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선악공성>
일행은 라몬의 안내를 받아 성을 올랐다. 처음 하멜의 성을 보았을 때는 그렇게 커 보였는데, 다크듐의 신전에 다녀온 직후라 그런지 하멜의 영주성은 그리 큰 느낌은 나지 않았다.
악마들은 높은 곳을 좋아한다. 그렇기에 다크듐의 신전에 거주하고 있는 할파스나 하멜의 영주인 볼락은 그 도시에서 가장 높은 건물의 최상층에 거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다크듐의 신전에 비해서 낮다고는 하지만 하멜의 영주성 역시 제법 높은 편이었다. 족히 십 분 가까이 계단을 올라 영주성의 최상층에 도착한 일행은 라몬의 안내에 따라 곧장 볼락의 방을 찾을 수 있었다.
기다릴 것도 없이 곧장 한 도시의 영주이자 악마 군주이기도 한 볼락을 만날 수 있다고 하자, 우성은 속으로 볼락이 참 한가하다고 생각했다. 하긴, 어느 간 큰 악마가 겁 없이 악마 군주를 알현하기를 청할 것이며 어느 플레이어가 무슨 볼 일로 그를 만날 일이 있을까? 일이 없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했다.
“볼락님. 손님이…….”
“뜸들이지 말고 빨리 들여보내라.”
정말 심심하기라도 했던 것일까? 볼락의 대답은 라몬의 말에 다 끝나기도 전에 들려왔다. 허락이 떨어지자 라몬은 지체하지 않고 문을 열고 일행은 안으로 들여보냈다.
가장 앞에 서 있던 우성을 비롯한 일행이 안으로 들어갔다. 전에는 우성과 안현수, 혜미와 혜정, 그리고 에든까지 다섯 명이서 들어갔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일행이 더 늘어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군.”
영주실 안으로 들어가자 볼락은 이전처럼 서류를 가득 쌓아 올린 채 앉아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새하얗던 얼굴은 피로 때문인지 수척해 보였는데, 아무래도 천장에 닿을 듯 가득한 서류들 때문일 것이다.
“……바빠 보이십니다.”
속으로 ‘악마 군주도 참 심심하겠구나.’하며 생각하고 있던 우성은 바로 그 생각을 고쳐먹었다. 적어도 볼락은 지금까지 우성이 본 어느 누구보다 제일 바빠 보였다.
“그러게 말이다. 일단 좀 앉지.”
이럴 거면 대체 왜 먼저 들어오라고 한 걸까? 그렇다고 들어오라고 한 걸 일이 끝날 때까지 나가 있겠다고 할 수도 없어, 일행은 먼저 볼락이 가리킨 소파에 앉았다.
모든 일을 다 끝내려던 건 아니었는지 볼락은 보고 있던 서류 한 장을 마저 끝내고는 일행이 앉아있는 소파로 다가왔다. 가장 중앙의 상석에 힘없이 털썩 주저앉는 모습은 그가 과연 악마들의 군주 중 한 명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인간적이었다.
“요즘만큼 일이 많았던 적도 드물구만.”
“저번에도 비슷한 모습이셨던 것 같습니다만.”
처음 영주성을 방문했던 때의 기억을 되살린 우성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볼락은 그 당시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 때도 이상했지. 원래 이렇게 바쁘지는 않은데 말이야. 너희가 찾아 올 때마다 왜 이렇게 일이 많은지 모르겠어.”
“선악공성 때문이 아닙니까?”
“아, 그렇지. 그 이유가 있었군. 짜증나는 천사 녀석들. 왜 많고 많은 도시들 중 하필이면 하멜을 지목해서 이 고생을 시키는지.”
선악공성은 악마와 천사들간의 가장 큰 축제이자 전쟁이었다. 매번 공성의 장소가 바뀌는 만큼, 지목된 도시의 주인은 골치 아플 수밖에 없었다.
전쟁에는 필요한 물자가 많았다. 또한, 도시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많은 전력이 필요했다. 아마 볼락 역시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긴 했지만 속이 꽤 타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선악공성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래서 이 고생이지. 인근 악마 군주들과 더불어 그나마 연락이 닿는 마왕님들에게까지 부탁을 하고 있으니. 마왕님께서 직접 나서 주신다면 좋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많이 없으니 다른 군주들에게 기대를 걸어 봐야지.”
아무리 플레이어들의 수가 많고 상위 랭커의 플레이어라 하더라도 한계는 있는 법이었다. 수십 명의 그저 그런 플레이어 한 명보다는 한 명의 악마 군주가 훨씬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또한 마왕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마왕 한 명의 힘은 이런 하멜의 도시 하나쯤은 순식간에 쓸어버릴 수도 있었다. 플레이어들 중 최강으로 꼽히는 피엘 정도가 아니고서야 악마 군주나 마왕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볼락님께서도 천사들이 왜 하멜을 선악공성 장소로 지목했는지는 알고 계시겠죠?”
“모를 수가 없지. 몰라서도 안 되고.”
지친 듯 소파에 몸을 묻고 있던 볼락의 표정이 살아났다. 지친 중에도 천사들에 대한 분노는 더 커진 모양이었다.
새삼 일거리를 늘렸다는 이유로 이렇게까지 천사들을 증오하는 모습이 악마가 아닌 인간답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른 악마 군주였던 할파스나 마왕급의 악마이자 타락천사인 루시퍼와는 다른 모습 때문인지 우성은 볼락이 꽤 편했다.
“성마검(聖魔儉) 벨제뷔트. 천사들이 노리는 건 이 검이겠지.”
우웅, 우우웅-.
볼락이 허공에 대고 손을 젓자, 잠깐 일그러진 허공에서 기다란 검이 튀어나왔다. 검집이 존재하지 않는 회색빛의 검신은 지금까지 보아온 마검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띄고 있었다.
“이게… 벨제뷔트?”
성마검 벨제뷔트를 처음 눈으로 본 전현승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지금껏 우성에게나 에든에게나 이야기로만 들었지 실제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사탄이 사라진 지금, 벨제뷔트는 엄연히 악마들 사이에서 최고악(最高惡)으로 인정받은 마왕이었다. 가진바 힘만 놓고 본다면 태초악(太初惡)인 디아블로조차도 그에게 한 수 접어줄 만했다.
그런 만큼 벨제뷔트의 검은 현존하는 모든 플레이어들이 노리는 최상급 장비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지금에는 성검도 마검도 아닌 상태라 그 효과가 미미하지만 말이다.
“정확히는 그분의 검이지. 지금이야 마검도, 성검도 아닌 상태이긴 하지만.”
“그런데 색이 조금 달라진 것 같군요. 제 착각입니까?”
처음 보았던 성마검 벨제뷔트는 완전한 회색빛을 띄고 있었다. 그것은 새하얀 검신의 성검과 새까만 검신의 마검이 섞인 형태의 색이었다.
지금 역시 회색빛이긴 했지만 어쩐지 처음보다는 조금 더 어두워진 느낌이었다. 조금 정도라면 착각인가 싶겠지만, 눈에 띄게 변화한 색에 우성이 의문을 달았다.
“아니. 제대로 봤다.”
우성의 지적에 볼락은 손가락으로 검신을 쓰다듬었다. 날카로운 검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자, 볼락의 손가락에서 빨간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날카롭군요.”
“그래. 예전보다 훨씬 날카롭고, 단단해졌지. 그리고 가지고 있던 신력을 밀어내고, 마기가 검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벨제뷔트님께서… 다시 악마로 돌아오고 있다는 겁니까?”
“아직 악마라고 볼 수는 없지만, 천사보다는 악마에 더 가깝긴 하겠군.”
처음 성마검 벨제뷔트를 발견했을 때, 볼락은 벨제뷔트가 천사들의 편으로 돌아설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그 당시의 벨제뷔트는 악마와 천사의 중간 기로에 서 있던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성마검 벨제뷔트의 신력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더불어 가지고 있던 마기가 증폭되며, 벨제뷔트가 서서히 악마가 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아직 안심할 순 없지. 그래봤자 큰 차이는 아니니. 예전처럼 천사들 손에 이 검이 들어갔다간, 어떻게 될지 몰라.”
최고악을 자신들의 편으로 만든다. 그것이 바로 천사들이 계획하는 가장 큰 목표였다. 가장 강한 악마를 제거하고, 반대로 자신들의 편으로 만들 수 있다면 천사와 악마들의 전쟁은 단숨에 판도가 뒤집힐 수 있었다.
“이번 선악공성은, 사실상 영지가 아닌 이 검을 지키는 싸움인 거지.”
빼앗긴 영지는 되찾아 올 수 있다. 실제로 선악공성에서 빼앗긴 영지를 되찾거나, 빼앗은 영지를 다시 빼앗기는 경우는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루시퍼가 그러하듯, 한 번 돌아선 악마나 천사를 다시 되찾아 오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대천사였던 루시퍼가 악마들에게 넘어옴으로써 바뀐 전황을 생각해 보면, 벨제뷔트의 회개(悔改)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나저나 못 보던 얼굴들이 있군. 그 중에는… 꽤 반가운 이방인도 있고 말이야.”
“저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루시퍼라면 비록 천사였긴 했어도, 우리 군주들 모두가 인정하는 존재니까. 머지않아 곧 진짜 악마가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까지 들리더군.”
비록 검을 대놓고 드러내고 있긴 하지만 볼락은 전현승이 마검 루시퍼의 사용자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우성의 검이 아포피스의 검이라는 걸 알아채기도 했었지만 우성은 새삼 악마 군주들의 안목에 놀랐다.
“아마 곧 그렇게 될 겁니다.”
“그러겠지. 정말 신기하고 기구한 일이야. 그분과 루시퍼, 둘의 검이 이런 식으로 만나다니…….”
“네?”
볼락의 중얼거림이 잘 들리지 않아 우성이 되물었다. 그러자 볼락은 예의 거짓 미소를 지어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 나는 왜 찾아왔지?”
“부탁 드릴 게 있습니다.”
“부탁이라… 그래. 이 검을 찾아왔을 때, 분명 너희에게 한 가지씩 부탁을 들어 주겠다 했었지. 여기 있는 이방인은 이미 나에게 그 기회를 사용했지만 말이야.”
볼락이 자신을 가리키며 말하자 에든은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검이 바로 볼락의 보고에 있던 장비였다.
“그럼 너희 네 명에게 기회가 남아있구나. 그래, 어떤 부탁이더냐?”
“이번 선악공성의 지휘권이 볼락님에게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 내가 이곳의 영주니까.”
선악공성에는 악마군주를 비롯해 간혹 마왕이 참여하곤 했다. 하지만 속사정이야 어떨지 몰라도 선악공성의 지휘권, 그리고 모든 결정원은 그곳의 영주에게 있었다.
그리고 이곳 하멜의 영주는 볼락이었다. 벨제뷔트가 걸려있는 만큼 그 어떤 때보다도 대대적일 수밖에 없는 선악공성의 결정권이 그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방인들의 참전 권한에 제한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원래라면 볼락님 밑에 있는 다른 상급 이상의 악마들이 이방인들을 선별한다고요.”
“그렇지. 그리고 내 눈에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 셋은 탈락이야.”
혜미와 혜정, 그리고 마지막으로 에릭을 가리키며 볼락이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 에릭을 가리킬 때는 조금 고민하는 듯했으나, 결국에 제외 대상에는 그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전현승이나 안현수, 에든이야 워낙 실력이 뛰어나다 보니 걸리지 않았지만, 세 사람은 아니었다. 혜미나 혜정 같은 경우에는 아무래도 동 회 차 플레이어에 비해서는 실력이 뛰어났지만, 우성이나 안현수와 같이 사기적인 스텟을 보유하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에릭까지 걸러진 건 의외였다.
“꽤 빡빡하군요.”
“그럴 수밖에. 이번 선악공성은 어중이떠중이는 안 받을 생각이니까.”
대천사들까지 참전할지 모르는 싸움이었다. 확실히 어중간한 실력을 가진 플레이어는 받지 않겠다는 볼락의 말도 이해가 갔다. 에릭 정도라면 플레이어들 중에서도 상위권을 차지하고도 남을 텐데도 탈락되는 걸 보면,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닌 모양이었다.
“……먼저 부탁 하나는 대악마 클랜 모두가 이번 선악공성에 참여하게 해 달라는 겁니다.”
“그 정도는 허락하지. 단, 이방인 한 명을 통과시키는데 하나의 부탁이 필요해. 그만큼 이번 선악공성은 중요하다.”
볼락의 기준에서 통과되지 못한 사람은 혜미와 혜정, 에릭. 총 세 사람이었다. 볼락에게 부탁할 수 있는 기회는 총 네 번으로, 그 중 단번에 세 번을 날려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가장 중요한 부탁은 한 번의 기회면 충분했다. 우성은 일행들과 잠깐 이야기를 나눈 후, 세 사람의 부탁을 사용해 대악마 클랜 전원이 선악공성에 참여하도록 허락받을 수 있었다.
“그럼 다음… 아니, 마지막 부탁은 뭐지?”
“선악공성은 몇 가지 규정이 정해져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 이건 전쟁이니까.”
악마든 천사든 인간이든, 전쟁에는 반드시 규정을 통한 질서가 필요한 법이었다. 그것은 종족을 떠나 당연했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악마들의 입장과는 달리, 우성을 비롯한 플레이어들에게 이것은 반쯤 ‘게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목적은 당연히 ‘포인트’의 습득.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저희는, 그 규정에서 자유롭기를 원합니다.”
질서 따윈 필요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