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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플레이어-154화 (153/258)

154화

‘미치겠네.’

평소라면 진작 잠들었을 테지만 우성은 생각을 정리하느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바로 낮에 들었던 혜미의 말이 계속해서 머리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말을 남긴 직후, 혜미는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어쩌면 우성이 바로 대답을 해 주지 않아서일지도 모르지만 혜미의 반응은 분명 평소와는 달랐다.

‘내가 어째야 하는 거지?’

성인이 됐을 무렵부터, 그리고 서현이가 태어난 순간부터 ‘연인’이라는 관계는 단 한 순간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혜미가 자신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진 않았다.

우성이 생각한 혜미와 자신의 관계는 함께 아포칼립스에서 활동하는 친한 일행. 그리고 배치고사에서 대신 희생해준 은인 정도였다.

보통 사람들에 비해 조금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감정이 연애 감정까지 발전하지는 않은 것이다. 아직 자기 스스로도 어떻게 해야 할지 해답을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혜미의 직구를 들으니 우성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일단… 만나 봐야겠지.’

시간이 늦었다. 이 시간쯤이면 어차피 혜미도 들어와 있을 것이다. 낮술을 그렇게 마셨으니, 어쩌면 낮부터 들어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일단 만나자’라는 결론이 내려지자, 우성의 의식은 서서히 수면 아래로 내려갔다. 이윽고 잠에 빠져들며, 다시 눈을 떴을 때 우성의 눈앞에는 현실과는 전혀 다른 배경이 펼쳐져 있었다.

“왔냐?”

언제부터 접속해 있던 건지 방 안에서 구운 고기 꼬챙이를 우물거리며 안현수가 인사했다. 그의 옆에는 혜정이 잠들어 있었는데, 아포칼립스에서는 밤이 찾아와 있었다.

“이 시간부터 뭘 먹고 있냐?”

“새벽인데 배가 고파서. 급하게 여관 주인아주머니에게 먹을 것 좀 부탁했지.”

안현수는 술도 술이지만 식탐도 강했다. 대충 밖을 보니 밤이 꽤 깊은 것 같은데, 이런 시간에 먹을 게 들어간다니.

“원래 새벽에 먹는 고기가 제일 맛있거든.”

“……변명하는 거 보니 너도 이상한 건 아나보네.”

“뭐, 시간이 늦긴 했으니까.”

꼬챙이에 남아있는 고기를 털어내는 안현수에 이어 우성은 혜정에게 시선을 돌렸다. 언제부터 자고 있던 건지, 그리고 왜 남자들끼리 잡은 방에 들어와 있는 건지 혜정은 안현수의 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문득 둘이 무슨 사이냐고 장난 반 진담 반으로 묻고 싶어졌지만 우성의 관심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

“혜미는?”

“아직 접속 안 했는데? 너도 그렇고 혜미도 그렇고, 왜 이렇게들 늦어?”

분명 우성이 접속하기 전 마지막으로 확인한 시간은 1시쯤이었다. 이것도 누워서 잠이 오지 않아 생각을 정리하느라 늦게 들어온 편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진작 접속을 해 있고도 남을 시간인 것이다.

‘아직도 접속을 안 했다고?’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아니면 우성의 얼굴이 보기 싫어서 접속을 하지 않고 있는 걸까?

갑작스레 답답함이 밀려들었다. 큰 걱정까지는 하지 않았는데, 과연 혜미의 얼굴을 보고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싶기도 했다.

“둘이 무슨 일 있었냐?”

차라리 귀신을 속이지. 눈치 빠른 안현수가 우성의 표정을 보더니 음흉하게 물었다. 하긴, 얼마 전부터는 안현수를 빼고 우성과 혜미 둘이서도 종종 만나곤 했으니 요즘 관계가 이상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관계가 혜미의 일방적인 감정이라는 것도 모르지 않을 테고.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 말하기 싫으면 됐고.”

고기를 다 먹은 꼬챙이를 창밖에 던져버리며 안현수가 발라당 드러누웠다. 어차피 아침이 밝으려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다시 자려는 모양이었다.

“아침까지 기다려 보자고. 내일 안엔 접속 하겠지. 걔도 잠은 자야하잖아?”

그의 말대로 어차피 혜미의 리셋 포인트도 이곳 여관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싫든 좋든, 일행이 여관에 머무는 이상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 별 일 없겠지.”

**

“안녕?”

“…….”

대충 눈을 붙이고 일어나자, 평소와 다름없는 혜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평소보다 훨씬 발랄한 톤이었다.

“일어났어?”

“언제 들어왔냐?”

“몇 시간 안 됐어. 아, 물론 여기 시간으로. 현수오빠랑 혜정이는 진작 일어나서 나갈 준비 중이야. 난 오빠 깨우러 왔고.”

말이 조금 빠르다. 역시,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해도 티가 아예 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아마 안현수나 혜정의 앞에서도 이런 모습이었을 테지.

그래도 아예 어색한 사이가 되기보단 나았다. 오히려 이런 관계에선 우성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는 터라 혜미가 먼저 다가와 주는 게 다행으로 느껴졌다.

‘꼭 지금 대답할 필요는 없겠지.’

어떤 대답을 내리건, 혜미와의 관계는 지금과 달라진다. 그리고 우성은 혜미를 비롯한 일행들과의 관계가 지금과 달라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적어도 서현이의 병이 완전히 나을 때까지는 다른 곳에 신경을 쓰고 싶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오늘까지는 여관에 머물렀지만 일행은 당장 옮길 거주지가 있었다. 드루드먼의 조금 외곽에 위치한 집이 있었는데, 2층의 주택인데다 꽤 넓은 터라 4명의 일행이 묵기엔 충분했다.

다만 하멜의 집에서와는 달리 가구들이 배치되어 있지 않아 침대와 같은 필수적인 가구들을 사들이기 전까지는 이용하기 어렵다는 점이 단점이었다. 그 때문에 일행은 집을 구했음에도 가구들이 배치될 때까지 여관에 머무는 쪽을 택했다.

“어제부로 가구들은 다 들어왔다고 하니, 이제 가면 되겠네.”

“새 집인가? 이거, 항상 우성에게 신세져서 어쩌나.”

드루드먼의 땅값은 하멜보다 비쌌다. 마당까지 있으며 훨씬 넓었던 하멜의 집이 1만 골드였는데, 평수도 그 반밖에 되지 않은 집이 같은 가격이었다.

비록 지금까지 사냥이나 퀘스트를 통해 얻은 돈을 나누긴 했지만 아직까지 일행에게는 1만 골드라는 거금은 부담스러웠다. 그만한 돈을 이렇게 선뜻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옥토퍼스’를 정진혁에게 팔았던 우성밖에는 없었다.

“나도 이용하는 집인데 신세는. 그리고 일행인데.”

“크, 이 감동의 쓰나미…….”

“헛소리 말고, 일단 짐이나 싸. 짐을 집에 가져다 두고 바로 떠날 데가 있으니까.”

“떠날 데라니?”

세워둔 계획은 많았지만 당장 처리할 일은 없는 것으로 알았다. 그 때문에 당분간은 드루드먼 주위에서 몬스터를 사냥하거나 대여 수련장을 이용할 줄 알았는데, 우성은 일정이 있다고 말했다.

“따라와 보면 알아.”

**

드루드먼에 일행이 구한 집은 규모는 하멜의 집보다는 작지만 시설만큼은 뒤지지 않았다. 게다가 집의 크기도 4명의 일행이 쓰기엔 넉넉한 편이라 큰 불편함은 없을 것 같았다.

1층에는 10평 남짓한 방이 2개였고, 2층에는 거실과 함께 조금 작은 크기의 방이 하나 더 딸려있었다. 이만하면 4명이 사용하기에는 충분했다.

집을 잠시 둘러본 일행은 곧장 우성을 따라 워프 게이트로 향했다. 드루드먼에 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곧장 다른 도시로 떠난다는 말에 일행은 의아해했다.

“어디로 가려고? 하멜?”

마땅히 떠오르는 도시가 하멜밖에 없어 안현수가 물었다. 왜냐하면 하멜에는 아직까지 ‘볼락의 소원’이라는 보상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다크듐으로 갈 거다.”

“다크듐엔 왜? 설마, 전현승을 만나러?”

“그래. 정진혁도 그렇고, 미행이 붙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한 이상 아무래도 붉은악마 클랜과의 관계를 빨리 확정짓는 게 나을 것 같아서.”

현재 일행과 붉은악마 클랜의 관계는 우호적이지도, 적대적이지도 않았다. 겉으로는 우호적으로 보일지 모르나, 미행을 붙였다는 전제하에 붉은악마 클랜에게 감시당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감시당하고 있다는 것은 즉, 붉은악마 클랜이 아직까지 일행을 믿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런 어중간한 관계를 지속하느니, 차라리 예정을 앞당겨 전현승과 만나 새로운 클랜을 만들어 붉은악마 클랜과 관계를 확정짓는 게 낫다.

“그것도 그러네. 아무래도 미행까지 붙었던 걸 보면…….”

“어차피 전현승이 어디 머물고 있는지도 아니, 다크듐에만 가면 금방 볼 수 있겠지. 오래 질질 끌 것 없는 일이야.”

선악공성 전까지는 되도록 스텟과 스킬 숙련도의 상승에 주력하고, 전현승과는 다음 번 선악공성에서 마주치려고 했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것, 우성은 아예 전현승을 새로운 일행으로 여기기로 마음먹었다.

실제로 전현승은 가능하면 일행과 함께 활동하기를 원했다. 비록 활동하고자 하는 도시가 맞물리지 않아 지금은 이렇게 둘로 나뉘어 활동하지만, 우성이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일행이 될 수 있는 관계였다.

드루드먼의 워프 게이트를 타고 다크듐에 도착하자, 하멜과 드루드먼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거대한 도시가 눈앞에 펼쳐졌다. 흡사 현대의 도시처럼 높은 층수의 건물들과 어두운 하늘은 전혀 다른 세상에 떨어진 느낌이었다.

‘한 번 와 보긴 했지만 여긴 정말 신기하단 말이지.’

문득 여기가 정말 아포칼립스가 맞긴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워프 게이트라는 편리한 수단으로 연결되어 있긴 하지만 하멜과 드루드먼, 다크듐이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거리는 상당했다. 그 때문인지 같은 악마 진영의 도시임에도 각 도시는 건물의 구조와 특징이 달랐다.

그 중 다크듐의 건물은 특히나 현대와 많이 닮아있었다. 우뚝 솟은 빌딩 형태의 건물이나 인테리어. 광장 한 가운데였지만 마치 도심 속 한 가운데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우와…….”

“신기하네. 여기 도시는.”

‘천룡창(天龍槍)’을 사기 위해 다크듐에 한 번 왔었던 우성과는 달리, 다크듐에 처음 와 보는 일행들은 하나같이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둘러봤다. 시작의 마을에서 하멜, 드루드먼까지 나름 몇 개의 도시를 거치고 천사 진영까지 다녀왔다지만 현대와 닮아있는 건축물들은 이곳에서 신선한 충격이었다.

더군다나 활동하는 플레이어의 수는 다른 도시와는 아예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악마 진영에서 가장 많은 플레이어들이 활동하는 두 개의 대도시 중 하나이다 보니 말이다.

워프 게이트를 나오자마자 눈앞을 가득 메운 무수히 많은 인파들은 절반 가까이가 플레이어들이었다. 게다가 그 중 나머지 절반은 한 뼘 이상의 뿔을 가진 중급 악마들이었는데, 하멜에서와 같은 등급 외 하급 악마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우성씨?”

그 때, 우성의 귓가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워낙 많은 사람들 속에서 들린 목소리라 어느 방향인지는 알 수 없지만,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보게 되니 반갑네요. 다크듐엔 무슨 일이십니까?”

“오래간만입니다, 에든씨.”

마검 루시퍼의 사용자 전현승의 일행이자, 2회 차 플레이어인 에든. 우성과는 두 개의 굵직한 퀘스트를 함께한 나름 인연이 깊은 플레이어였다.

그는 2회 차 플레이어치고는 그럭저럭 준수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두 개의 굵직한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끝내곤 한층 더 강해진 상태였다.

“그동안 뭐 하고 지내셨습니까?”

“그거야 제가 묻고 싶습니다. 저희야 뭐, 다크듐에서 흔하게 널려 있는 퀘스트들을…….”

“이런, 이거 이우성씨 아닙니까!”

그 때, 결코 잊지 못한 전현승의 방정맞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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