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전쟁은 약속된 시간이라는 게 없다. 어느 한 쪽이 공격을 해야 전쟁이 시작되며, 그것은 미리 예고하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천사와 악마들의 전쟁인 선악공성에서는 기습이라는 일이 거의 없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전쟁이라는 개념보다는 형식적인 싸움에 가까워진 탓도 있었지만, 호전적이고 전투적인 성향의 악마들이나 정정당당을 외치는 천사들이나 기습이라는 방식을 선호하지 않은 이유가 가장 컸다.
아무런 일이 없이 밤이 지나갔다. 날이 밝자 하멜의 동서남북 문을 경계하는 악마들이 더 늘어났다. 해가 밝은 이상, 언제 천사들의 공격이 시작될지 알 수 없었다.
쪽잠처럼 몇 시간을 겨우 잔 우성은 간밤에 전현승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우연치 않게 만나게 된 전현승, 안병환과 꽤 긴 이야기를 나눴다.
‘대천사를 잡아보고 싶습니다.’
전현승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질 않았다. 의외의 결정에 우성은 얼떨결에 안병환과 전현승이 앉아있던 자리에 합석하고 말았다.
사실 이미 전현승의 말을 듣기 전부터 우성은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바로 대천사를 잡기로 말이다.
위험한 도박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마 본래의 우성이라면 이런 결정은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첫째 날 선악공성에서처럼 무난하게 플레이어들과 싸우며 포인트를 획득하는데 집중하겠지.
하지만 우성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대천사를 잡는데 한 팔 거든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것은 우성 스스로의 변화를 인지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이면에는 대천사를 죽이라고 속삭였던 아포피스의 영향이 아주 없다고 말할 수 없었다.
‘확률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니까.’
우성은 대천사를 죽이겠다는 안병환의 계획이 성공할 확률은 반반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총 둘이었다.
첫째로는 천사 진영의 대천사와 마찬가지로 악마 진영에는 마왕이 있다는 점이었다. 어쨌든 대천사가 나서게 되면 악마 진영에서도 마왕이 나서게 될 것이다. 그의 도움을 받는다면 대천사를 잡겠다는 생각이 꼭 허황되지만은 않다.
둘째로는 이미 한 번 대천사의 목을 베었던 피엘의 존재였다. 경험이란 무시할 수 없어, 북쪽 지역에 피엘이 있다는 사실은 우성의 이런 판단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었다.
‘피엘을 만나봐야겠어.’
우성은 일찍부터 일행들이 묵고 있는 막사를 찾아갔다. 혜미와 혜정이 하나의 간이막사를 사용하고 있었고, 전현승과 우성이 하나의 막사를, 그리고 에든과 에릭, 안현수가 하나의 막사를 함께 사용하고 있었다.
우성의 기별에 대악마 클랜이 한 자리에 모였다. 그들 역시 마왕과 대천사의 등장은 소식을 들어 알고있었다. 하지만 붉은악마 클랜에서 대천사를 잡을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성의 입을 통해 처음 듣는 일이었다.
“거기에 참여하겠다고?”
안현수의 말에는 꽤 가시가 돋쳐있었다. 얼굴에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이 적혀있기까지 했다. 오래 전부터 우성과 늘 비슷한 생각과 판단을 내어놓았던 그가 이번엔 우성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너무 위험하지 않나?”
“위험하지. 하지만 성공하기만 한다면, 거기에 따른 보상은 아마 상상하기 어려울 거다.”
“그러겠지. 무려 대천사니까. 마왕님들만큼이나 대단하신 녀석을 잡았는데, 보상이 작다면 큰일이지. 그런데 우성아. 굳이 그런 위험부담을 가질 필요가 있는 거냐?”
안현수의 생각은 항상 우성의 생각과 늘 비슷한 면이 있었다. 우성 역시 안전한 길을 두고 대천사를 잡는다는 모험을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고민에 저울을 기울였다.
아마 7회 차 시절이었다면 길게 고민할 것도 없이 붉은악마 클랜의 제의를 거절했을 것이다. 이미 우성을 포함한 대악마 클랜은 선악공성을 통해 상당한 양의 포인트를 획득한 후였다. 사실 이쯤에서 발을 빼도 손해 볼 건 없다.
“나도 더 이상 어떤 설득을 해야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큰 위험은 없을 거라고 본다. 이쪽에도 마왕이 있고, 이미 한 번 대천사를 잡아보았던 플레이어 피엘이 북쪽 지역에 있으니까.”
“한 번 성공했다고 두 번까지 성공하리라는 법이 있나?”
“없지. 이번엔 그 성공을 우리가 해야지.”
생각한 대로 설득은 해봤지만 안현수는 아직까지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우성의 말이 크게 틀리지 않긴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위험부담이 크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안현수는 한동안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우성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힐끗 우성의 손을 감싸고 있는 아포피스를 보고는 물었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거냐?”
“……없어. 그냥, 나답진 않아도 조금 다른 판단을 내려 본 거다. 도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결국 이것도 우리가 해결할 문제니까. 해 내면 되는 거지.”
‘해 내면 된다.’는 우성의 말에 안현수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지금껏 쭉 이해하지 못하겠다던 표정도 사라지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런 생각이라면.”
“찬성이냐?”
“찬성이고 뭐고, 클랜 마스터는 너잖아? 나야 뭐 네 의견에 따르는 거지.”
감동에 젖은 말을 이어가던 안현수가 다시 한 번 아포피스를 슥 훑으며 말을 살짝 바꿨다.
“그게 완전히 잘못된 길만 아니라면 말이야.”
“……그런 길로는 가지 않아.”
“그래. 당연하지. 믿어야지.”
우성은 안현수가 어떤 점을 걱정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대리인>의 부작용을 가장 오랫동안 곁에서 보아온 사람을 꼽자면 바로 안현수였다. 가장 처음 시작의 마을에서 <대리인>을 사용했을 때도 그렇고, 우성은 항상 그 때마다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곤 했다.
더군다나 그에게는 스킬의 부작용으로 아포피스에세 완전히 자아를 빼앗기게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넌지시 하기도 했었다. 평소 우성과 가장 가깝게 지내고 동시에 가장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만큼 안현수는 우성의 현재 상태를 위험하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안현수의 찬성을 얻어낸 우성은 다른 일행들을 돌아봤다. 그 중에는 전현승 역시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는 이미 간밤에 동의를 얻은 후였다.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 이야기 해주십시오. 참여 의사가 없으신 분은 어제처럼 이 서쪽 지역에서 선악공성을 이어가도 괜찮습니다.”
그 말을 하며 우성은 가장 가까이 있는 혜미와 혜정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다소 실력이 부족하고 ‘전쟁’이라는데 익숙하지 않은 그녀들이 가장 신경이 쓰였다.
이야기를 들으니 그녀들은 어제 벌어졌던 선악공성에서도 다른 때와는 달리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했다. 혜정이야 일행들에게 버프 마법을 걸어주거나 소환 마법으로 명령을 내리면 된다지만, 혜미는 직접적인 마법으로 상대를 공격해 죽여야 하는 입장이었다.
반대라며 손을 드는 일행은 없었다. 이미 대악마 클랜의 마스터인 우성과 부 마스터인 전현승이 동의를 한 상태였다. 이미 대천사를 잡겠다는 계획에는 절반 이상 동의가 되어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괜찮겠어?”
우성이 대놓고 혜미와 혜정을 보고 묻자, 그녀들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괜… 찮겠지.”
“확실하게 대답해. 아니면 짐밖에 안 돼. 사실 북쪽지역은 서쪽지역과는 달리, 랭커 플레이어들도 더 많이 섞여있으니까. 대천사만이 아니더라도 아마 훨씬 더 상대하기가 어려울거야.”
서쪽지역은 엄밀히 말해 가장 분쟁이 적은 지역이었다. 그런 이유에서 안전하다는 생각에 우성은 대악마 클랜의 활동지역을 서쪽으로 택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대천사가 등장한 지역은 영주성이 있는 북쪽이었다. 가장 안전한 서쪽과는 달리, 가장 위험한 지역인 것이다.
굳이 대천사 하나만 보고 판단할 필요도 없었다. 모든 선악공성은 영주성이 있는 지역이 가장 위험한 지역이었다. 군주급 악마와 천사장들, 그리고 박윤성과 같은 수준의 랭커 플레이어가 그곳에서는 몇 명이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정말 괜찮아?”
“괜찮아. 한 번쯤 죽어도…….”
“박혜미. 넌 이미 한 번 죽어봐서 알지 않아? 죽는 게 얼마나 뭣 같은 일인지.”
우성의 물음에 혜미는 몸을 움찔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번씩 아포칼립스에서 죽음을 경험해본 이들이었다.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죽음’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우성, 그리고 전현승 두 사람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더 플레이어’라는 유용한 공간을 통해 그들은 플레이어들이 죽음을 경험할 때 느끼는 고통과 감정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죽는다는 건 생각보다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죽음과 마주 설 때 느끼는 두려움은 이루 말로 헤아릴 수 없었다. 실제로 신규 플레이어들 중 정신력이 낮은 이들 중에서는 한 번의 죽음으로 정신이 나가 폐인이 되는 이들이 생겨날 정도였다.
그런 경험을, 혜미는 정말 선뜻 받아들일 수 있을까? 생명 하나와 적지않은 포인트도 문제였지만, 우성의 생각에 혜미에게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혜미의 정신력은 ‘고통’이라는 부분에서 그리 강하지 못해보였으니 말이다.
“……괜찮아.”
“좋아. 별 말이 없는 걸 보면 혜정이도 마찬가지지?”
“네.”
담담한 대답을 들으니 우성은 한결 마음이 놓였다. 솔직한 심정으로 그녀들이 따라와 주기를 바랐다. 서쪽지역이 더 안전하기야 하겠지만 아무래도 눈에 보이지 않고 거리상으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 괜히 더 불안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다고 내가 지켜주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말이야.’
지금의 정신 상태라면 모를까, 한 번 <대리인>을 사용하고 나면 우성의 머릿속에서 일행의 얼굴은 사라져버린다. 그렇기에 우성은 자신이 혜미와 혜정을 포함한 일행들을 도와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음 <대리인>은 대천사의 등장 직후. 그 전까지는 최대한 아낀다.’
<대리인>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우성의 실력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적어도 2회 차 상위 플레이어들과 견줄만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유체와>와 <광폭화>, <초감각>까지 사용한다면 그보다 더 윗줄의 실력자와 비교할 만했다.
물론 박윤성과 같은 랭커 플레이어에게는 힘든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도망칠 정도는 되었다. 무리해서 적진 너무 깊숙이 들어가지만 않는다면 죽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 붉은악마 클랜의 제안을 수락하도록 하겠습니다. 휴식은 이만 끝내고 저희는 지금부터 곧장 북쪽 지역으로 이동합니다.”
원래라면 이방인들은 한 번 선택한 지역을 벗어날 수 없었다. 서쪽 지역을 전투지로 정하면 허락을 받거나 지원 요청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곳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성을 비롯한 대악마 클랜은 이번 선악공성에서 유일하게 ‘자유’라는 권한이 있었다. 그렇기에 대천사가 등장하거나 하는 변수 상황에 유동적인 선택과 행동이 가능했다.
우성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 뒤를 이어 전현승을 비롯한 일행들도 따라 일어났다. 하멜이 그렇게 큰 영지는 아니었지만 싸움이 다시 시작하기 전에 미리 북쪽으로 가 있을 필요가 있었다.
‘안병환과 피엘도 만나봐야 하고 말이지.’
아직 아침이 일러 우성은 시간이 충분할 것이라 생각했다. 바로 어제, 선악공성의 첫째 날의 전투가 시작된 시간은 해가 중천을 넘어간 꽤 늦은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우성의 예상은 바로 직후,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간이막사 바로 밖에서 굵직한 어느 악마의 외침이 들려온 것이다.
“이방인들은 당장 준비해라! 공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