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행정 업무를 담당하던 악마인 파슬릭이 사라져버리자 우성을 비롯한 일행은 그 자리에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 여기까지 온 이상, 클랜 신청에 대한 확답은 받아야 했다.
“대체 언제 오는 거지?”
“그러게요. 한 시간은 지난 것 같은데 말이죠.”
전현승은 우성의 중얼거립에 답하며 뒤쪽에 있는 플레이어들의 줄을 바라봤다.
어림잡아 마흔 명은 넘어보이는 플레이어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클랜에 관련된 업무를 보고자 기다리고 있었다. 일행처럼 클랜 창설을 하기 위해 온 사람도 있었고, 클랜의 업적을 기록하기 위해 온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담당하는 악마가 사라져버리니 그런 것들을 처리할 수가 없었다. 한 마디로 일이 마비가 되어버린 것이다.
“원래 여기가 일 처리를 이렇게 하는 데가 아닐 텐데…….”
몇 번 다크듐에 와 봤던 에든은 다크듐의 신전아 일 처리가 확실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벌써 한 시간째 이렇게 자리를 비우고 있으니,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담당 악마가 사라진 게, 전현승과 우성씨의 마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직후인데. 관련이 있는 건가?’
에든은 우성과 전현승이 들고 있는 무기를 힐끔 바라봤다.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마검이 가지는 의미 역시 가볍지 않지만, 오히려 그 의미가 더 각별한 쪽은 악마들이었다. 플레이어들에게 마검은 성능이 뛰어난 장비였지만, 악마들에게는 그것이 마왕의 분신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저기 왔네.”
그 때, 내내 신전 안쪽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에릭이 손가락을 들었다. 그곳에는 파슬릭을 비롯한 한 명의 악마와 플레이어 한 명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담당 악마는 그렇다 치고… 저 녀석은 뭐지?”
“……뿔 크기 장난 아닌데. 군주급 악마인가?”
“신전에 있는 군주급 악마면 할파스? 아니면 아스타로스?”
다크듐의 신전에서 알려져 있는 군주급 악마는 둘이었다. 바로 신전의 최상층에 있다는 할파스와, 그 할파스와 긴밀한 관계에 있는 아스타로스.
할파스도 할파스지만 아스타로스는 준 마왕급의 악마로 알려져 있었다. 어쩌면 군주급 악마들 중 가장 강한 힘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할파스네.”
그 때, 파슬릭의 옆을 걸어오는 거대한 뿔을 가진 악마를 본 에든이 중얼거렸다. 확신에 찬 어조에 우성이 물었다.
“어떻게 압니까?”
“할파스를 아는 건 아니고, 아스타로스는 한 번 본 적이 있거든요. 저 녀석 뿔도 크긴 하지만… 아스타로스의 뿔은, 훨씬 거대합니다.”
‘거대하다’라는 표현을 쓰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큰 모양이었다. 할파스만 해도 볼락보다 두 뼘은 큰 뿔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스타로스의 뿔은 얼마나 클지 궁금해졌다.
신전 안쪽에서 걸어 나온 할파스와 파슬릭, 그리고 한 명의 플레이어는 우성을 비롯한 일행 앞으로 걸어왔다. 예상대로 목적은 우성과 전현승이 가지고 있는 마검인 모양이었다.
“누가 마검을 가지고 있는 이방인들이지?”
“접니다.”
할파스의 말에 우성과 전현승이 동시에 답했다. 다른 악마들에 비해 덩치가 작긴 해도, 할파스는 1미터 80이 넘는 꽤 장신의 키를 가지고 있었다. 인간의 기준에서 본다면 큰 편에 속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허리 아래까지 내려온 거대한 뿔은 키를 넘어 바로 앞에 있으면 거대하게 보이는 효과가 있었다.
“따라와라.”
그 말을 남기고 할파스는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파슬릭은 원래 앉아있던 자리에 앉아 다른 플레이어들을 상대하기 시작했고, 할파스와 함께 온 플레이어는 그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어리둥절한 우성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전현승과 함께 할파스의 뒤를 따라갔다. 다른 일행들 역시 그 뒤를 따라가려던 때였다.
“아, 다른 일행들은 여기 남아 있으쇼.”
막 펜을 들고 플레이어들의 볼 일을 해결하던 파슬릭이 안현수와 에든을 비롯한 일행의 앞을 가로막았다.
“저희는 왜요?”
“할파스님이 볼 일이 있는 이방인은 저기 있는 두 사람이니까. 마검을 가지지 않은 이방인들은 할파스님을 볼 권리가 없소.”
그래도 우성과 전현승의 일행이라서 그런지 하오체를 쓰고는 있지만, 파슬릭은 아까와는 달리 고개를 빳빳이 든 상태였다. 하긴, 이제 곧 상급 악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무서울 게 없긴 할 것이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멀어져 가는 우성과 전현승을 보던 에든이 그 앞쪽의 플레이어에게로 눈을 돌렸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입고 있는 장비로 보아 별 볼일 없어 보였다.
하지만 묘하게 모습이 익었다. 흔하지 않은 하늘색이 감도는 머리나, 훤칠하게 큰 키나. 어디선가 본 듯한 모습에 에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봤더라?’
**
할파스를 따라 우성과 전현승이 도착한 곳은 신전의 꽤 위층이었다. 최상층은 아니지만 그 부근인 듯, 창밖을 보니 도시 광경이 훤히 드러나 보였다.
“높이도 왔군.”
“높지. 이 바로 위 위층이 내가 있는 최상층이니. 신전에는 여기까지 올라온 적 있는가?”
아마 할파스를 아는 다른 악마가 그의 말을 들었다면 무척 놀랐을 것이다. 할파스가 경어를 사용하는 경우는 같은 군주급 악마들 외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마왕급의 악마들 중에서도 루시퍼와 같이 어느 정도 예의를 아는 마왕은 할파스에게 경어를 사용할 정도였다. 그만큼 이 시대의 악마들에게 할파스라는 군주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존재였다.
뜻밖에 자신의 중얼거림에 할파스가 말을 받자, 우성은 어떤 말로 말을 다시 받아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능글맞은 성격의 볼락과는 달리, 할파스는 악마들의 군주라는 느낌이 너무 와 닿아 대하기가 어려웠다.
신전의 최상층에서 바로 아래층은 신전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물론 신전 곳곳에 행정적인 업무를 처리하거나 물약을 파는 상점가가 있는 등, 신전과 거리가 먼 장소가 있긴 했지만 우성이 발을 들여놓은 장소는 뭔가 달랐다.
마치 거대한 손님 접대실 같은 느낌이었다. 현대의 고급스러운 호텔과 같은 느낌이 물씬 풍겼고, 창가에 가까이 배치되어 있는 테이블과 테라스는 마치 외국의 관광지와 같은 느낌이었다.
‘여긴 대체 뭐 하는 곳이지?’
우성의 궁금증은 머릿속에서만 맴돌았다. 하지만 용도를 알 수 없는 공간의 정체와는 달리, 할파스와 의문의 플레이어는 익숙하게 테라스쪽의 자리에 앉았다.
“자네들도 앉지.”
자연스럽게 손짓으로 맞은편 자리를 가리키는 모습은 권유보다는 강요에 가까워 보였다. 우성과 전현승은 잠시 서로의 눈치를 보다 그의 말대로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우성이 앉은 자리는 할파스의 옆에 앉은 플레이어의 맞은편이었다. 자연스럽게 그와 눈을 마주친 우성은 하늘색이 감도는 머리색과 붉은빛이 감도는 눈을 가진 그의 모습에 묘한 신비감이 느꼈다.
‘플레이어가 맞긴 맞는 건가?’
아포칼립스에서 플레이어와 NPC를 구분하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악마인가, 인간인가. 악마라면 NPC였고, 인간이면 플레이어였다. 이곳에서 인간이고서 NPC인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플레이어는 마치 인간이면서도 인간이 아닌 것만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순간 두 명의 NPC… 아니, 악마를 눈앞에 두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마검 루시퍼의 사용자 전현승, 마검 아포피스의 사용자 이우성. 맞나?”
할파스의 물음에 우성과 전현승은 단번에 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역시나 악마인 그는 마검을 사용하는 자신들에게 관심을 가진 것이다.
우성과 전현승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자 할파스는 두 사람을 번갈아봤다.
“누가 아포피스의 사용자인가?”
“접니다.”
“이름이?”
“이우성입니다. 아직 이방인으로서 활동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우성의 대답에 할파스의 시선이 우성에게로 돌아갔다. 우성은 혹시나 할파스를 통해서 아포피스라는 악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야기는 들었다. 볼락이 그러더군. 아포피스님의 검을 가진 이방인이 있다고. 그리고 아직 햇병아리라고.”
“‘아직’은입니다.”
우성은 ‘아직’이라는 말에 힘을 주어 강조했다. 자신은 볼락을 처음 만났을 때와, 지금은 전혀 다르다. 그리고 앞으로도 달라질 것이다.
우성의 대답에 할파스는 씩 웃었다. 기분이 나쁜 건지, 웃긴 건지 모를 웃음이었다. 웃고는 있지만 감정이란 게 없는 게 아닌가 싶었다.
“자네들을 부른 건 소개시켜주고 싶은 이방인이 있어서 그랬네. 여기 있는 이방인도 그걸 원했고.”
“대체 이 분이 누구기에……?”
“자네들과 비슷한 이방인이지. 마찬가지로 마검을 가지고 있으니.”
‘마검을 가지고 있다’는 말에 우성과 전현승이 깜짝 놀랐다. 두 사람 역시 마검을 사용하는 플레이어였지만 그들과는 달리 기존에 마검을 가지고 있는 플레이어는 차원이 달랐다.
기존 마검 사용자들은 하나같이 랭커 플레이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이들이었다. 우성이나 전현승은 마검을 가지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미숙한 플레이어였지만, 기존에 마검을 가지고 있던 플레이어들은 마검이라는 장점과 함께 아포칼립스에서 오랜 경력을 쌓아왔기 때문이었다.
경험과 시간은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무시할 순 없었다. 아포칼립스의 특성이 게임과 많이 닮아있는 만큼, 오랜 시간 활동해온 그들의 실력을 무시할 순 없는 것이다.
“반갑다. 마검 ‘사탄’의 사용자, 피엘이라고 한다.”
다짜고짜 나온 반말. 우성과 전현승의 아미가 자동으로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듣자마자, 그들은 마찬가지로 강하게 나올 수 없었다.
‘사탄의 사용자?’
디아블로, 사탄, 벨제뷔트는 마왕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위치에 올라와 있는 악마들이었다. 태초부터 존재해온 악마인 디아블로를 제치고, 모든 악마들 중에서 최강의 자리에 올라간 악마가 바로 사탄이었다.
누구도 이견을 달지 않는 악마들의 왕. 그 이름 때문인지 인간들 사이에서는 ‘악마’라는 이름을 사탄과 동일시 여기고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문제는, 사탄이라는 악마가 언제부턴가 자취를 감추었다는 사실이었다. 사탄이 사라진 건 벌써 천 년 전의 일이라, 많은 악마들은 최고악(最高惡) 사탄이 사라지고 그 뒤를 벨제뷔트가 잇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통상적인 이야기는 우성과 전현승이 알고 있는 것과 같았다. 더욱이 우성은 사탄의 뒤를 이은 최고악인 벨제뷔트의 검을 회수했던 만큼, 사탄이라는 악마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더 플레이어에서 사탄의 사용자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사탄의 사용자인 피엘에 관련된 일화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몇몇 마검 사용자들도 그렇지만, 피엘은 알려져 있는 마검 사용자들 중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가장 강했다. 많은 플레이어들의 이야기로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마검 사용자들 중 어쩌면 피엘이 가장 강할지도 모른다고 할 정도였다.
아니, 어쩌면 악마 진영의 플레이어들 중 그가 가장 강할지도.
플레이어들의 인지도는 대부분 선악공성에서 결정되었다. 그리고 그 중, 피엘이 쌓아 올린 업적과 인지도는 가히 절대적이라고 볼 만했다.
왜냐하면, 그는 선악공성에서 대천사(大天使)를 죽인 유일한 플레이어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