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우성이 만난 연금술사 플레이어의 이름은 패트릭이었다. 연금술사를 직업으로 가지고 있으면서, 2회 차이기도 한 드루드먼에서 꽤 실력 있는 편에 속하는 플레이어였다.
천사장의 깃털을 확인한 패트릭은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아이템 설명을 보면 알 수 있듯, 한 회 차에 한 번 등장할까 말까 한 천사장의 깃털이었다.
하지만 천사장의 깃털이 있다고 해도 당장 물약의 제조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강인한 정신의 물약을 만들기 위해서는 천사의 깃털 외에도 더 많은 재료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재료의 공급은 우성이 담당하기로 했다. 경매장에서 그런 자잘한 재료들이 나오지는 않을 테니, 따로 구할 수밖에 없었다. 연금술사 직업을 가지고 있는 패트릭이 직접 재료를 구하러 다닐 수는 없으니, 결국 발로 뛰는 일은 우성의 몫이었다.
패트릭은 우성에게 큰 기대를 가졌다. 그가 처음 연슴술가 직업을 가졌던 건 처음 아포칼립스에 들어와서 마법사 직업을 가지고, 한 회 차가 지난 후였다.
마법사보다는 연금술사 직업군에 더 적성이 맞았던 패트릭은 빠른 속도로 연금술사 직업군의 스킬 숙련도를 올릴 수 있었고, 물약 제조에 나름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더 나은 물약을 만들기가 힘들었고, 지금껏 줄곧 ‘그럭저럭 괜찮은’ 물약을 만드는 정도에서 멈추어 있었다.
하지만 천사장의 깃털이 들어간 물약을 만들게 된다면, 멈춰있던 스킬의 숙련도도 대폭 늘릴 수 있을 것이었다.
우성은 패트릭이 묵고 있는 숙소가 어딘지 알아두었다. 지금 당장 모든 재료를 구해서 오기는 시간이 없었다. 자신 혼자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다른 일행들과 함께 현실에 다녀와야 하기 때문이었다.
패트릭도 천사장의 깃털을 제련하기 위해서는 준비할 게 있다고 하니, 서로를 위해서 시간을 갖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결국 물약의 제조는 우성이 재료를 모아 올 때까지로 미루어졌다.
결국 새로운 물약의 제조를 기약한 뒤 우성은 잡아두었던 숙소로 돌아왔다. 드루드먼에서 제법 큰 편에 속하는 3층짜리 숙소의 1층에는 많은 수의 플레이어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 저기 오네.”
바로 방으로 올라가려던 우성은 안현수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시간이 꽤 늦어서인지 다른 일행은 기다리지 않고 먼저 식사를 하고 있었다.
마침 우성도 출출했던 차였다. 곧장 남아있는 의자를 빼서 앉으며 우성이 식탁 위에 올려진 음식들을 바라봤다.
먹음직하게 훈제된 고기와 소스에 버무려진 야채들, 빵과 스프, 핑크색 빛의 특이한 색감의 잼, 그리고 토마토소스의 면 요리까지.
꽤 맛있어 보이는 식단이었다. 현실에서는 고급 식당에서나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었지만, 우성은 슬슬 쌀이 그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쪽 음식도 못 먹을 건 아니었기에 우성은 옆에서 혜미가 건네는 수저와 포크를 받아들었다. 동양보다는 서양에 가까운 아포칼립스에서는 젓가락이라는 식기가 없었다.
“여기 그래도 음식은 나쁘지 않은데? 맛은 오히려 하멜보다 나은 것 같아.”
“그래?”
샐러드와 함께 고기를 싸먹으며 우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야채도 싱싱하고 샐러드 소스도 새콤하고 맛있었다. 훈제된 소고기도 부드럽고 은은한 훈제 향이 괜찮았다.
“어디 갔다 왔냐?”
“연금술사들이 만든 물약 좀 보고 왔다.”
“전에 말했던 정신력 물약?”
“그래. 그런데 물량이 없더라. 재료를 구해서 제작 의뢰를 맡겨야 할 것 같아. 목록을 보니, 이 근처에 서식하는 몬스터들에게서 구할 수 있는 것들이더라고.”
식사를 화는 와중에도 우성과 안현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일단 드루드먼에 도착은 했지만, 우성이나 안현수나 마땅한 계획은 없었다. 아마 이후의 계획은 ‘더 플레이어’에서 드루드먼에 대한 정보를 더 모은 후에나 세워질 것이다.
“아, 그거 들었냐?”
“뭘?”
“이번 선악공성에서 우리 악마진영이 대패했다고 하더라고. 붉은악마 클랜이랑 오사카 클랜, 가네스 클랜의 네임드급 플레이어들이 참여했는데도 그 꼴이었다더라.”
안현수가 말한 세 개의 클랜은 아포칼립스에 존재하는 6개 국적의 클랜들 중 대표라 말할 수 있는 클랜들이었다.
우성을 포함한 일행들은 붉은악마 클랜에 큰 호감은 없었다. 대한민국 국적의 대표 클랜이긴 하지만, 워낙 첫 인상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악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더욱이 큰 범위에서 보면 선악공성에서 악마 진영의 패배는 그들에게나 모든 악마 진영 플레이어들에게나 뼈아픈 소식이었다.
“그런 이야기는 어디서 들었냐?”
“아까 잠깐 1층에서 합석한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너도 나가고, 우리도 할 거 없어서 가볍게 한잔 하고 있었지.”
그러고 보니 식탁 위에 비어진 술잔이 몇 개 보였다. 가볍게 한 잔이라더니 진짜인 듯, 작은 술잔 몇 개가 전부였다.
“박윤성이라는 놈도 저번 선악공성에 나타났던 모양이더라고.”
“박윤성이?”
깊은 인연까지는 아니었지만 박윤성은 우성에게 있어서 꽤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플레이어였다.
그는 고 회 차 플레이어, 그 중에서도 상위 랭커에 속하는 플레이어가 가지고 있는 힘이 어느 정도인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것은 제법 실력에 자신이 있었던 우성의 자만을 깨어준 계기이기도 했다.
우성은 아직도 박윤성을 떠올리면 소름이 돋았다. 그 정도 실력을 가진 플레이어가 과연 아포칼립스에 몇 명이나 있을까 싶었고, 그런 이들과는 절대 적으로 만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지금은, 그 때와는 많이 다르지만.’
마수의 숲에서 박윤성을 만났을 때와, 지금의 우성은 확연히 달랐다. 마수의 숲 몬스터 하나 둘에 절절매던 그 때와 비교해서 우성은 스텟으로나, 경험적으로나 비교가 되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아직까지 박윤성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박윤성은 2회 차 플레이어들 중에서도 최상위에 꼽히는 실력자일 테니까.
“박윤성이 등장한 건 어떻게 확신하는데?”
“수백 자루의 순백의 창을 소환해서 싸우는 플레이어라면, 네가 말한 박윤성의 특징과 똑같지 않아? 그런 플레이어가 흔할 리도 없고.”
“하긴.”
박윤성과 같은 특징을 지닌 플레이어가 또 있다고 생각하긴 힘들었다. 그의 직업군은 평범한 일반 등급의 직업이 아닌, 최소 레어(Rare), 혹은 유니크(Unique) 등급의 직업일 것이다.
어쨌든 박윤성이 선악공성에 등장했다면 악마 진영의 패배에 추가 기우는 건 당연했다. 박윤성 한 사람이 대체 몇 명의 플레이어의 몫을 해낼 수 있을까? 우성은 웬만한 2회 차 플레이어 수십 명 몫을 그 혼자 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 재밌는 건 다음 선악공성 도시야.”
“아, 다음 번 선악공성은 악마진영의 차례구나.”
선악공성은 악마진영과 천사진영의 도시를 번갈아가며 진행되었다. 이번 선악공성이 천사진영의 라키아에서 진행되었으니, 다음 번은 악마진영의 차례였다.
“어딘데 그래?”
막 스프에 빵을 적셔 입으로 가져가던 우성이 안현수의 대답에 손을 멈췄다.
“하멜.”
“진짜?”
의외의 대답에 우성이 되묻자, 안현수는 확신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성이나 다른 일행이 정보가 늦은 감이 있을 뿐, 알 만한 플레이어들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대체 왜지?”
“글쎄, 내가 아냐? 선악공성의 장소를 정하는 건 저 위에 있는 마왕급 악마들이나 대천사들이라던데. 하멜이 갑자기 탐이라도 났나 보지.”
안현수의 말에 우성은 들고 있던 빵을 입안에서 우물거리며 중얼거렸다.
“탐이 날 만 하지.”
“그렇겠지? 벨제뷔트가 있으니까.”
성마검(聖魔劍) 벨제뷔트.
그것은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천사 미카엘이 성검으로 바꾸려던 검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최고악(最高惡) 벨제뷔트의 반쪽이자, 그의 운명을 동반하는 물건이기도 했다.
천사들은 하멜에 성마검 벨제뷔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천사들이 선악공성의 장소를 하멜로 정한 이유는 뻔히 보였다.
성마검 벨제뷔트의 회수.
이것 외에는 생각해 볼 수 있는 게 없었다.
“어쩔 거냐?”
“뭘?”
“다음 선악공성, 참여할 생각이지?”
안현수의 질문에 혜미와 혜정은 깜짝 놀랐다.
“우리가?”
“우리가요?
보통 플레이어들이 선악공성에 참여하는 회 차는 평균 3회 차 이상이었다. 간혹 성장이 빠른 4, 5회 차 플레이어들이 선악공성에 참여하곤 했지만, 그런 경우는 드문 편이었다.
가장 처음 아포칼립스를 시작한 1회 차 플레이어들을 비롯해 실력 있는 2회 차 플레이어들까지 참가하는 아포칼립스에서 가장 큰 전쟁터. 그런 곳에 신규 플레이어인 자신들이 참가한다니, 혜미와 혜정은 전혀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이미 우성이 오기 전 식사를 거의 끝마친 안현수는 식기를 내려놓았다. 무거운 이야기가 시작된 후, 혜미와 혜정은 식사를 더 잇지 못하고 대화를 경청하고 있었다.
“잘 생각해 봐. 이제 얼마 뒤면 우리도 신규 플레이어 딱지를 떼어낸다.”
“그… 렇지.”
한 회 차가 넘어가는 시간은 현실에서의 3개월. 아포칼립스에서의 300일이었다. 일행이 아포칼립스를 시작한 것도 꽤 시간이 흘러, 이제 곧 다음 회 차가 시작될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난 우리 성장이 다른 플레이어들에 비해 너무 비약적으로 빠르다고 생각해. 우성이나 나도 그렇고, 혜미와 혜정이 너희들도 신규 플레이어들과 비교하면 수준이 달라. 아마 웬만한 3~4회 차 플레이어들과 비교해도 떨어지는 수준이 아닐 거야.”
“저, 정말?”
깜짝 놀란 혜미는 눈을 깜박이며 되물었다. 고 회 차 플레이어들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정확하게 그녀들의 수준을 짚어준 안현수의 말을 선뜻 믿기가 힘들었다.
“알다시피 고 회 차로 올라갈수록 성장의 속도는 느려진다. 스텟의 상승 속도도 그렇고, 스킬 레벨이나 숙련도도 그렇고. 그래서 난, 우리가 고 회 차 플레이어가 되기 전에 보다 빠르게 성장했으면 해. 그리고 그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선악공성이고.”
안현수의 말은 우성이 지금껏 생각해 오던 것들이었다. 서로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 정도는 평소에도 느끼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이 정도까지 생각이 겹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다음 번 선악공성은 우리가 신규 플레이어라는 딱지를 떼어낸 후일 거야. 그 때면 우리도 선악공성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이 생겨. 난, 우리 모두가 선악공성에 참여해서 성과를 거두고 이 아포칼립스에서 확실히 자리를 잡았으면 한다.”
“으음…….”
선악공성은 꽤나 나중의 일로 생각하고 있었던 건지, 혜미와 혜정은 꽤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혜미와 혜정은 천사 진영에서 플레이어들과 싸우는 것도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아했다. 포인트를 벌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내내 표정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이 죽고 죽이는 전쟁터라는 장소는 그녀들의 성격과 어울리지 않았다.
고민이 필요하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녀들의 결정은 우성과 안현수를 따라가게 될 것임이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맞는 선택이었으니까. 선악공성은 혜정의 병을 고치기 위해 필요한 포인트를 획득할 수 있는 최고의 장소였다.
‘신규 플레이어라…….’
아포칼립스를 시작한지 약 250일.
아포칼립스에서 50일, 현실에서의 닷새.
다음 회 차가 시작될 날이, 서서히 코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