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아, 그런 거였나.
익히 듣던 이야기였다. 비단 혜미의 어머니만이 아니더라도, 우성에게 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처음엔 이런 반응을 보이곤 했다. 어쩌면 안현수를 비롯한 혜미나 혜정과 같은 일행들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스물일곱. 현재 대한민국의 평균 결혼 적정기가 서른 살 이후이니, 이른 나이에 딸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그 딸이 한 살도 아닌, 벌써 여섯 살 난 딸이라면 스무 살이 갓 넘어 딸을 가졌다는 뜻이었다.
더군다나 우성에게는 제대로 된 결혼 기록도 남아있지 않았다. 즉 남들이 흔히 말하는 ‘사고’, 혹은 ‘고속도로’를 탔다는 말이다.
이른 나이에 생긴 아이에 빠르게 결혼하고,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가는 부부도 있긴 하다. 이 경우 아이가 생겼을 때의 시선은 몰라도, 번듯하게 살아가는 모습만 보인다면 타인의 시선은 바뀌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우성에게는 겉으로 보이는 번듯한 직장도, 아내도 없었다. 여섯 살 딸아이를 혼자 키우는 스물일곱 남성. ‘겉으로’보기에는 분명, 과거가 의심될 수밖에 없었다.
“……하고싶으신 말씀이 뭡니까?”
“별다른 말은 아니에요. 그저, 우성씨에 대한 제 생각을 조금 정리해서 들려드렸을 뿐이에요.”
빙빙 돌려 말하곤 있지만 우성은 그렇게 눈치 없는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눈칫밥 하나로 먹고 살아온 만큼 혜미의 어머니가 하는 말뜻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할 수 있었다.
‘더 이상 혜미와 얽히지 말라는 건가.’
아마도 혜미의 어머니가 지금껏 보아온 우성의 어머니는 ‘혜미와 잘 어울리는 한 쌍’일 것이다.
우성도 안다. 틀어졌던 첫 만남과는 달리, 지금껏 함께 다니며 혜미가 어떤 감정으로 자신을 대하고 있는지를. 그리고 우성 역시 그녀에게 나쁜 감정은 없어, 어쩌면 반 이상 진심으로 그녀를 대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여자의 직감은 무서웠다. 혜미의 어머니는 병원에서 나눈 잠깐의 몇 번의 만남만으로 혜미와 우성에 대해 파악하고, 그 관계를 정리하기 위해 말을 꺼낸 것이다. 어쩌면 기분 나쁠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우성은 이 상황에서 강하게 나갈 수 없었다.
“……무슨 뜻인지 잘 알겠습니다.”
“오빠!”
“그보다는, 제 용건부터 좀 여쭙겠습니다. 이곳 어린이집에서 서현이를 맡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애초 이곳을 방문한 목적. 그리고 그 확답을 듣기 위해 어린이집을, 그리고 혜미의 어머니를 만난 것이다. 굳이 약속을 잡고 혜미까지 불렀던 건 아마도 이 이야기를 꺼내기 위함이었을 테지만, 우성에겐 이 볼일이 가장 우선이었다.
“……역시 우성씨에게는 딸이 가장 우선이군요.”
“네.”
단호한 대답에 옆에서 입을 우물거리던 혜미의 표정이 돌변했다.
우성에게 있어서 그 어떠한 것도 서현이보다 우선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안다. 지금껏 그에게서 딸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고, 직접 서현이를 보는 눈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머리로 알고 있던 것과 직접 입을 통해, 그것도 한 치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모습에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어도 조금 고민이라도 해 주었다면, 이렇게 실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알았어요. 서현이는 우리 어린이집에서 책임지고 보호할게요. 그렇지 않아도 우성씨처럼 집에서 아이들을 보호할 사람이 없는 부모들의 경우, 우리 어린이집에서는 24시간 동안 아이들을 맡기도 해요.”
“감사합니다. 부디… 서현이 잘 부탁합니다.”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하며 우성이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인지 서현이가 옆에 있음에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아빠… 나 여기 있어야 돼?”
점심을 먹기까지만 해도 또래 어린아이 같던 서현이가 다시 돌아와 있었다. 대화 내내 끼어들지 않은 것도 대견하지만, 싫다며 투정 부리지 않는 것도 대견했다.
“……미안해.”
달리 해 줄 말이 없었다. 겨우 퇴원했지만,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곧장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다만 병원과는 달리 아무 때나 찾아볼 수 있고, 서현이도 간호사가 아닌 또래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다는 점이 긍정적이었다. 애초에 퇴원했다고 같은 지붕 아래에서 곧바로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막상 하루 뒤에 바로 헤어지려니 더 울컥했다.
“아빠가 일을 해야 해서. 서현이 옆에 계속 있어줄 수가 없네. 그래도 병원에 있을 때보다는 훨씬 자주 찾아올 수 있고, 더 오래 같이 있을 수 있을 거야.”
“정말이지?”
더 이상 투정은 없었다. 아마도 그 어린 나이에 우성의 말에 거짓이 아니란 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떼를 쓴다고 바뀌는 게 없다는 것도.
우성은 자세를 낮춰 서현이의 머리를 가슴에 파묻었다.
“응. 정말. 정말……”
**
“엄마!”
우성과 서현이가 나간 뒤, 혜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뒤늦게 원장실을 나간 우성이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을까봐 아차 했는데, 다행히 우성이 다시 들어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잠시 진정하며 가슴을 쓸어내린 혜미는 자신의 어머니를 빤히 노려봤다. 평소엔 그렇게 인자하고, 자신만을 위해주던 어머니가 오늘 최악의 모습을 보여줬다.
“대체… 왜 그래?”
몇 년 만에 어머니를 향해 언성을 키운 혜미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도무지 자신의 어머니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엄마 원래 그렇게 편견으로 뭉친 사람이었어? 대체 오빠가 어때서? 사고 좀 쳤으면 어때. 지금 사람이 번듯한데. 아마…….”
“혜미야.”
아직까지도 그녀의 어머니는 평소대로 돌아와 있지 않았다. 단호하고 위엄 있는 목소리. 결코 꺾을 수 없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나도 안다. 우성씨, 정말 좋은 사람이지.”
“그런데?”
“그런데, 너무 딸만 보고 있어. 이 엄마 눈에는 우성씨 눈에 네가 들어와 있지 않은 것 같은데. 착각이었을까?”
어머니의 물음에 혜미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답을 알 수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에 대한 답은, 이미 뼈 아플 만큼 확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착각일 리가 있나.’
우성의 눈에는 서현이 외에 다른 사람은 들어오지 않는다. 물론 처음 만났을 때와는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여전히 우성에게 서현이가 1순위라는 점만은 변함이 없었다. 그밖에 2순위, 3순위는 그의 인생에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에겐 서현이가 전부였으니까.
“엄마는… 내 딸을 바라보지 않는 남자는 싫다. 더더욱 옛 여자가 낳은 딸만 바라보는 남자라면, 더 싫고.”
“난 아니야.”
쾅-!
몸을 휙 돌려버린 혜미는 거칠게 문을 닫으며 원장실을 나섰다. 그런 반응에 어머니는 빙긋 웃으며 중얼거렸다.
“많이 좋아하긴 하는 모양이네. 그나저나 애들 자는데 시끄럽게 하지 말라니까.”
**
서현이를 데리고 나온 우성은 앞서 만났던 교사의 안내를 받아 교실을 구경했다. 앞으로 서현이가 지낼 보금자리이자, 또래 친구들을 둘러본 우성은 어린이집에 등록되어 있는 아이들과 교사들의 규모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선생님이 서현이 지도 교사님이셨습니까?”
“네. 6세 아이들도 너무 많아서 여러 교사가 배정되어 있긴 한데, 아마도 서현이는 제 담당으로 들어올 것 같아요. 얼마 전에 제가 맡고 있던 아이 하나가 멀리 이사하는 바람에 제가 관리할 아이가 하나 줄었거든요.”
스물 중반이나 되었을까 싶은 젊은 교사는 다시금 서현이와 반갑게 인사했다. 서현이는 자신을 가르칠 선생님이라는 말에 허리를 꾸벅 숙였다.
어린이집을 한 바퀴 둘러보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너무 어린 아이들의 경우 낮잠시간이었기에 교실 안까지 들어가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6세와 7세 정도의 비교적 나이가 많은 아이들의 교실만 잠깐 둘러본 뒤 우성은 어린이집을 나왔다.
서현이는 당장 오늘부터 함께 아이들과 수업을 듣기로 되었다. 어차피 점심은 우성과 함께 먹은 후였고, 오후 수업부터 수업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아쉽긴 하네.’
서현이를 위한 선택이라 스스로를 위로하긴 했지만 더 오래 함께 있지 못한 게 아쉽긴 했다. 그렇다고 서현이와 함께 집에서 생활하기에는 우성이 걸리는 점이 너무 많았다.
‘아포칼립스에 접속해 있는 동안에는, 서현이를 제대로 돌볼 수가 없으니까.’
보통 수면 상태일 때 아포칼립스에 접속하게 되지만 그밖에 추가적인 접속 시에 우성은 ‘조각’이라는 형태로 현실에 남아있었다. 평소 우성의 상태와 같다면 모르겠지만, 이 ‘조각’은 우성의 몸을 가지고 제대로 된 활동을 하기가 어려웠다. 특히 ‘사람과의 관계’는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다.
어차피 한 집에 있어도 서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건 똑같다. 그렇다고 아포칼립스를 소홀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멀쩡한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느니, 차라리 보육 시설에 맡겨 제대로 된 선생님들 밑에 있는 게 나을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면 전혀 낯선 사람보다는 서현이가 의지할 수 있는 혜미와 연관된 어린이집이 우성의 마음에도 편했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어린이집을 나온 우성은 그때서야 혜미의 어머니가 한 말이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당장 서현이가 옆에 있고, 어린이집에 등록이 되지 않은 상태라 그 생각이 머릿속에 꽉 차 있었는데 막상 나와 보니 아예 신경 쓰지 않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술이 마시고 싶네.”
“마시면 되지.”
혼자서 중얼거린 말에 들려온 답변은 혜미의 것이었다. 언제 바로 뒤까지 왔는지 혜미는 우성의 팔을 잡으며 앞으로 이끌었다.
“언제 왔냐?”
“방금. 엄마랑은 이야기 끝났어.”
“무슨 이야길?”
우성의 물음에 혜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런 말도 없이 자신을 잡아끄는 혜미를 보며 우성이 다른 질문을 던졌다.
“아니, 잠깐. 마시자는 말은 좋은데, 지금?”
“그럼 언제?”
“낮술은 부모도 못 알아본다던데…….”
“잘만 알아보거든. 나보다 술도 세신 분이 왜 약한 소리실까?”
평소 셋이 모이면 워낙 술을 좋아하는 안현수때문이라도 반주를 꼭 걸치곤 했지만 둘이서 술을, 그것도 이런 대낮에는 처음이었다.
거의 반 강제적으로 우성을 잡아 뜬 혜미는 시내에 있는 칵테일 바로 향했다. 거의 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라 이제 막 문을 열기 시작한 바(Bar)는 우성과 혜미가 첫 손님이었다.
칵테일 바는 안으로 들어가자 대낮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어둡고 으슥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희미한 조명이 가게 안을 가득 채우긴 했지만 그 때문에 더 색다른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데킬라와 보드카가 섞인 도수 높은 칵테일을 시킨 혜미는 우성에게도 마찬가지로 술을 권했다. 한 눈에 봐도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대낮부터 술을 마시는 것도 이상한데, 그것도 이런 분위기 있는 바에 데리고 왔으니 말이다.
“……할 말 있냐?”
벌써 데킬라를 네 잔째 원샷하고 있는 혜미는 빨리 마셔서인지 평소보다 더 취기가 올라 보였다. 슬슬 직원들도 우성과 혜미를 이상한 눈으로 보는 것 같았지만, 워낙 다른 사람의 눈초리를 신경쓰지 않는 우성은 혜미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와, 오빠 진짜 몰라?”
“……말해야 알지.”
어떤 종류의 말이 나올지는 대충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방향일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어머니의 말을 듣고도 계속해서 우성에게 마음을 열지, 아니면 이대로 접게 될지는 지금 이 순간 혜미 스스로밖에 알지 못한다.
“내가. 오빠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몰라?”
취기가 오른 듯 뚝뚝 끊어지는 말투에 우성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알고는 있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하면 혜미가 상처를 받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른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다.
결국 무언으로 긍정하는 우성을 보며 혜미는 다음 잔을 들었다. 벌써 도수 높은 데킬라만 다섯 잔이었다.
“조금만 천천히 마셔라.”
우성이 막 혜미가 들고 있는 잔을 빼앗으려던 때였다.
“……나 오빠 좋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