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우성은 고작 사흘밖에 되지 않아 아포칼립스에서 나왔다. 그밖에 다른 일행들 역시 우성이 현실에 볼 일이 있다는 말에 함께 현실로 돌아갔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아포칼립스에 접속해 있었지만, 붉은악마 클랜과 연관된 일 때문인지 제법 많은 시간이 흐른 듯한 기분이었다.
‘돌아왔구나.’
현실로 돌아온 우성은 가장 먼저 보이는 서현이의 얼굴에 싱긋 웃었다. 항상 텅 빈 방에서 눈을 뜨곤 했는데, 오늘은 자신 외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상황이 낯설기도 하면서 행복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서현이라는 사실에 감사했다.
우성은 아직까지 곤히 잠들어 있는 서현이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매끄럽게 어루만지자, 잠들어 있던 서현이가 몸을 뒤척였다.
“우움…….”
서현이가 뒤척이며 입을 우물거리자, 우성은 황급히 손을 때내었다. 서현이는 자신이 손을 대기만 하면 이상하리만치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깼나?’
습관처럼 머리를 어루 만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우성은 자기 때문에 서현이가 잠을 방해받는 걸 원치 않았다. 그 때문에 항상 병원에서도 서현이의 병실에 들어가기 전엔 발소리를 죽이고 들어갔었다.
“우움… 아침이야?”
작디작은 손으로 한쪽 눈을 비비며 서현이가 몸을 돌려 우성을 바라봤다. 이불 안에 들어가 있던 우성은 자신의 이불까지 걷어 덮어주며 웃었다.
“괜찮아. 좀 더 자도 돼.”
“나, 다 잤어.”
한 번 눈을 비볐기 때문일까? 아직 애답지 않게 서현이는 벌써 졸음이 달아났는지 고개를 들어 우성과 똘망똘망한 눈을 마주쳤다. 하긴, 서현이는 병원에서도 별로 다른 또래에 비해 잠이 없긴 했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8시가 넘어 있었다. 평소보다 일찍 잠이 들었으니, 이쯤이면 서현이도 잠이 깰 시간이긴 했다.
남들은 유치원에 나갈 시간. 어른들은 한창 출근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오늘 하루, 우성에게나 서현이에게나 시간은 텅 비어있었다.
“서현아.”
“응?”
“우리 뭐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
우성이 서현이를 데리고 간 곳은 인근의 인기 있는 음식점이었다. 시내에 즐비한 맛집은 아니었지만 나름 유명한 프랜차이즈에 음식 맛도 괜찮은 장소라 서현이를 꼭 한 번 데리고 오고 싶었다.
서현이를 데리고 온 식당의 가장 유명한 메뉴는 얇게 자른 소고기를 양념에 살짝 재어 스테이크처럼 구운 메뉴였다. 고기가 질기지 않고 부드러워 비교적 어린 아이들도 맛있게 먹을 수 있어 가족들이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자주 오는 장소이기도 했다. 따로 어린이 메뉴를 팔기도 하고 말이다.
혜미와 함께 두 번 정도 와 봤던 장소라 다음에 서현이가 병이 나으면 꼭 셋이 함께 오자고 했었는데, 우성은 가능하면 서현이와 단 둘이 오고 싶었다.
우성은 평소대로 먹던 소고기 메뉴를, 그리고 서현이에게는 마찬가지의 메뉴를 어린이용으로 시켜주었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음식이 나오고, 우성은 서현이의 앞으로 나온 고기를 잘게 썰어주었다.
“맛있어?”
“응! 진짜 맛있어.”
달달한 양념이 입에 맞는지 서현이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양념을 입에 잔뜩 묻힌 채 크게 대답했다. 우성은 음식은 입에 가져가지도 않고 그 모습을 바라보느라 하염없이 식기만 들고 있었다.
“아빤 안 먹어?”
“먹고 있어.”
TV드라마에나 나오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흔한 멘트가 자신의 입에서도 튀어 나오자 우성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는 게 어떤 뜻인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먹는 모습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다 보니, 음식이 나오고 삼십분이 지났을 무렵에야 식사가 끝났다. 서현이가 먹던 걸 바라보고 있던 우성도 중간부터는 한입씩 먹기 시작해, 비슷한 시간에 식사를 맞출 수 있었다.
11시. 아침이라기엔 너무 늦고, 점심이라기엔 조금 빠른 시간이었다. 집에서 조금 늑장을 부리다 나온 터라 아침이 아닌 이른 점심이 되어버렸다.
애초에 점심을 먹을 거라면 조금 더 집에 있다 나왔으면 됐겠지만, 이미 점심때까지 갈 데가 정해져 있어 더 늦장을 부릴 순 없었다.
“이제 어디 가?”
계산을 하고 나오자 잔뜩 기대에 부푼 서현이가 물었다. 병이 나을 수록 부쩍 또래 어린아이다운 모습이 늘어가는 것 같아 우성은 마음 한쪽이 뭉클거렸다.
“혜미 언니 보러가자.”
“혜미 언니?”
유독 혜미를 잘 따르는 서현이는 좋다며 뛰었다. 처음에는 잘 맞지 않는 듯 투닥거렸지만 근래 들어 부쩍 또 친해진 두 사람이었다. 오죽하면 서현이가 같이 놀이공원을 가고 싶어 할 정도였다.
우성은 식당을 나와 가장 먼저 보이는 택시를 잡았다. 그리 가까운 거리가 아니라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했지만, 서현이가 함께 있어 최대한 편하게 움직이고 싶었다.
택시를 타고 내린 장소는 혜미가 사는 아파트 단지 인근에 있는 어린이집이었다. 3층 높이의 작지 않은 규모의 어린이집은 보통 흔히 볼 수 있는 어린이집보다 평균적으로 질 좋은 시설들이 갖추어져 있었다.
한 층이 족히 80평은 될 법한 어린이집의 1층은 서현이보다 훨씬 어린 2~3살 정도의 아이들이 잠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낮잠 시간인 모양이었다. 서현이는 자신보다도 훨씬 작은 아이들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구경하면서도 낮잠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선지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그 때, 어린이집의 선생님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 교사가 다가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던 우성은 마침 찾고 있던 사람이 있어 대답했다.
“혹시 이곳 원장님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오늘 이 시간쯤에 만나기로 했습니다.”
“아, 원장님이 말씀하신 손님이구나. 그럼 여기가 따님인 서현이?”
이미 말을 들은 상태인지 교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세를 낮춰 서현이를 바라봤다. 우성과 교사의 눈치를 살피던 서현이는 분위기를 보더니 젊은 교사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서현이의 인사에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교사는 다시 몸을 일으켜 몸을 돌렸다.
“원장님께 오실 거라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따라오세요.”
교사는 바깥쪽을 서성이고 있던 우성과 서현이를 데리고 어린이집 안쪽으로 들어갔다. 가장 어린 나이의 어린이들이 모여 있는 ‘새싹 반’부터 시작해, ‘가람 반’과 ‘이슬 반’등, 아이들의 나이대 별로 반이 구분되어 있었다.
1층의 가장 안쪽으로는 원장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교사는 닫혀있는 문을 살살 두드렸다.
“원장님, 계세요?”
“들어오세요.”
대답은 즉각 들려왔다. 우성의 귀에는 제법 익숙한 목소리였다.
“원장님, 말씀하신 손님이 오셨어요.”
“아! 고마워요, 임선생님. 이제 어서 가서 애들 돌봐주세요. 슬슬 깨는 애들이 있을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원장의 말에 임선생이라고 불린 교사는 고개를 꾸벅 숙이곤 원장실을 나섰다. 우성은 어린이집의 원장이자, 혜미의 어머니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그러게요. 병원 밖에서 보는 건 처음이죠? 그렇게 식사를 대접하려 해도 거절하더니.”
“식사라면 제가 사야죠. 어떻게 얻어먹나요.”
혜정의 병문안을 자주 가며 우성은 그녀의 부모와도 제법 많은 인사를 나누곤 했다. 특히 어머니 쪽은 시간이 날 때마다 병문안을 오는 터라, 우성이 서현이와 함께 혜정의 병문안을 갈 때마다 얼굴을 마주치곤 했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혜미의 어머니가 작지 않은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 때는 그저 ‘어린이집 원장이구나’라고만 생각했는데, 이 정도 규모의 어린이집일 줄은 몰랐다.
‘하긴. 혜미가 사는 아파트를 생각해 보면…….’
소위 부자 동네에 속하는 아파트 단지에 사는 걸 보면, 그녀의 부모님의 스펙도 알 만 했다. 아버지 쪽도 만만치 않게 바쁜 걸 보면 아마 어머니 쪽 보다 수입이 높으면 높았지, 낮지는 않을 것이다.
“혜미는요?”
“부랴부랴 오고 있어요. 그래도 혜정의 병문안을 다녀오는 길이니 너무 혼내지는 말아 주세요.”
“괜찮습니다. 저희가 조금 일찍 오기도 했고요.”
원래 약속시간은 12시까지였다. 시금 시간이 11시 50분 정도니, 아직 혜미가 늦은 건 아니었다.
“그 아이가 서현인가요?”
“……네. 제 딸입니다.”
“정말, 우리 어린이집에서도 보기 힘든 예쁜 아이네요.”
“감사합니다.”
“빈 말이 아니에요. 딸은 아빠를 닮는다는데, 아무래도 그 말이 정말인가 봐요.”
마지막 말은 우성과 서현이 둘 모두를 칭찬한 말이었지만, 우성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서현이가 닮은 쪽은 어머니였지, 결코 자신은 아니었다.
혜미의 어머니가 서현이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어린이집을 운영한다는 이야기를 알게 된 직후이니, 현실에서는 고작 보름도 되지 않은 일이었다. 그 때쯤이 슬슬 서현이의 퇴원 이야기가 고조되던 참이었으니, 혹시라도 퇴원 후에 어린이집에 서현이를 맡길 수 있나 해서 나온 이야기였다.
쿵-!
“엄마, 미안! 아직 우성 오빠 안 왔…….”
그 때, 원장실의 문을 크게 열어젖히며 혜미가 안으로 들어왔다. 뛰어오기라도 했는지 잔뜩 숨이 차오른 그녀는 우성의 얼굴을 보더니 얼어붙었다.
“벌써… 왔네.”
“약속시간엔 15분 일찍 와 있으라고 가르치지 않았니? 그리고 애들 잔다. 어린이집에서는 좀 얌전히 행동해.”
“네에~.”
혜미는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얌전히 대답했다. 그러더니 우성의 옆에 얌전히 붙어 있는 서현이를 발견하곤 눈을 반짝였다.
“서현이, 오랜만?”
“언니 오랜만!”
원장실에 들어온 이후부터 숨을 죽이고 있던 서현이는 혜미가 들어온 이후부터 눈에띄게 얼굴색이 밝아져 있었다.
“언니, 우리 놀이공원엔 언제 가?”
“글쎄. 서현이 좋은 날? 언니야 언제든 환영이지.”
“빨리 가자. 나 놀이공원만 생각하면 막 두근거려. 히히.”
“그럴까? 그럼…….”
“혜미야.”
인자하기만 했던 평소와는 달리, 혜미의 어머니는 제법 근엄 있는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병원에서는 늘 어머니와 장난도 섞으며 친구처럼 지냈던 혜미도 무게가 실린 목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원장실이 다시 조용해지자 혜미의 어머니는 다시 우성을 바라봤다. 어떤 이야기를 꺼내려고 이렇게 무게를 잡는지는 모르겠지만, 결코 분위기가 좋지만은 않았다.
“사실 처음 우성씨를 봤을 때는 첫인상이 정말 너무 좋았어요. 훤칠하고, 예의바르고, 성실하고. 혜정이가 친한 오빠가 있다는 사실만이 아니더라도, 우성씨는 너무 좋은 사람이었어요. 그건 현수씨도 마찬가지고요.”
“……감사합니다.”
“어떤 생각까지 했는지 아세요? 전, 우성씨가 마음만 있다면 혜미가 우성씨 같은 사람을 만나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했어요.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요.”
‘얼마 전’이라는 전제가 붙었다는 것만으로도 지금은 그 생각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야 뻔했다.
“……서현이 때문입니까?”
“그래요.”
“엄마!”
언성을 높여 부른 혜미의 목청에 그녀의 어머니는 손을 들어 올렸다.
“딸이 있다는 게 문제가 아니에요. 우성씨 나이가 서른다섯쯤 되고, 부인을 잃고 재혼을 생각하고 있었더라면… 우리 혜미의 나이가 조금만 더 많았다면… 다르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럼 대체 무엇이…….”
혜미의 어머니는 잠시 입을 우물거리다 결심한 듯 대답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 우성씨의 과거가 깨끗하다고 생각하기가 어려워요. 그리고 그 의심은 지금도 마찬가지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