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허억, 허억.”
우성은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몰아쉬었다. 언제 제대로 숨을 쉬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고, 몇 초 이상 멈춰있던 적이 없었다.
우성의 주위로는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몰려들어 있었다. 처음 열 명 정도의 플레이어들을 정리하자 그 뒤를 이어 다른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우성을 죽이기 위해 모여든 것이다.
‘몇이나 죽였지?’
역시나 숫자 따위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미 우성의 몸은 굳은 피 위에 새로운 피가 뒤집어져 있었다. 사람인 플레이어들의 피와 천사들의 피가 섞여 비린내가 진동했다.
“질긴 새끼!”
뒤쪽에서 달려든 플레이어가 질린다는 듯 소리쳤다. 몽롱한 정신으로 몸을 돌린 우성이 그대로 검을 내리그었다.
쐐액-.
살갗이 베어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대로 몸이 양단된 플레이어는 반으로 베어진 두 개의 몸뚱이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포인트를 획득했다는 문구가 어지럽게 눈앞에 깔려, 우성은 눈을 깜박이며 시야를 살폈다.
“아, 대체 몇 명이나 있는 거야?”
이곳은 전쟁터였다. 악마와 천사, 사람인 플레이어들. 이렇게 세 종족이 뒤섞여 싸움을 벌이는 난장판이었다.
분명 이곳에 있는 악마들은 우성의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악마 진영의 플레이어들 역시 우성의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성은 어느 순간부턴가 집중 공격을 받고 있었다.
‘슬슬 상대하기가 까다로워진단 말이지.’
방금 전 달려들었던 녀석은 비교적 상대하기가 어렵지 않았지만 군데군데 꽤 강한 놈들도 섞여 있었다. 박윤성 정도의 실력자는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준 랭커 플레이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엑시드급 천사들 역시 우성을 노리고 있었다. 그들은 하늘에서 창을 던지는 등, 플레이어들을 도와 우성을 공격했다. 엑시드급 천사들 사이에서도 서열은 나뉘어져 있어 꽤 강한 엑시드급 천사의 공격은 <대리인>을 사용한 우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꿍-!
우성의 정면으로 달려든 플레이어는 거대한 도끼를 사용했다. 그의 도끼를 받아낸 우성은 마치 정진혁과 상대하는 느낌을 받았다. 다른 건 몰라도 도끼에서 전해져 오는 힘 하나만큼은 우성에게 전혀 뒤지지 않은 것이다.
‘그래 봤자, 무식하게 힘만 셀 뿐이지.’
우성은 도끼를 흘려내고 곧장 그의 목을 쳐낼 생각이었다. 정진혁 수준의 플레이어라 해도 지금의 우성에게도 그리 어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오히려 우성이 압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적은 눈앞에 있는 상대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막 도끼를 흘려내려던 찰나, 우성의 위로 창의 소나기가 떨어졌다.
‘젠장.’
그렇지 않아도 시간이 흐르고, 5마리의 나가를 유지하는데 상당량의 마기를 쏟아부은 상태라 정신이 조금 몽롱한 상태였다. 그런데 자꾸만 신경 쓸 구석이 많아지자 우성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우성은 도끼를 흘려내고 플레이어의 목을 치는데 검을 휘두를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몸을 뒤로 빼며 반대쪽에 있던 엑시드급 천사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어딜 등을 보여!”
도끼를 든 플레이어는 고맙게도 크게 소리치며 우성의 등을 향해 도끼를 내려쳤다. 우성은 어느새 얼굴의 웃음기를 지운 채 미간에 주름을 잡고 몸을 돌렸다.
그 때였다.
까앙-!
우성의 등을 노리던 도끼는 중간에 가로막혀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 천사 진영의 플레이어들과 우성의 사이에 끼어든 인물은 꽤 낯이 익은 플레이어였다.
“전현승씨?”
“진짜… 말이 안 나오는 일을 하시는군요.”
전현승의 등에는 어느새 두 쌍의 검은 날개가 펼쳐져 있었다. 일전에 카시엘과의 싸움에서 보여주었던 모습이었는데, 한 쌍이었던 날개가 이제는 두 쌍으로 늘어나 있었다.
<대리인>을 사용한 우성은 한 눈에 그에게서 풍기는 마기를 읽어냈다.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마기가 그의 날개에서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은 우성이 익히 알고 있는 기운이었다.
‘루시퍼의 마기를 빌린 건가?’
두 쌍의 검은 날개. 천사의 날개이면서도 짙은 검은색을 띈다면 루시퍼 외에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또한 전현승은 마검 루시퍼의 사용자이자 그의 계약자이기도 하니, 특수한 스킬을 사용했다 생각할 수 있었다.
아마도 <대리인>과 비슷한 유형의 스킬일 것이다. 우성이 아포피스를 몸에 담았듯, 그 역시 루시퍼의 힘을, 혹은 루시퍼 본인은 몸 안에 담았을 것이다.
“우성씨 덕분에 전세가 순식간에 뒤집어졌습니다. 설마, 플레이어 사십 명을 혼자 묶어두고 있을 줄이야.”
“사십 명…….”
“그 중 절반은 벌써 죽이셨군요.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옵니다. <타락>을 사용한 저도 한 명 한 명을 우습게 볼 수 없는데 말이죠. 혼자서 여기 있는 이들 사십 명을 상대하다니…….”
전현승의 모습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는 달리 엉망이었다. 자잘한 상처가 여기저기 생겨져 있었고, 두 쌍의 날개 역시 베이고 찢어져 있었다.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는데, 그래도 아직 잘 버티고 있었다.
‘사십 명이나 됐나?’
그저 그런 보통 플레이어들도 아니고, 선악공성에 참여할 정도의 실력을 가진 플레이어들이었다. 더군다나 벨제뷔트가 걸린 이번 선악공성의 특성 상 특히나 더 실력 있는 플레이어들로 선별되어 왔을 것이다.
우성은 스스로가 그런 플레이어들을 떼거지로 상대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사십 명이면 이 서쪽 전장에 있는 플레이어들의 사분지 일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시팔, 넌 뭐야!”
천사 진영의 플레이어는 전현승에게 가로막힌 도끼를 다시 번쩍 들었다. 꽤 지치긴 했지만 <타락>을 사용해 루시퍼의 힘을 받아들인 전현승은 그 한 명을 상대하지 못할 정도가 아니었다.
쩌엉-!
맞서 검을 휘둘러 도끼를 막아낸 전현승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찌 막아내긴 했지만 저런 무식한 플레이어와 힘으로 정면 대결을 했다간 손목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이 새끼가 정말?”
“이럴 시간에 얼른 도망이나 가지?”
“뭐?”
“상황 파악을 해라. 니들 눈은 장식이냐?”
전현승의 말에 그동안 우성에게 모여 있던 수십 개의 시선이 분산되었다. 그러자 그 때서야 그들은 돌아가는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안드라스가 죽긴 했지만, 악마 진영에는 군주 급 악마가 애초에 둘이었던 상황이었다. 천사장은 군주 급 악마를 비롯한 악마들에게 밀려 이미 도망간 상태고, 수십 명의 플레이어들이 우성을 상대하고 있는 동안 천사들과 다른 플레이어들은 대부분 죽거나 후퇴하고 있는 상태였다.
지금이야 남아 있는 천사들과 플레이어들이 조금 있어 당장 이곳까지 영향이 오진 않았지만 아마 몇 분 후면 다른 악마들과 플레이어들이 이곳까지 들이닥칠 것이다.
“이런 씨팔…….”
전쟁이 시작되고 고작 한 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상태였다. 보통 반나절 이상 이어지던 전쟁이 이렇게 빠른 시간 내에 끝난 경우는 듣도 보도 못하였다.
그야말로 압도적. 천사들의 대패였고, 악마들의 대승이었다. 그리고 그 1등 공신은 당연히 수십 명의 플레이어들을 붙잡아 두고 있던 우성과 그가 불러낸 5마리의 나가였다.
“시팔, 자리를 뜬다! 후퇴해!”
“지랄, 가긴…….”
엉거주춤 자리를 뜨기 시작하는 플레이어들을 보며 우성이 막 다리를 움직였다. 그러자 그 앞을 전현승의 검이 막았다.
“……뭐 하시는 겁니까?”
“이우성씨. 이제 곧 전쟁이 시작되고 한 시간입니다.”
“그게 뭐…….”
“정신 차리십시오. 이우성씨는 똑똑한 사람이잖습니까?”
전현승의 단호한 말에 우성은 그 말뜻을 알아차렸다.
‘한 시간.’
<대리인>의 지속시간은 고작 한 시간밖에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그 한 시간이라는 시간 안에 모든 일이 정리가 되곤 했지만 전쟁에서 한 시간이라는 시간은 너무나도 짧았다.
전현승을 비롯한 일행에게는 이미 <대리인>에 대해 말해둔 상태였다. 이번 선악공성의 핵심이 되는 스킬이기도 했고, 그 시간 안에 싸움을 멈춰야 한다고 이야기 하기도 했었다. 아무래도 전현승이 우성을 찾아온 이유도 그 때문인 모양이었다.
‘정신이 없긴 했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리인>의 지속시간까지 까먹고 있을 줄이야. 한 번 피를 보기 시작하니 정신을 놓고 말았다.
‘어지럽긴 하군.’
언제부턴가 슬슬 정신을 놓고 있긴 했다. 비록 이전처럼 아포피스에게 자아를 빼앗긴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멀쩡한 정신 상태는 아니었던 것 같았다.
슬슬 <대리인>의 지속시간이 끝나가는 참이라 그런지 눈앞을 물들였던 붉은색이 서서히 옅어졌다. 그러면서 동시에 탁하던 정신이 돌아오며, 우성의 머리를 크게 뒤흔들었다.
-힘든가 보군.
오늘따라 특히 아포피스의 목소리가 많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데 목소리가 머리를 통해 귀에 전달되자,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왔다.
‘전혀.’
-허세 부리지 마라. 아무래도 아직 멀었나 보군. 주인이라고 부르긴 아직 일렀어.
‘안 힘들다니까. 그냥 좀… 어지럽기만 한 거야.’
우성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신경질적으로 땅을 밟았다. 그러자 쿵, 소리와 함께 땅이 조금 갈라졌다.
그 뒤로 아포피스는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대리인>의 지속시간이 끝났다는 알람이 우성의 눈앞에 떠올랐다. 아포칼립스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생명을 잃지 않고 <대리인>을 무사히 넘기게 되었다.
‘이것도 두 번은 못 쓰겠군.’
원래의 계획이라면 <대리인>의 지속시간이 끝나는 즉시 다시금 <대리인>을 사용할 예정이었다. 정신력의 문제가 있어 가능할지 확신할 순 없었지만 140포인트의 정신력 스텟이라면 가능성은 충분히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대리인>은 그런 기대를 완전히 짓밟았다. 두 번도 아니고, 고작 한 번만으로 이렇게 어지럽다니. 더군다나 우성은 자신의 정신이 <대리인>을 사용하기 전과 후로 변화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역시, 이건 너무 위험해.’
우성은 머릿속에 아포피스의 경고가 떠올랐다. 정말 이대로라면 자기 자신을 영영 잃어버릴지도 모르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불쑥 솟아났다. 그렇게 되면 남아있는 생명이 몇 개든 관계없이 아포피스에게 완전히 자아를 빼앗기게 된다.
“이쪽 상황은 슬슬 마무리 됐군요.”
물러가는 천사 진영을 보며 전현승이 중얼거렸다. 그러곤 이게 다 우성의 덕분이라는 듯,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아… 끝났습니까?”
“아뇨. 아직은 아닙니다. 선악공성은 최소 사흘 이상은 진행되거든요. 그리고 이쪽은 끝났라도 동쪽과 북쪽, 남쪽은 아직 싸우고 있을 겁니다.”
서쪽 진영은 비교적… 아니, 엄청 일찍 끝난 편이었다. 전장을 휩쓴 우성과 다섯 마리의 나가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제 고작 하루 차, 그것도 서쪽 진영에서의 싸움이 끝났을 뿐이었다. 아직까지도 북쪽과 남쪽, 동쪽 진영은 한창 싸우는 중이었다.
특히 서쪽 진영은 비교적 플레이어들의 수준이 낮았다. 악마들의 수준 역시 그리 높지 않았고, 천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영주성이 있는 북쪽의 경우에는 마왕이 배치되어 있다는 소리가 있을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서쪽에서의 싸움은 끝났지만 아직 이 선악공성은 반의 반도 채 끝나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아직 긴장을 풀기엔 멀고 멀었다.
“아무튼 여긴 끝난 거죠?”
“네? 네. 그런데요.”
우성의 물음은 마치 한 가지 대답을 바라는 듯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대답하면 큰일 날 것 같아 전현승은 얼떨결에 그렇다고 대답하고 말았다.
아니나 다를까, 전현승의 대답에 우성이 환하게 웃었다. 지금까지 살육에 미쳐 웃던 표정과는 달리, 무척 편안한 얼굴이었다.
“그럼… 저 좀 자겠습니다.”
그대로 우성의 몸이 전현승을 향해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