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지이이이잉-.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순백의 검.
처음에는 하나 둘뿐이라 크게 신경 쓰지 않던 순백의 검은 전장 한복판 일대를 뒤엎을 만큼 수를 늘려갔다. 순백의 검 하나가 날아갈 때마다, 일반 중급 악마들 정도는 단숨에 목과 심장이 꿰뚫리곤 했다.
언뜻 보인 얼굴이라 설마 했는데, 이 순백의 검을 보니 확실해졌다. 수백 자루에 달하는 순백의 검을 소환해 싸우는 천사 진영의 랭커 플레이어, 박윤성이었다.
“이건 웬 냄새나는 소 새끼야?”
박윤성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안드라스를 보며 한 손에 순백의 검을 쥐었다. 무시하는 어투와는 달리, 그는 주위에 퍼뜨렸던 수백 자루의 검을 안드라스를 향해 집중했다.
쉬익, 쉬이이이익-.
사방에 퍼져 있던 수백 자루의 순백의 검이 일제히 안드라스를 노렸다. 한 자루 한 자루가 순수한 신력으로 이루어져 있는 순백의 검은 마기를 다루는 악마들에게 치명적이었다.
아무리 군주급 악마인 안드라스라 하더라도 날아오는 수백 자루의 순백의 검을 무시할 순 없었다. 그는 몸을 숙이고 기다란 손톱을 휘두르며 순백의 검으로부터 몸을 보호했다.
사악, 서걱-.
“큭.”
수백 자루의 순백의 검이 덮쳤지만, 안드라스의 몸에는 자잘한 생채기를 입는 정도가 전부였다. 아무래도 직접 휘두르는 것보다는 위력이 약한데다가 안드라스 역시 군주급의 악마로 자체적인 방어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역시 너도 악마 군주 중 한 놈이구나?”
그 때, 안드라스의 뒤로 박윤성이 나타났다. 양 팔을 휘둘러 순백의 검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고 있던 그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서걱-.
툭-.
살갖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안드라스의 팔이 베어져 바닥에 떨어졌다. 강철보다도 단단한 안드라스의 팔이었지만, 박윤성의 순백의 검은 그 안드라스의 팔을 잘라낼 만큼 날카로웠다.
“크아아아아-!”
“주둥이 냄새 하고는.”
“죽여 버리겠…….”
“그 전에, 내가 죽여 버리면 되지.”
뒤이어 다시금 박윤성이 만들어낸 순백의 검이 안드라스를 덮쳤다. 안드라스의 팔을 베어낸 박윤성은 훌쩍 뒤로 물러난 상태였다.
당장에라도 박윤성을 쫒아 몸을 갈기갈기 찢고 싶었지만, 안드라스는 날아오는 순백의 검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이제는 남은 팔이 하나밖에 없어 안드라스는 손톱을 날카롭게 세우고 팔을 들어 몸을 보호했다.
“너 정말 군주급 악마 맞아?”
푸욱-.
“커억!”
그 때, 안드라스의 가슴을 한 자루의 순백의 검이 꿰뚫었다. 잠시 몸을 피했다 생각한 박윤성이 등 뒤로 돌아 공격해온 것이다.
다른 때라면 검에 찔리지도 않았을 것이고, 설사 찔렸다 하더라도 금방 치유가 됐을 것이다. 안드라스의 능력은 마기나 마력을 이용한 마법이 아닌, 단단한 몸과 빠르고 강력한 손톱을 이용한 육체적인 능력이었다.
하지만 박윤성의 검은 순수한 신력으로 이루어져 있어, 안드라스의 치유 능력을 무(無)로 돌려버렸다. 안드라스는 간신히 고개를 돌려 박윤성을 돌아보고는 날카로운 어금니를 보였다.
“네 이놈…….”
“얼마 전에 만난 하멜의 영주는, 그래도 제법 강했는데 말이야.”
촤아악-.
박윤성이 검을 크게 휘두르자, 안드라스의 가슴에 박혀 있던 검은 그의 머리를 양단했다. 거대한 피분수가 솟아오르는 것을 구경하며 박윤성이 씩 웃었다.
“이 정도면 뭐, 별 것 아니네.”
**
선봉에 서 있던 안드라스의 죽음은 악마 진영에 큰 충격을 가져왔다. 두 개의 거대한 뿔을 가지고 악마들을 이끌던 군주급 악마가 전쟁이 시작됨과 동시에 천사도 아닌, 어느 이방인의 손에 죽어버렸다.
안드라스는 군주 급 악마들 중 최하위 권에 속해 있는 악마였다. 물론 군주급 악마들 중에서나 최하위 권이었지, 악마들 전체로 살펴본다면 무시 못 할 악마임에는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는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수면 아래에 잠들어 있었다. 강인했던 육체는 사용하지 않아 굳어있었다. 현재의 안드라스는 군주 급 악마가 아니라 최상급 악마들과 비교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쉽게 당한 거 아니야?’
멀리서 안드라스의 죽음을 지켜본 우성은 군주 급 악마가 너무 허무하게 죽었다는 것과 박윤성의 실력이 생각 이상으로 뛰어나다는 사실에 놀랐다. 직접 한 번 싸워봤던 만큼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최하위 권이라고는 해도 군주 급 악마를 이렇게 손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그 때는 그냥 가지고 놀았던 건가?’
어쩌면 자신을 상대하던 박윤성이 봐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박윤성의 실력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보여준 모습과 확연히 달랐다.
그 때, 박윤성의 손에 들린 검이 눈에 들어왔다. 그냥 박윤성이 소환한 순백의 검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새하얀 검신의 또 다른 검을 들고 있었다.
‘저건 뭐지?’
우성은 박윤성을 중심으로 상황을 좀 더 살폈다. 플레이어들은 몇몇 최상급 악마들의 지시에 따라 천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사이에서 대악마 클랜은 제외되어 있었다. 따로 볼락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인지 최상급 악마들은 대악마 클랜에는 별다른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싸움은 전체적으로 천사 진영의 우세였다. 악마 진영에도 최상급 악마들을 비롯해 여러 뛰어난 플레이어들이 있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천사장과 박윤성이 있는 천사들을 상대로 승기를 점할 순 없었다.
“언제까지 구경만 할 겁니까?”
지켜만 보고 있던 전현승은 몸이 근질근질 했는지 우성을 보채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안현수 역시 언제부턴가 우성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긴, 천사장 한 명과 박윤성이 위협적이긴 해도 언제까지 지켜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지금 이 상태로 지켜보고만 있다간 아차 하는 사이 서문이 함락당할 위험이 있었다.
“보고 있었으면 조심해야 할 녀석이 누구인지 정도는 아시겠지요?”
“저기 있는 플레이어… 싸우는 스타일을 보니 우성씨가 말씀하셨던 박윤성이라는 플레이어인 모양이군요.”
“네. 저기 있는 박윤성과 천사장은 반드시 피하십시오. 저희가 노려야 할 대상은 그밖에 천사 진영의 플레이어들. 그리고 일반 천사들입니다.”
“군데군데 꽤 실력 있는 플레이어들도 보이는데요?”
“그런 녀석들은 전현승씨가 부탁드립니다. 웬만한 랭커 플레이어들을 제외하고는 다 상대하실 수 있으시죠?”
전현승은 씩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역시 루시퍼가 진(眞) 마검으로 변하고, 새로운 회 차를 맞이한 만큼 예전과 비교하기 힘들 만큼 성장한 상태였다.
우성은 전현승이라면 이번 선악공성에서 충분한 활약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안현수를 비롯한 다른 일행들 역시 한 사람 몫을 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박윤성과 천사장은 조심하시고, 지금부터 전장에 참여합니다. 혹시라도 위험하다 싶으면 지체하지 말고 도망가십시오. 전장을 이탈한다 한들, 저희를 제지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성이 볼락에게 ‘자유’를 원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생존’을 위한 방책이었다. 전장의 이탈은 인간들뿐만 아니라 악마들 사이에서도 즉결처분으로 이어질 수 있는 중죄였다.
하지만 대악마 클랜은 그러한 제약이 걸려있지 않았다. 적어도 이 점에서만큼은 다른 플레이어들이 갖지 못한 최고의 권리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물론, 도망칠 일 따위는 없어야겠지만.’
우성은 아포피스를 들어 올린 채 훌쩍 문 아래로 뛰어 내렸다. 십여 미터가 넘는 높이였지만, 우성의 체력과 맷집 스텟이라면 이 정도는 그리 높지도 않았다.
쿵-.
위에서 올려다보던 전장과는 달리, 직접 아래로 내려와서 보는 전장은 훨씬 더 난잡한 상태였다. 악마들과 천사들, 그리고 사람인 플레이어들이 서로 죽이며 피가 튀었다.
자유롭게 행동하기로 한 우성, 전형승과는 달리 안현수를 비롯한 다른 일행들은 하나의 팀을 짜서 움직였다. 그 때문에 우성과 전현승은 다른 일행들과 떨어져 있었다.
“<광폭화>, <초감각>, <유체화>.”
우성은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엑티브 스킬을 활성화시켰다. <광폭화>의 영향으로 황토색이었던 우성의 몸이 서서히 붉게 물들었고, <유체화>의 영향으로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초감각의 영향은 몸의 변화로 설명할 수 없었다. 온 몸의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들 중 방금 전까지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되었다.
안력(眼力)의 변화라고 할까? 초감각은 몸의 변화보다는, 정신력을 포함한 오감, 그리고 그밖의 새로운 육감의 변화를 가져왔다.
이제 남은 엑티브 스킬은 둘.
바로 <대리인>과 <나가(Naga)>였다.
앞의 세 가지 스킬과는 다르게 이 두 스킬은 포인트를 필요로 했다. 포인트가 필요한 스킬들은 대부분 레어 등급 이상의 특수 직업군에 속했는데, 포인트를 소모하는 만큼 그 위력은 일반 스킬보다 훨씬 뛰어났다.
처음 ‘나가(Naga)’의 경우 우성은 포인트 사용 스킬임에도 불구하고 별로 효율이 좋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반(半) 마검 아포피스였던 시절, 나가의 스텟 비율은 고작 40퍼센트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포피스가 반(半) 마검에서 진(眞) 마검, 그리고 초(超) 마검으로 변화하면서 나가의 효력은 훨씬 강력해졌다. 그리고 얼마 전 확인한 나가는 우성이 기대했던 것 이상의 힘을 발휘했다.
‘<대리인>을 사용한 상태라면 어떨지…….’
우성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선악공성을 위해 준비한 세 개의 물약이 손안에 잡혔다.
‘신성한 정신력의 물약’이었다. 천사장 카시엘의 깃털과 타락한 유니콘의 뿔, 그 외에 여러 재료들이 녹아들어 있는 물약은 우성이 보유하고 있는 정신력을 대폭 늘려주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우성은 손안에 잡힌 세 개의 병 중 하나를 꺼냈다. 보라색으로 빛나는 약병의 마개를 열어, 우성은 단숨에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띠링-! 신성한 정신력의 물약을 복용하였습니다.]
[3시간(180분) 동안 정신력이 50% 상승합니다.]
[3시간(180분) 동안 반사능력이 20% 상승합니다.]
[3시간(180분)동안 고통을 느끼지 못합니다.]
[정신계열의 부정적인 효과가 30% 감소합니다.]
[효과가 끝난 후 정신력이 10% 감소합니다. 이 감소효과는 하루(24시간)동안 지속됩니다.]
우성은 <초감각>에 이어 두 번째 변화를 겪었다. 50퍼센트 상승한 우성의 정신력은 100포인트를 훌쩍 넘어, 140대가 넘어갔다.
100이라는 숫자의 포인트는 랭커 플레이어의 기준이 될 정도로 높은 수치였다. 몇 개의 스텟이 세 자리 수가 되었느냐, 그리고 세 자리 수가 된 스텟이 얼마나 더 높으냐에 따라 랭커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도 그 강함에 차이가 났다.
140대라는 수치의 스텟 포인트는 랭커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도 몇 가지고 있지 않을 만큼 높은 수치였다. 특히나 정신력과 같은 비주류의 스텟은 더더욱 올리는 플레이어가 없었다.
우성은 현재, 그 어느 플레이어도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영역의 감각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거, 잘못하면 취할지도 모르겠군.’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흔히 말하는 중2병 같은 기분이었지만, 이만큼 이 기분을 잘 설명할 순 없었다. 우성은 이 짜릿한 기분에 취해 잠시나마 전쟁 중이라는 사실마저 잊어버렸다.
우성은 더 깊게 취하기 전, 자신의 목표를 상기시켰다. 신성한 정신력의 물약을 복용한 이유는 이번 선악공성에서 <대리인> 스킬을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흘러가면 괜히 아까운 물약의 지속시간만 허비할 뿐이었다.
우성은 아포피스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대리인>을 사용한 순간, 어느 때처럼 아포피스가 극심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우웅, 우우웅, 우우우웅, 우우우우웅-.
-반갑다, 나의 주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