 의외인 모양이었다.

“왜 벌써 오셨습니까?”

“서쪽 지역에 천사들이 들이닥쳐서 말입니다. 그쪽에서 더 전투를 이어나가기보다는, 이곳에 오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시간부터요? 빠르군요.”

안병환은 우성을 포함한 일행을 자신이 머물고 있는 막사로 안내했다. 붉은악마 클랜의 회의장으로 사용하고 있었는지 안병환의 막사는 근 테이블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의자가 배치되어 있었다.

우성을 비롯한 일행들은 각자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어차피 그들에게 배정된 막사는 서쪽지역에 있어, 북쪽지역에서는 갈 곳이 없었다. 아마 당분간은 안병환을 비롯한 붉은악마 클랜에게 배정된 막사에 머물러야 할 것이다.

“아무래도 천사들은 서쪽 지역을 포기한 모양이군요.”

“포기요? 그런데 왜 일찍부터 공격을 합니까?”

“그야 포기했기 때문이지요. 다들 아시지 않습니까? 어느 순간부터 선악공성이란, 악마와 천사들간의 형식적인 싸움이 되어버렸다고요. 싸움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즉 ‘도망’이나 마찬가지인 게 되어버린 거죠.”

우성은 안병환이 하는 말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 어떻게든 싸움은 해야겠으니, 겉으로 보기나마 싸움처럼 보이게 병력을 보냈다는 뜻이었다.

아마 이른 아침부터 보내온 천사들의 병력은 어제에 비해 훨씬 보잘것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 남은 병력은 서쪽 외에 다른 지역으로 보내졌겠지.

“아마 서쪽 지역은 어제처럼 금방 정리가 될 겁니다. 아니면 미적지근하게 공격하고 빠지는 식으로 시간을 끌거나 하겠죠. 뭐, 어느 쪽이든 형식적인 공격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을 겁니다.”

“그렇군요.”

“아무튼 환영합니다. 보아하니 대악마 클랜분들 모두가 빠짐없이 함께하기로 한 모양이군요. 사실 몇 분 정도는 불참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우성은 생각할 것도 없이 안병환이 의외라고 말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사실 대악마 클랜은 소수 정예라는 이름과는 달리, ‘정예’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몇 명 없는 실정이었다. 대표로 두 명을 꼽는다면 마검 사용자인 우성과 전현승, 그리고 두 명 정도를 더 꼽자면 안현수와 에든이 있었다.

에릭도 어디서 뒤지지 않는 실력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정예’라고 부르기엔 무리가 있었다. 혜미와 혜정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대천사를 잡는다는 계획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게 뻔했다.

“대천사를 잡는데 거들 사람은 저와 전현승씨, 두 명뿐입니다. 다른 일행들은 북쪽지역의 전투를 거들 뿐입니다.”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 계획을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됩니까? 참여하는 사람은요?”

북쪽지역에는 붉은악마 클랜의 플레이어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얼마 전 보았던 오사카 클랜의 부 마스터인 라이토나 가네스, 사방신 클랜 등의 대표 클랜들이나 어느 클랜에도 소속되어있지 않은 여러 랭커 플레이어들까지. 이런 쟁쟁한 플레이어들이 있는 가운데서 붉은악마 클랜이 단독으로 대천사를 잡겠다는 계획을 세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미 타국의 플레이어인 피엘이 이 계획에 포함되어 있다는 건, 이미 붉은악마 클랜만의 일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사실 붉은악마 클랜이 주최가 되어서 진행되는 계획이긴 합니다만, 아시다시피 플레이어 피엘을 비롯해 여러 클랜에서도 이 계획에 참여하기로 되어있습니다.”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일본의 오사카 클랜, 중국의 사방신 클랜, 미국의 가네스 클랜, 영국의 프리덤 클랜. 그밖에 플레이어 피엘을 비롯한 여러 랭커 플레이어들까지. 이번 계획에 참여할 플레이어들은 하나같이 준 랭커 플레이어 이상으로 구성된 상태입니다. 규모로만 본다면 6회 차에 플레이어 피엘이 대천사를 죽였을 때 이상입니다.”

총 다섯 개의 대표 클랜과 랭커 플레이어들이 모였다. 선악공성이 아니고서는 결코 모일 수 없는 규모였다. 아니, 이야기로 미루어보아 이제까지의 선악공성에서도 이만큼의 플레이어들이 단합한 적은 없는 듯했다.

안병환의 확답에 반신반의하던 불안감이 사라졌다. 이만하면 충분히 대천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이쪽에도 역시 마왕이라는 카드가 있었다.

든든한 마음에 우성이 고개를 끄덕일 때, 막사 밖에서 전언이 들려왔다.

“안병환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잠시만 기다리라 전해라. 이 분들과 이야기만 끝나고 만나게.”

“그게, 대악마 클랜분들과 함께 이야기를 해 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플레이어 피엘이십니다.”

바깥에서 들려온 붉은악마 클랜원의 대답에 안병환이 벌떡 일어났다. 전혀 예상치 못한 손님이 찾아온 것이다.

“어서 들어오시라 전해라.”

자리에서 일어난 안병환은 앉을 생각이 없어보였다. 잠시 후, 피엘이 막사 안으로 들어오자 안병환이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반갑습니다, 플레이어 피엘. 직접 이렇게 찾아오신 건 처음이시군요.”

안병환과 피엘은 초면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사적인 친분이 있는 관계는 아니었지만 선악공성이 있을 때 종종 마주치곤 했었다.

피엘의 실력은 악마 진영에서 1,2위를 다툰다. 가네스 클랜의 마스터이자 마검 디아블로의 사용자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작지 않았다.

그는 클랜에 소속되지 않고 행동하는 만큼 철저한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는데, 때문에 어느 클랜에 피엘이 방문했다는 이야기는 극히 드물었다. 붉은악마 클랜에서 필요에 의해서 피엘을 찾긴 했었지만, 반대로 피엘이 붉은악마 클랜이 방문했던 적은 없었다.

“정확히는 붉은악마 클랜을 찾아온 건 아니니 착각하지 마라.”

거침없는 반말에도 안병환은 그러려니 했다. 피엘의 성격이 이런 건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그저그런 실력이었다면 예의가 어쩌고 하면서 싸움이라도 났을 테지만, 피엘 정도의 실력자와 그런 사소한 이유로 척을 져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럼 무슨 이유에서 오셨는지……?”

“이 녀석들과 좀 안면이 있어서 말이지.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기도 하고, 얼굴이나 볼 겸 왔다.”

“네, 네?”

‘얼굴이나 볼 겸’이라는 사소한 이유였지만 그 말의 주체가 피엘이라는 점에서 안병환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껏 피엘과 친분을 맺으려던 클랜들은 한두 곳이 아니었다. 자국의 클랜인 영국의 프리덤 클랜부터 수십 개의 중소 클랜들까지, 피엘 하나를 둘러싸고 얼마나 많은 공작을 펼쳤는지 모른다.

피엘 한 사람만 있다면 작은 중소클랜이 거대한 대형클랜으로 발돋움 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피엘이란 플레이어의 실력은 어느 랭커 플레이어와 비교할 수 없을만큼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까다롭게도 피엘은 어느 누구와도 깊은 친분을 두려 하지 않았다. 그나마 자국의 클랜인 프리덤 클랜과 작은 친분을 맺었을 뿐이었는데, 그나마도 피엘이 먼저 찾아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이제 막 마검 사용자로 밝혀진 우성과 전현승, 그리고 그들이 만든 대악마 클랜을 직접 찾아오다니?

‘둘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던 걸까?’

깜짝 놀랄 일이기는 하나 대악마 클랜과 피엘의 친분은 붉은악마 클랜에게 나쁜 소식은 아니었다. 오히려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붉은악마 클랜 역시 어느 클랜에도 소속되어있지 않은 피엘과 친분을 맺기 위해 꽤 오랫동안 노력을 해왔다. 하지만 역시나 다른 클랜들과 마찬가지로 실패하였는데, 우호 클랜은 대악마 클랜이 피엘과 친분을 가지고 있다면 붉은악마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게 분명했다.

“또 만나네요. 여기 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서쪽 지역에서 활동한다 해서 이번 선악공성에서는 만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긴 하군. 어제 활약은 잘 들었다.”

피엘은 과감없이 우성의 옆자리에 앉았다. 애초에 안병환을 보러 온 게 아니라는 듯 그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괜히 어색해진 안병환은 원래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피엘 한 사람의 등장으로 이야기의 주최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겁쟁이인 줄 알았다. 북쪽이 아닌 서쪽에서 활동한다고 해서 말이지. 그쪽에 뭐 상대할 놈들이 있긴 하나? 듣자하니, 박윤성이라는 놈 말고는 괜찮은 녀석 하나 없던데 말이야.”

“그 박윤성을 제가 죽였죠.”

“그래. 그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에만 해도 별 볼일 없는 실력이었는데 말이야. 아니, 이제보니 지금도 마찬가지군.”

아무래도 피엘은 우성의 실력을 꽤 정확히 알고 있는 듯했다. 현재 우성의 실력으로는 랭커 플레이어라고 말할 수 있는 박윤성을 상대할 수 없음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성은 자세한 이야기까지 할 생각이 없었다. 피엘 한 사람만 있다면 모를까, 안병환까지 있는 자리라서 더더욱 그랬다.

“다 방법이 있지요.”

“그런가? 뭐, 어차피 조금 있으면 보게 되겠지.”

어깨를 으쓱이던 피엘이 바로 맞은편 자리의 전현승에 이어 다른 일행들을 둘러봤다.

“이 놈들인가? ‘대악마’라는 거창한 이름을 쓰고 있는 쭉정이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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