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오랜만이네.”
“올 때마다 그 소리를 하는 것 같군, 플레이어 우성.”
우성은 오래간만에 보는 순백의 공간과 오더를 보며 반갑게 인사했다. 오더는 언제나처럼 고저가 없는 목소리로 우성의 말에 딱딱하게 답했다.
하지만 우성의 오랜만이라는 말은 빈 말이 아니었다. 적어도 전현승을 만나고 루시퍼의 퀘스트를 완료하기 전까지, 우성은 단 한 번도 이곳을 찾아온 적이 없었다.
“그래서, 오래간만에 날 찾아온 이유는?”
“어차피 속마음이야 다 알면서 그건 왜 묻지?”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오더는 플레이어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으면서도 용건을 물어왔다. 우성은 그것이 마치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이제 슬슬 적응이 되었다.
너스레처럼 슬쩍 물었지만 오더의 반응은 의외였다. 처음으로 우성의 질문에 고개를 저은 것이다.
“알지 못한다.”
“못한다고?”
“그래. 더 이상 플레이어 우성, 너의 생각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보이긴 보이지만… 안개처럼 흐릿하군.”
생각이 흐릿하게 보인다는 건 대체 무슨 뜻일까? 우성은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오더는 지금껏 우성의 생각이 그림처럼 그려져 보였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갑자기 왜지?”
“당연한 이치다. 플레이어 우성의 정신력 포인트는 벌써 85포인트다. 이것은 어지간한 1회 차 플레이어를 웃도는 수치로, 사실 경이로울 정도다.”
“아… 정신력 스텟의 영향인가?”
정신력 스텟이 그런 쪽으로도 효과가 있을 줄이야. 생각보다 여러 방면에서 쓰임이 있었지만, 오더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오더도 만능은 아니군.’
우성은 지금껏 ‘가이드’인 오더를 게임 속의 ‘운영자’와 겹쳐서 보고 있었다. 오더는 게임의 시작부터 포인트와 생명을 아우르기까지, 아포칼립스의 모든 것을 관장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플레이어의 생각과 마음을 읽는 것 정도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처음으로 오더는 우성의 생각을 읽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것은 전지전능(全知全能)에 가깝다고 생각한 오더에 대한 인식을 한 꺼풀 벗겨내는 사건이었다.
‘오더도 결국 만능은 아니라는 건가?’
아무튼 우성에게 있어서 나쁜 소식은 아니었다. 지금껏 말하지 않아도 자신의 속내를 들키는 건 썩 기분이 좋은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소원이야 말로 하면 들어주니 오더가 자신의 속마음을 모른다고 해서 문제될 것도 없다.
“모른다면 어쩔 수 없고. 내 소원이야 한 가지는 고정이지.”
“플레이어 우성의 라이프(Life)를 대가로 비(非) 플레이어 이서현의 수명을 연장하겠다는 건가?”
“눈치는 빠르네. 맞아. 하지만 이번엔 한 개가 아니라, 4개.”
우성은 엄지를 제외한 손가락 4개를 펼쳤다. 지금껏 하나씩 생명을 주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무려 4개의 생명을 대가로 서현이의 병을 완화시킬 생각이었다.
“플레이어 우성의 라이프(Life)는 총 6개가 남았다. 현재 상태에서 4개의 라이프를 소모하면 2개의 라이프가 남는다.”
“알아. 당연히 가지고 있는 포인트로 2개의 생명을 추가로 더 얻을 생각이다.”
“그렇게 되면 남는 라이프는 총 4개. 소원을 이행하겠나?”
이미 충분히 고민하고 말한 소원이었다. 오더의 확인에 우성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플레이어 우성의 소원이 승인되었다.”
[4라이프(1Point Life)를 소모하였습니다.]
[비(非) 플레이어 이서현의 수명이 381일 3시간 48분 50초 늘어납니다. 병세가 다소 호전됩니다. 라이프를 추가로 지급할 경우, 더 많은 시간을 수명으로 얻게 됩니다.]
[10000포인트를 소모하였습니다.]
[2라이프(2Point Life)를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라이프(Life)는 4라이프(Life)입니다.]
다른 메시지는 관심 없었다. 우성은 서현이의 수명이 얼마나 늘어났는지, 거기에 눈을 고정시켰다.
‘381일!’
우성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처음 라이프를 소모했을 때는 60일 정도의 수명이 늘어났다. 그 다음부터는 조금씩 수명이 더 늘어나며, 병세가 미약하게 호전되곤 했다.
하지만 그렇게 회복된 서현이의 몸 상태는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아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럴 때마다 우성은 ‘소원의 방’을 찾아 자신의 수명을 대가로 서현이의 수명을 늘리며 병세를 호전시켜 주었다.
그렇게 다시 서현이의 몸 상태가 나빠지는 걸 지켜보기가 힘들어 우성은 한 번에 여러 개의 라이프를 대가로 서현이의 몸을 한 번에 회복시키고자 했다. 그런데 그 생각이 유효하게 먹힌 것인지, 4개의 라이프로 평소에는 생각도 하지 못할 정도의 수명을 늘려준 것이다.
더군다나 병세가 ‘미약하게’가 아닌, ‘다소’회복되었다니.
이것이야말로 우성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희소식이었다. ‘미약한’ 것과 ‘다소’는 단어에서부터 큰 차이가 있었다. 아마 서현이의 몸 상태가 우성이 처음 기대한 것보다 더 많이 회복된 모양이었다.
“기쁜가 보군.”
기분에 초를 치는 목소리에 우성이 고개를 들었다. 2미터가 넘는 오더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우성이 표정을 찡그려 물었다.
“이제 속마음 못 읽는다며?”
“그렇게 환하게 웃고 있는데, 당연히 기뻐 보일 수밖에.”
하긴, 우성도 자신의 표정이 어땠을 지는 상상이 갔다. 평소에도 서현이와 관련된 일이라면 표정을 숨기질 못했으니, 아마 팔불출 아빠마냥 좋아했겠지.
“이제 볼 일은 끝났나?”
“……진짜 이제 더 생각은 못 읽나 보네.”
혹시나 했는데, 방금 전 말에서 확실해졌다. 더 이상 오더는 우성의 생각을 읽지 못한다.
“남은 소원이 하나 남긴 했는데…….”
“했는데? 뭐지?”
“우선 질문 하나만 하지.”
“질문의 수준과 플레이어 우성의 수준을 고려해 일정량의 포인트가 필요하다. 이 정도는 이제 알고 있겠지?”
“알아, 알아. 예전에도 했던 말이야.”
깐깐한 건 알고 있었지만, 속마음을 알지 못해서인지 오더는 필요 이상의 주의를 주고 있었다. 더 이상 오더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잔소리 같아, 우성은 그의 말이 더 이어지기 전에 질문을 던졌다.
“플레이어들의 평균 PP포인트는 몇 포인트지?”
“PP포인트와 관련된 문제는 민감하다. 1회 차 플레이어들에게도 고급 정보로 분류되며, 이와 관련된 정보 발설 시 적지 않은 포인트가 가해진다. 그래도 듣고 싶은가?”
“기껏 내 포인트를 지불해서 얻은 정보 남들에게 공짜로 전해줄 생각 없어. 패널티가 있다면… 나랑 가까운 일행에게도 비밀로 할 거고. 잔소리 말고, 필요한 포인트가 몇 포인트인지나 말해.”
우성은 오더와 길게 이야기 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와 길게 이야기해서 득을 볼 게 없을뿐더러, 어차피 정보를 듣게 되면 그게 다 포인트였다. 차라리 그럴 바에야 필요한 이야기만 짧게 해서 끝내는 게 나았다.
“300포인트다.”
“지불하지.”
평소라면 한참 고민했을 것이다. 300포인트면 웬만한 퀘스트 하나를 해결해야 얻을 수 있는 포인트였다. 하지만 PP와 관련된 문제는 꽤 오랫동안 고민했던 만큼, 포인트가 넉넉해진 지금 최대한 투자할 생각이었다.
[띠링-! 300포인트를 소모하였습니다.]
“1회 차부터 7회 차까지 아포칼립스를 플레이하는 플레이어들의 평균 PP포인트는 121포인트다.”
“121?”
예상했던 답이긴 했지만 너무 예상대로라서 의외일 정도였다. 지금껏 ‘설마’하며 생각해 오던 생각이 오더에 의해 확답을 받자, 우성은 머리에 망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난 뭐지?’
우성의 PP포인트는 1860포인트였다. 처음 아포칼립스를 시작하고 플레이어 상태를 확인했을 때, 우성은 다른 능력치에 비해 심하게 높은 PP포인트에 의문을 가졌다.
우성은 다른 플레이어들 역시 자신처럼 PP포인트가 유독 높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처음 혜미와 혜정의 플레이어 정보를 확인했을 때, 우성은 두 사람이 자신에 비해 PP포인트가 유독 낮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뒤로 우성은 틈이 나면 다른 플레이어들의 상태를 확인하곤 했다. S클래스의 플레이어인 우성은 B클래스 이하의 플레이어들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중, PP포인트가 100포인트가 넘는 플레이어는 극히 드물었다. 지금껏 우성이 본 플레이어들 중, PP포인트가 가장 높은 플레이어가 200포인트도 되지 못했다.
‘알아볼 필요가 있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자신이 남들보다 유독 PP포인트가 높은 이유나, PP포인트가 어떤 포인트인지에 대해서.
다른 스텟들처럼, PP포인트 역시 분명 어딘가 쓰임이 있을 것이다. 지금껏 PP포인트는 수치만 높을 뿐 어떤 포인트인지 알지 못했지만, 우성은 PP포인트가 더 강해질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질문은 그게 끝인가?”
“아니. PP포인트가 어떤 포인트인지에 대해 알고 싶은데.”
우성의 말에 오더는 잠시 말이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어떤 식으로든 즉각 답이 올 텐데, 예상외의 반응이었다.
“예전에도 같은 질문을 했던 것 기억하나?”
“기억하지.”
“그렇다면 이것도 기억하겠군. PP포인트에 대한 정보를 아는데 필요한 포인트는 1만 포인트다.”
“기억해.”
“그래도 알고 싶나?”
1만 포인트.
5천 포인트가 1개의 라이프나 마찬가지니, 우성에게 있어서는 2개의 라이프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의 포인트를 투자하고서라도 우성은 PP포인트에 대해 알아둘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면 우성으로서는 큰 결심을 했다고 볼 수 있었다. 다른 플레이어들의 PP포인트를 눈으로 확인할 때마다, 우성은 오더에게 PP포인트에 대해 물어야 하나 항상 갈등하곤 했다.
“알아야겠어.”
“알았다. 플레이어 우성의 소원을 승인한다.”
[띠링-! 10000포인트를 소모하였습니다.]
[‘가이드 - 오더’에게 PP포인트에 대한 정보를 열람할 권한을 얻었습니다.]
2개의 라이프와 PP포인트에 대한 정보까지, 우성은 가지고 있던 포인트 중 순식간에 2만 포인트를 소모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아직 1만 포인트가 넘게 남아있었지만, 뼈아픈 지출인 건 어쩔 수 없었다.
문득 라이프만 지속적으로 소모하지 않았다면 훨씬 포인트에 여유가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한 순간에 너무 많은 포인트가 빠져나가자 허탈감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서현이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지출이라 우성은 고개를 흔들어 아쉬움을 털어냈다. 지속적으로 포인트를 소모해야 하는 만큼, 자신이 더 열심히 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플레이어 우성의 PP포인트에 대한 정보 열람이 승인되었다.”
“이제 물어보면 되나?”
“그래.”
포인트의 지출이야 아깝긴 하지만 오랜 시간 앓아왔던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게 되자 우성은 내심 들떴다. 자신과 다른 플레이어들의 차이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일단 첫 번째. PP포인트는 대체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