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악마와 천사들의 전쟁이라고 해봤자 실상 그 구조는 인간들의 전쟁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마왕과 군주들, 최상급 악마와 상급 악마, 그리고 중급 악마로 이루어져 있는 악마의 계급.
한 쌍의 날개를 가지고 있는 일반 천사와 두 쌍의 날개를 가지고 있는 엑시드급 천사, 세 상의 천사장, 네 쌍의 대천사급의 천사로 나뉘어져 있는 천사의 계급.
일정한 계급이 나뉘어져 있는 만큼 전쟁 시에는 그 구조에 맞추어 상하관계가 나누어졌다. 그리고 그 모습은 인간들의 전쟁에서 장군과 병사처럼 명령을 내리고 받는 관계로 이어졌다.
물론 인간들의 전쟁처럼 체계적이지는 않았다. 천사장이 있고 군대라는 개념이 도입되어 있는 천사들이 인간들과 좀 더 가깝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들의 병법을 따온 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군주급 악마와 마왕, 천사장과 대천사.
이들은 한 개개인만으로 전쟁의 판도를 뒤엎을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개인으로서 명확한 한계를 지닌 인간들과는 달리, 그들은 일당 백, 일단 천, 일당 무한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들의 병법은 그들에게 필요하지 않고, 맞지도 않았다. 그 때문에 악마와 천사들은 자신들만의 전쟁을 터득했다. 그것이 현재의 악마와 천사들의 계급 체제이며, 선악공성이었다.
“이렇게 쉽게 허락을 받을 줄은 몰랐는데.”
우성의 요구는 ‘자유’였다. 어찌 보면 A+등급 퀘스트의 보상으로 요구하기에는 지나치게 보잘 것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이 세계의 악마들과 천사들은 이방인, 즉 플레이어들을 구속하지 않았다. 그것은 악마와 천사들의 계급과는 관계없이 동일했다. 설사 루시퍼와 같은 마왕급의 악마라 하더라도 이방인이라는 존재를 하급 악마처럼 구속하고 억압하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 이방인은 기본적으로 자유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자유가 유일하게 깨어지는 장소와 시기가 바로 선악공성이었다. 유일하게 그곳에서만큼은 모든 행동에 각 진영의 제약을 받았다.
이기기 위한 싸움이기 때문에 당연했다. 아무리 인간들처럼 병법에 의한 체계가 되어있지 않다고 해도, 개인행동은 금물이었다. 그것은 역시 악마들과 천사들이 부르는 ‘이방인’이라는 존재들에게도 통용되는 말이었다.
7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클랜이라지만, 볼락의 허락이 이렇게 쉽게 떨어진 건 확실히 의외이긴 했다.
“그만큼 우리가 해결한 퀘스트가 중요한 일이었던 거겠지. 이번 전쟁의 핵심인 벨제뷔트를 구해왔던 거니까.”
우성의 중얼거림에 막 볼락의 방에서 나온 안현수가 답했다. 볼락과 이야기를 끝마치고 나자 드디어 선악공성이 와 닿기 시작했는지 그의 눈빛은 문을 들어가기 전과 달라져 있었다.
“뭐, 아무튼 우리가 생각하던 첫 번째 과제는 완료한 것 같네.”
“이젠 선악공성에서 대량의 포인트를 얻어낼 일만 남았지.”
애초에 플레이어들에게 선악공성은 다량의 포인트를 획득하기 위한 파티장이나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우성을 비롯한 일행은 선악공성에서 규칙에 얽매이지 않음으로서 활동할 수 있는 범위가 훨씬 늘어났다.
그것은 다른 플레이어들에 비해 한 단계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고 봐야했다.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은 즉, 그만큼 포인트를 자유롭게 획득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뭐, 그것도 우리가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 달렸지만.’
아무리 선악공성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지만 정작 아무것도 못하고 죽으면 오히려 아까운 라이프만 잃게 된다. 포인트고 뭐고, 손해만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자유’라는 이름에 취해 생각 없이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지금부터라도 선악공성에서 살아남고, 보다 많은 천사들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할 필요가 있었다.
‘남은 시간은 50일 남짓.’
그리고 현실에서는 닷새.
선악공성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
“상태.”
[플레이어 정보]
이름 : 우성
직업 : 아포피스의 대리자
국적 : 대한민국
진형 : 악마
성별 : 남자
칭호 : 천사를 베는 검
클레스 : SS
[능력치]
- [근력 : 71] [민첩 : 72] [체력 : 83] [맷집 : 64] [반사능력 : 59] [마력 : 78] [정신력 : 91] [마기 : 48] [PP : 1860]
: (- 1100p)
* 플레이어 특성 : 불굴의 의지 Lv.11 <상세정보>
* 업적 : 마왕의 길을 이끈 자, 숲의 입구를 열다, 개미소굴을 소탕하다, 대천사의 씨앗을 제거하다, 대천사의 분신을 제거하다.
* 포인트 : 11185p
* Lv. 포인트 : 1550
* Life : ******
선악공성이 시작되기 열흘 전.
우성은 대여 수련장에서 마지막으로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이후 남은 열흘간은 현실에 다녀오며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다.
새삼스럽게 열어본 우성의 능력치는 고 회 차 플레이어에게 전혀 뒤지지 않았다. 가장 기본이 되는 근력과 민첩, 마력, 체력 스텟만 하더라도 웬만한 2회 차 플레이어와 비교될 만했다.
더군다나 특수 스텟이라고 할 수 있는 ‘마기’ 스텟으로 인해 우성은 다른 2회 차 플레이어 이상의 폭발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90포인트가 넘는 정신력 스텟 덕분에 특수한 상황에서 평소 실력을 배 이상 끌어낼 수 있기도 했다.
‘거기에 여러 사기적인 패시브 스킬과 엑티브 스킬도 있으니.’
<마검술>, <절대적인>, <나가>, <대리인>, <광폭화>, <초감각>, <유체화>
패시브 스킬이자 직업 특성이기도 한 <마검술>과 <절대적인>은 그렇다 쳐도, 다른 엑티브 스킬들은 하나같이 우성의 능력을 두 배 이상 끌어내 주었다. 무엇보다 아포피스가 초(超) 마검으로 바뀌며 ‘나가’와 <대리인>은 그 스킬 능력이 한층 더 강해져 있었다.
과연 지금의 상태에서 불러내는 나가는 얼마나 강력할까? <대리인>을 사용하면, 얼마나 더 강해지는 걸까?
우성은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신성한 정신의 물약’을 만지작거렸다. 이것을 복용한 상태로 <대리인>을 사용하면, 최소한 아포피스에게 완전히 자아를 먹히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무엇보다 가장 기대하는 건…….
‘<대리인>을 사용한 상태에서 ’나가‘를 불러내면, 어떻게 될까?’
우성은 카시엘을 상대하며 처음 ‘나가’를 불러냈을 때를 떠올렸다.
그 당시 나가의 능력치는 우성이 가지고 있는 스텟의 60퍼센트를 물려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PP스텟으로 인한 15퍼센트의 추가 스텟과 사기적인 마법저항력, 방어력으로 인해 나가는 웬만한 3회 차 플레이어에 버금하는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충분히 나가는 쓸 만했다. 포인트를 소모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 정도 패널티는 감수할 만했다.
더군다나 지금 아포피스가 초(超)마검으로 진화한 이상, 나가는 더 강력해졌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나가’가 <대리인>의 영향을 받을까? 확신은 할 수 없지만,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그렇게만 된다면…….
‘대박이지.’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만한 대박도 없었다. 우성 개인 혼자만의 능력으로 전장을 뒤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포피스를 검의 형태로 바꾸어 한참을 바라보던 우성이 초점을 좀 더 뒤로 향했다. 그곳에는 아까부터 자신과 대치하고 있던 전현승이 서 있었다.
“생각은 다 끝났습니까?”
“네. 기다려 줘서 감사합니다.”
“저도 그럴 때가 종종 있으니 괜찮습니다. 루시퍼도 가끔이지만 저에게 말을 걸곤 하거든요.”
아무래도 전현승은 아포피스가 우성에게 말을 걸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이야기를 들어 보면 루시퍼는 전현승에게 말을 거는 경우가 꽤 있어보였다.
처음 아포피스가 초(超) 마검으로 바뀌었을 때에는 아포피스의 목소리가 꽤 자주 들려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경우는 점점 더 줄어들고 있었다. 특히 할파스의 이야기를 듣고 아포피스의 정체를 알고 난 뒤에는 단 한 번도 아포피스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아포피스의 목소리야 선악공성에서 <대리인>을 사용하게 되면 듣게 될 것이니까.
“우성씨와 대련도 참 오랜만이군요.”
“그렇습니까? 그렇게 오래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요.”
“뭐, 현실의 시간으로 보면 두 달도 안 되겠지만… 저희는 현실보다는 이곳 세상에 사는 사람들 아닙니까? 오래 된 게 맞죠.”
전현승의 말에 우성은 반박할 수 없었다.
살아가는 시간으로만 보면 현실은 아주 잠깐,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을 아포피스에서 살아간다. 전현승의 말대로라면 이곳 아포칼립스가 바로 현실이다.
“……그렇군요.”
“그동안 꽤 강해졌다고 들었습니다.”
“누가 그럽니까?”
“안현수씨가요. 전에는 그래도 싸울 만 했는데, 요즘엔 도저히 못 이기겠다고 하더군요. 실은 바로 어제 안현수씨와도 대련을 해봤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강하시더군요.”
안현수의 실력이야 자주 대련을 하는 만큼 우성이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지금의 안현수라면 에든보다 강하면 강했지, 약하지는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용을 불러낸 상태의 안현수는 카시엘에게 일격을 먹일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진다. 더군다나 직업과 가장 잘 어울리는 신룡창(神龍槍)이라는 무기를 얻은 안현수는 호랑이의 등에 날개를 달고 있는 격이었다.
“그 친구가 워낙 겸손해서 그럽니다.”
“안 그래 보이던데요?”
“……네. 제대로 보셨습니다. 현수가 겸손한 친구는 아니죠. 그냥…….”
치이이이-.
우성의 검에 새까만 아우라가 맺혔다. 마력과 마기가 섞여들며, 마검의 주위를 감싸기 시작한 것이다.
“그냥, 제가 강한 겁니다.”
“기대하겠습니다.”
전현승 역시 잠시 내려놓았던 마검 루시퍼를 들어올렸다. 예전과는 달리 우성의 실력을 인정하는 듯, 그의 검에는 푸르스름한 마력과 검은 마기가 동시에 어리기 시작했다.
“저 역시, 전과 같을 거라고 생각하시면 큰일 날 겁니다.”
“당연하죠.”
우성이 7회 차의 저 회 차 플레이어였지만 전현승 역시도 5회 차밖에 되지 않았다. 짧은 시간 동안 이만한 성장을 보여준 만큼, 전현승 또한 하루가 다르게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더군다나 우성의 검이 한 단계 성장한 것처럼 전현승의 마검 또한 한 단계 성장해 있었다. 아포피스가 한 단계 더 성장했다고 자신하다가는 큰 코 다칠 수 있었다.
‘<대리인>까지는 무리겠지만…….’
우성은 이기고 싶었다.
아니, 이기진 못하더라도 가능하면 눈앞에 있는 플레이어인 전현승과 대등한 싸움을 펼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가(Naga) 소환.”
딱 한 번.
어차피 선악공성이 시작되기 전, 새롭게 변한 나가의 힘을 시험해 볼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우성은 결국 저지르고 말았다.
[400포인트를 소모하였습니다.]
[‘마기’ 스텟을 측정합니다.‘
[PP스텟 포인트를 측정합니다.]
[15%추가 능력치 상승 보정을 받습니다. 나가의 스텟 능력치가 플레이어 스텟의 95%로 조정됩니다.]
[나가(Naga)를 소환합니다.]
아포피스의 검붉은 검신에 파란 문양이 떠올랐다. 이전, 카시엘과의 싸움에서 우성이 불러낸 나가를 보았던 전현승은 막 달려들려던 차에 헛웃음을 지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때 그 소환물입니까? 꽤 쓸 만하긴 했지만 그 정도 소환물은 별 도움이…….”
일전에 보았던 나가를 떠올리며 피식 웃던 전현승의 입가가 서서히 굳어갔다. 아포피스의 작은 마법진 사이에서 튀어나온 나가의 모습이, 그가 기억하던 모습과 많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건 대체 뭡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