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선악공성 당일 날이 밝았다.
우성을 비롯한 대악마 클랜, 그리고 그밖에 수많은 플레이어들은 하멜의 남쪽 문과 서쪽 문, 그리고 북쪽 문으로 배치되었다. 북쪽의 경우 볼락을 비롯한 악마들이 다수 배치되어 있었고, 워낙에 성을 비롯한 방어가 탄탄해 플레이어들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 중 대악마 클랜은 그 누구도 아닌 자신들의 의사에 따라 서쪽에 가 있었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볼락을 비롯한 악마들의 지시에 따라 위치가 정해졌지만, 대악마 클랜은 볼락의 허가에 따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서쪽의 경우 과거 하멜에서 선악공성이 벌어졌던 당시 가장 많은 전투가 있었던 곳이었다. 우성을 비롯한 모든 플레이어들이 원하는 ‘포인트’를 벌기에 가장 적합한 자리였다.
“저거냐?”
“그래. 포탈이다.”
전현승의 물음에 에든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긴장으로 가득했다.
대악마 클랜을 비롯한 수많은 플레이어들의 앞으로 펼쳐진 광경은 지금껏 우성이 아포칼립스에 있으며 보았던 어떤 장면보다도 장관이었다.
어느 도시의 광장에 가더라도 볼 수 있는 시설이 바로 워프 게이트였다. 하지만 각 도시의 워프 게이트는 그 크기가 고작 3~4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하멜의 서쪽에 모습을 나타낸 포탈은 그 크기가 몇십 미터인지 짐작을 하기가 어려웠다. 삼십, 사십? 오십 미터 쯤 될까? 푸른 안개처럼 모습을 드러낸 포탈은 마치 화이트홀처럼 그 안쪽에서 무수히 많은 천사들을 뱉어내고 있었다.
“천사다!”
천사를 처음 보기라도 하는지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놀란 음성이 터져 나왔다. 하긴, 천사의 존재는 선악공성을 처음 겪는 플레이어라면 생소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성과 전현승을 비롯한 대악마 클랜의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만약 루시퍼의 퀘스트를 겪지 않았다면 천사라는 존재에 생소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만큼 천사라는 존재는 멀고 먼 천사 진영에 있는 존재들이었다.
‘천사와 악마가 만났다.’
선악공성이란 이런 것이다.
전쟁에 참여하는 수많은 천사들. 그리고 자신들의 도시를 지키기 위한 악마들.
그리고 그 사이에 끼어든 플레이어, 이방인들. 그들의 전쟁이 바로 곧 선악공성이다.
어쩌면 이 선악공성이라는 시스템 자체가 오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뜻 보면 무자비한 전면전을 대신할 수 있는 싸움의 방식으로 비춰질지 모르겠으나, 실상 선악공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악마와 천사들의 싸움이 끝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저기 보세요.”
그 때, 우성의 바로 옆에 서 있던 전현승이 포탈을 가리켰다.
거대한 포탈 속에서는 아직까지도 천사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대부분 한 쌍의 날개를 가진 일반 천사들이었지만, 그 사이로는 간간히 두 쌍의 날개를 가진 엑시드급 천사들도 섞여 있었다.
그 중 전현승이 가리킨 천사는 무려 세 쌍의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천사들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천사장’이었다.
“거물이 섞여 있었군요.”
“어찌 보면 당연한 거죠. 이런 싸움에 천사장이 끼어 있는 건.”
천사장이라면 볼락과 같은 수준의 존재였다. 비록 우성이나 전현승이 세 쌍의 날개를 가진 카시엘을 상대했었다 해도, 그는 불완전한 천사장에 불과했다.
불완전하고 노쇠한 천사장인 카시엘이 그 정도라면 온전한 상태의 천사장은 대체 얼마나 강한 힘을 가지고 있을까? 우성은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한 눈에 들어오는 세 쌍의 날개를 가진 천사장을 응시하며 긴장의 끈을 팽팽히 당겼다.
“이제 슬슬 플레이어들도 나오는군요.”
등에 날개를 가지지 않은 플레이어들. 그들은 천사들 바로 뒤에 쏟아져 나왔다.
천사들과는 달리, 플레이어들은 겉으로 보이는 외관상으로는 누가 강하고 누가 약한지 판단할 수 없었다. 천사 진영에서도 이번 선악공성을 중요시 여기는 만큼, 하나하나가 2회 차 플레이어에 버금가는 플레이어라고 봐야 했다.
어쩌면 천사들보다 뒤에 들어오는 플레이어들이 더 위험할지도 모른다. 그 사이사이에는 아마 랭커에 준하는 플레이어들도 섞여 있을 것이다.
서쪽 성문 아래로 포탈을 타고 나타난 수많은 천사들과 플레이어들이 늘어졌다. 그 수가 족히 수천을 헤아려 보여, 한 눈에 그 장면을 내려다보는 이들에게는 가히 장관으로 비춰졌다.
“갑자기 떨리는데.”
“이제 와서?”
“그럴 수도 있지. 저기 있는 놈들이 그 때 만났던 좆밥들도 아니고.”
루시퍼의 퀘스트 당시 천사 진영에서 만났던 플레이어들은 하나같이 수준이 떨어지는 이들이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열렸던 선악공성에 참여하기 위해 웬만큼 수준 있는 플레이어들이 모두 자리를 비웠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반대로 웬만큼 수준 있는 플레이어들 모두가 이 자리에 모여 있었다. 평소 긴장과는 거리가 먼 안현수였지만, 긴장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현수야. 알지?”
“그래. 안다, 알아.”
“우선 목표는 혜미와 혜정이의 보호. 너와 에든씨의 역할은 그거다.”
“벌써 몇 번째냐? 너랑 전현승에게 일을 다 맡기는 게 불편하지만, 어쩌겠냐. 실력이 안 되는데.”
대악마 클랜은 자유를 얻었지만, 나름대로 실력과 직업군에 맞는 역할을 편성한 상태였다.
그 중 우성과 전현승의 역할은 ‘자유’였다. 어떠한 상황이 닥칠 시, 그 상황에 맞는 역할을 수행해 내는 게 두 사람의 몫이었다.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려울 수 있는 역할이었다.
마법사 계열인 혜미와 혜정은 후방 보조를, 그리고 안현수를 비롯한 다른 세 사람은 두 사람의 호위를 맡았다. 그 중 안현수는 에든과 에릭을 비롯한 세 사람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나 공격과 수비를 동시에 담당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조잡하긴 하지만 우성과 전현승은 이 역할이 가장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 선악공성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우성과 전현승 두 사람이었다.
혜미와 혜정이 얼마만큼 보조 역할을 수행해 내느냐도 중요하지만, 우성은 가장 큰 변수를 <대리인>에 두고 있었다. 아직까지 그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하는 만큼, <대리인>을 사용한 자신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에 따라 이번 선악공성의 성과가 달라질 것이다.
“다행히 대천사는 안 보이네.”
플레이어 한 명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포탈 안에서는 어느 누구도 나오지 않았다. 천사장이 한 명 포함되어 있긴 했지만, 그밖에 다른 천사들은 크게 신경 쓸 필요 없어보였다.
더군다나 가장 큰 고민거리였던 대천사급 천사는 보이지 않았다. 천사장이라면 모를까, 대천사가 등장하기라도 하면 서쪽 성이 무너지는 건 순식간일 것이다.
“너무 안심하진 마. 대천사급 천사는 자신의 날개를 숨길 수도 있다고 했으니까.”
“그런 얘기는 어디서 들었냐?”
“있어. 좀 똑똑한 사람이.”
우성에게 대천사에 관한 이야기를 해 준 사람은 바로 피엘이었다. 유일하게 대천사를 죽여보았던 플레이어인 그는 대천사가 자신의 날개를 숨길 수도 있다고 충고해 주었다.
어쩌면 저 속에 대천사 한 명쯤은 숨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긴장의 끈을 놓기엔 아직 일러, 우성은 아포피스를 꽉 움켜쥐었다.
-반가운 얼굴이 보이는군.
오랜만에 들려온 아포피스의 음성.
예전 같으면 깜짝 놀랐겠지만, 이제는 익숙했다. 특히 정신력 스텟이 높아진 후로는 웬만한 일에는 크게 놀라지 않게 된 것 같았다.
‘익숙한 얼굴이라면, 누구지?’
우성은 아포피스를 들어 침착하게 물었다. 악마들의 창세신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이상, 그의 말 한 마디를 흘려들을 순 없었다. 아포피스가 반갑다고 한다면 분명 보통 천사는 아닐 것이다.
-…….
하지만 아포피스는 그 뒤로 대답해 주지 않았다. 우성 혼자서 답을 구해보라는 듯, 아포피스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혹시라도 아포피스를 통해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했던 우성은 곧 한숨과 함께 실망을 내뱉었다. 하긴, 언제 한 번이라도 아포피스가 자신이 원하던 대로 따라주었던가.
‘기대한 내가 바보지.’
혹시 아포피스가 말한 ‘익숙한 얼굴’이 저기 있는 천사장일까? 아니,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정말 피엘의 말대로 저 사이 어디엔가 ‘대천사’가 한 명쯤은 숨어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벨제뷔트가 있던 장소에서 미카엘의 분신과 조우한 아포피스는 그를 꽤 반가워했다. 아포피스는 가브리엘이라는 대천사와 미카엘, 루시퍼 등 대천사들에 대한 이야기 또한 꽤 아는 듯했다.
‘긴장해야겠군.’
대천사라면 영주성이 있는 북쪽으로나 가지, 왜 서쪽으로 왔겠냐마는 우성은 긴장을 풀 수 없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방금 전 아포피스의 음성을 들으며 조금 마음이 놓이는 게 사실이었다.
으르르르르르-.
그 때, 악마들이 모여 있는 서문에서 거대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옆에 있기라도 하듯 가까이 들리는 울음소리에 우성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볼락과 마찬가지로 허리까지 내려오는 거대한 긴 뿔을 지닌 악마가 서 있었다. 지금까지 만난 군주 급 악마인 볼락이나 할파스와는 달리, 그는 작은 몸집에도 불구하고 늑대를 닮은 짐승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드디어 다 모였군, 비둘기 새끼들.”
그는 바로 군주 급 악마 중 하나인 안드라스였다. 군주 급 정도 되는 악마들은 인간과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는 특이하게도 인간과 짐승을 섞어놓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안드라스는 이번 하멜에서 진행되는 선악공성을 돕기 위해 멀리 드루드먼에서 찾아온 악마였다. 오랜 시간 동안 악마들 사이에서도 잠적해 있던 그는, 볼락의 연락으로 인해 수십 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온 상태였다.
어떠한 이유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그가 이번 선악공성에 참여하게 된 이유는 당연히 ‘성마검 벨제뷔트’때문이었다. 벨제뷔트라면 어떤 악마라도 존경해 마지않고, 그 힘 역시 이미 수천 년 이전부터 검증되어 온 마왕이었다.
사탄이 사라진 지금, 디아블로와 함께 최강의 마왕으로 꼽히는 그가 천사들의 손에 넘어간다면? 팽팽하던 저울주가 천사들의 방향으로 기우는 건 순식간이었다.
“어디 한 번, 오랜만에 비둘기 고기 맛 좀 볼까?”
크아아아-!
안드라스는 거대한 아가리를 쩍 벌리며 포효했다. 그와 동시에 허리 아래로 내려가 있던 그의 뿔이 활처럼 휘어 머리 위로 올라왔다.
거대한 두 개의 뿔이 하늘을 뚫을 듯 뾰족하게 솟아올랐다.
“천한 것들아! 심장이 뚫리고, 목이 잘릴 각오로 나서라! 천사들의 날개를 찢고, 피로 목욕해라! 비둘기들에게 악마들의 잔인함을 각인시켜 주어라!”
“크아아아아아-!”
안드라스의 외침에 악마들이 비명으로 화답했다. 서문의 가장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악마들이 십여 미터를 훌쩍 뛰어 내렸다. 이 전쟁은 이름이 ‘공성’일 뿐, 어차피 날개를 가진 천사들을 상대로 수성과 공성은 큰 의미가 없었다.
“드디어 시작됐군.”
“그러게.”
우성은 천사들을 향해 달려 나가는 악마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당장에라도 저 틈에 끼어들어 천사 진영의 플레이어들을 죽이고, 포인트를 빼앗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일단 지켜본다. 천사장이 있고, ‘대천사’가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식하게 달려들었다가 어떤 화를 입어야 할지 모른다.
악마들의 선두로는 두 개의 거대한 뿔을 가진 안드라스가 앞장서 있었다. 그의 뿔과 날카로운 손톱은 벌써부터 근처를 스쳐 지나간 천사 서넛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그 때, 멀리서 안드라스를 지켜보고 있던 우성의 눈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