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플레이어-135화 (135/258)

135화

‘그 분?’

여기서 루시퍼가 말하는 ‘그 분’이 누구를 뜻하는지 눈치 못 챈다면 어딘지 모자란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생각 외일 정도의 극존칭에, 귀가 의심스러웠다.

“혹시 그 분이… 아포피스를 말하는 겁니까?”

“‘님’자를 붙이도록 해라. 적어도 내 앞에서는. 안 그러면, 죽이고 싶어진다.”

반응으로 보아 확실했다. 루시퍼가 아포피스를 안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무엇보다 마왕에게도 굽히지 않는다는 루시퍼가 이리 존칭을 중요시 하니 아포피스의 존재가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아피포스… 님과 아는 사이입니까?”

평소처럼 얼떨결에 ‘아포피스’라고 말하려던 우성은 황급히 뒤에 ‘님’자를 붙였다. 방금 전 루시퍼의 말에 꽤 진득한 살기가 흘러 나왔었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말 한 마디 잘못 했다가는 그의 손에 죽을 판이다.

“알다마다. 나뿐만이 아니라, 아마 저급한 악마들이 아니고서야 그분을 모르는 악마는 거의 없을 거다.”

‘아포피스가 그렇게 유명했어?’

루시퍼를 비롯한 다른 마왕급 악마들과는 달리, 아포피스에 대해서는 어디에서도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더 플레이어’에서 수시로 아포피스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노력해 봤지만, 어떤 게시글도 올라와 있지 않았다.

그 때문에 한편으로는 마왕등급의 다른 마검들과는 달리 별로 보잘 것 없는 악마의 검이 아닐까도 의심했었다. 하지만 루시퍼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아포피스는 다른 마왕급 악마들 수준이 아닌, 그보다 더 높은 수준의 어떤 악마일지도 모른다.

3대 마왕이라는 디아블로와 사탄, 벨제뷔트와 동급, 혹은 그 이상의 악마.

어쩌면 악마가 아닌 진짜 신(神)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아포피스님은 어떤 악마입니까?”

“내 대답을 바라기 보다는, 그 분의 반쪽부터 제대로 다뤄라. 그럼 알게 될 지도 모르지.”

우성은 새삼스레 아포피스를 들어 올려 검신을 살폈다. 평소처럼 검붉은 색으로 반짝거리고 있었지만, 방금 전까지 피를 머금고 있어서인지 언뜻 핏빛이 더 강렬하게 느껴졌다.

진(眞) 마검 아포피스.

처음 반(半) 마검에서 한 단계 성장하긴 했지만, 우성은 이것이 아포피스의 최종 단계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아포피스가 성장해야만 함께 성장하는 다른 스킬들도 있었고, 무엇보다 오더가 아포피스의 다음 단계가 있음을 확인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아포피스의 최종 단계가 무엇인지가 궁금했다. 지금껏 어디에서도 진(眞) 마검의 다음 단계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루시퍼가 보통 악마도 아니고, 떼를 쓴다고 해서 알려주지 않던 걸 알려주진 않을 것 같았다. 결국 우성은 루시퍼에게 아포피스에 대해 듣는 것을 포기했다.

“아무튼 마기는 제대로 네 것으로 만든 모양이군. 생각보다 적은 양이긴 해도 말이야.”

“아닙니다.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부족하던 마기 스텟이 무려 15스텟이나 올랐는데, 만족하지 못한다면 그건 너무 큰 욕심이었다. 스텟 하나를 올리는데 얼마나 노력이 필요한지 알아가고 있는 만큼 이번 보상은 단순히 대박이라는 말로 마무리 지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럼 이제 돌아가라. 아까부터 이 근처에 있는 놈들이 너희를 노리고 있으니. 아마 내가 사라지면, 단숨에 들이 닥칠 거다.”

“근처에……?”

“여긴 중간지역이거든. 너희가 상상도 못한 괴물들이 사는 곳이란 거지. 너희들 때문에 근처에 있던 놈들을 멀리 쫒아버렸었는데, 겁도 없이 다시 돌아왔군. 그것도 쪽수를 늘려서 말이야.”

펄럭-.

네 쌍의 날개를 활짝 펼치며 루시퍼가 숲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그의 발걸음에 화답하듯, 숲속에서 섬뜩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카아아아아-!

아우우우우-!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괴물의 울음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최소 두 가지 종류 이상의 괴물들이 사방에 퍼져, 루시퍼와 일행을 둘러 싸고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 보면 루시퍼가 의도적으로 근처의 괴물들을 쫒아 버렸다는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물들은 쪽수를 더 채워 루시퍼를 찾아왔다. 지능이나 생존 본능이 떨어지는 저급한 괴물이라면 모를까, 중간 지역에 서식하는 괴물이라면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는 건 결국 루시퍼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와 싸우기 위해서 돌아왔다는 것이다. 겁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중간지역에 서식하는 괴물들이 강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감히 루시퍼와 맞서 싸울 생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얼마나 강한 존재들인지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돌아가란 겁니까?”

“아, 맞아. 내가 돌려보내 줘야 하는 거였지. 하하하.”

카아아아아-!

다시 한 번 숲을 가득 메우는 울음소리가 터져 나온 직후, 루시퍼의 몸에서 감당 못 할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방금 전까지 흘러나오던 마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은 마기에 우성과 전현승을 제외한 일행의 숨이 턱 막혔다.

“그럼 잘 들 가라, 이방인들아.”

슥-.

스슥-.

루시퍼의 손짓에 전현승을 처음으로 하나 둘 일행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루시퍼의 힘으로 잠시 막아 두었던 리턴 코드(Return Code)의 효과가 발동된 것이다.

왔던 순서 그대로 하나 둘 사라지는 일행들을 지켜보던 루시퍼가 시선을 돌려 자신을 노려보는 숲 속의 괴물들을 노려봤다. 희번득한 새빨간 눈동자들은 하나같이 이 중간 지역에 서식하는 괴물들. 아니, 괴물이라기보다는 영물들이라고 보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너희도 안타깝게 됐다. 원래라면 살려 보내 줄 텐데, 지금은 내가 기분이 너무 좋으니.”

루시퍼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마기가 더욱 살벌해졌다. 스멀스멀 연기처럼 네 쌍의 날개를 통해 흘러나온 마기는 허공을 타고 괴물들을 덮쳤다.

그때서야 괴물들은 생각할 수 있었다. ‘뭔가 잘못됐다’고. 하지만 이미 루시퍼를 향해 드러낸 어금니와 발톱은 다시 집어넣기엔 늦은 후였다.

이젠, 그들이 아닌 루시퍼가 발톱을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지금은 내가 이 힘에 취해보고 싶은데… 고맙다. 적당히 시험해 볼 상대가 되어 줘서.”

온 몸이 마기로 충만한 루시퍼는 예전보다 더욱 길어진 어금니를 드러냈다. 날개를 펄럭여 잠시 하늘로 떠오른 루시퍼의 몸이 숲의 안쪽으로 빠르게 향했다.

**

리턴 코드(Return Code)를 통해 돌아온 장소는 소도시 하멜의 우성의 집이었다. 고작 사흘 만의 귀환이었지만 워낙 변한 게 많아서인지 꽤나 오랜 만처럼 느껴졌다.

하멜로 돌아온 전현승은 우성에게 검에 대해서 물었다. ‘아포피스’가 어떤 악마인지, 대체 왜 루시퍼가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인지, 루시퍼의 마기를 통해 몇 포인트의 마기 스텟을 얻게 됐는지.

하나같이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들이었다. 아포피스가 어떤 악마인지는 우성도 잘 알지 못했다. 그저 검의 설명을 통해 ‘태양신 라’의 대적 악마라는 것만이 우성이 아는 전부였다. 아포피스가 어떤 악마인지 모르니 루시퍼가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도 알 수 없다.

더군다나 몇 포인트의 마기 스텟을 얻게 됐는지는 철저히 비밀에 붙일 생각이었다. 애초에 우성은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자신을 크게 알릴 생각이 없었다. 사실 이렇게 전현승과 알게 됨으로서 자신에 대한 소문이 퍼져 나갈까도 걱정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어떻게든 강해지고, 활동의 범위를 넓혀 나가면 소문이 퍼짐은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만약 알려 지게 된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 마검은 어떤 악마의 것인지 등은 최대한 비밀로 하고 싶었다.

대답하기 곤란하다는 우성의 거절에 전현승은 아쉬움을 뒤로했다. 플레이어의 스텟이나 보상과 관련된 문제는 민감했다. 자칫 알려주기를 종용했다가는 강요가 될 수 있었고, 분쟁거리가 될 수도 있다.

“그럼 앞으로 종종 들리겠습니다. 에든 덕분에 좋은 인연을 만든 것 같아 기분이 좋네요. 아, 혜미씨와 혜정씨와도 꼭 가까운 시일 내에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에는 제가 술이라도 한 잔…….”

“난 개 밥이냐? 보이지도 않아?”

일행들 중 전현승의 인사에서 쏙 빠져버린 안현수는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그때서야 전현승은 아차 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 계셨군요.”

“……와, 진짜 재수 없다. 알고는 있었지만.”

한동안 멀쩡하다 싶었는데 퀘스트가 끝나자 바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할 땐 하는 성격’이라는 것은 달리 말하면 ‘안 할 땐 안 하는 성격’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었다. 결국 전현승은 ‘안 할 때’는 한없이 가볍고 여자를 심하게 밝히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우성도 전현승과 같은 실력 있는 플레이어와 친분을 맺어 두어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해 좋은 쪽으로 인사를 나눴다. 이번에 본 전현승은 소문과는 달리 2회 차 플레이어의 실력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아직 1회 차 플레이어를 본 적은 없지만 전현승이 보통의 1회 차 플레이어보다 강하면 강했지 약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전현승과 에든.

서로 꽤 친분이 있어 보이는 두 사람은 안현수와 혜미, 혜정을 제외한 우성의 유일한 인맥이었다. 에든이야 평범한 2회 차 플레이어로 생각할 수 있었지만, 전현승은 무려 마검 사용자 플레이어였다. 아마 추후 그와 인연을 맺어둔 것으로 도움이 되는 일이 있을 것이다.

안현수와의 푸닥거리가 끝나고, 전현승은 우성과 짧은 인사를 나눈 후 우성의 집을 나섰다. 하멜과 드루드먼을 오가며 활동하는 에든과는 달리, 전현승과 에릭은 원래 드루드먼에서 활동하던 플레이어들이었다.

더군다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전현승은 이참에 드루드먼에서 대도시로 활동지를 바꿀 생각이라고 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에든도 함께였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에릭이 자신도 함께 가겠다고 했는데, 의외로 전현승은 흔쾌히 그의 합류를 허락했다. 나중에 우성이 따로 이유를 물어 보니, ‘재미있잖아요’라는 대답이 나왔다.

‘오래간만에 조용해졌군.’

원래 있던 일행인 안현수와 혜정, 혜미만 남게 되자 집 안은 정적이 흘렀다. 일곱 명이었던 일행이 네 명으로 줄어들자, 요 며칠 동안 들리던 대화는 절반 이하로 내려갔다.

항상 시끄럽게 부딪히던 안현수와 전현승의 대화가 사라진 것도 있고, 그 사이에 끼어들어 안달이던 에릭이 없기 때문도 있었다. 세 사람이 재미있게 싸우고 있으면 우성과 에든은 그 모습을 나란히 앉아 재미있다는 듯 지켜보았고, 혜미와 혜정은 전혀 다른 주제로 수다를 떨었다.

사실상 가장 시끄럽던 전현승과 에릭이 빠지자, 조용해 질 수밖에 없었다. 꼭 그게 나쁘다는 것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금 아쉬운 마음도 들긴 했다.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물론, 다시 만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들과 함께 활동할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면 되는 일이다. 그리고 우성은 이미 스스로 부끄럽지 않을 만큼 강해졌다 생각했고, 조만간 그들과 같은 위치에 나란히 설 수 있을 거라고 예감했다.

“이 집, 팔아버려야겠어.”

전현승, 에든, 에릭을 떠나보낸 우성이 처음 꺼낸 말이었다.

“뜬금없이 그건 무슨 소리냐?”

“이제 활동할 도시를 옮길 때가 되지 않았어?”

하멜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었다. 처음 아포칼립스를 시작하고 시작의 마을을 벗어나 처음 정착한 도시가 바로 하멜이었다.

다른 신규 플레이어들은 이제야 겨우 하멜에 하나 둘씩 들어오고 있었지만, 우성을 비롯한 다른 일행들은 아니었다.

이미 하멜에서 얻을 건 모두 얻었다. ‘마수의 숲’ 퀘스트를 통해 라이프(Life)를 비롯한 포인트와 부수적인 보상을 챙겼고, 굵직한 퀘스트도 모두 얻었다. 얼마 전까지 사냥하던 결과, 마수의 숲에 서식하는 몬스터들은 더 이상 일행의 수준에 맞지 않았다.

“어디로 가려고?”

안현수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듯 이유는 묻지 않았다. 우성은 이럴 때 보면 안현수는 자신과 참 생각이 비슷하다고 느꼈다.

이미 생각해 둔 도시가 있던 우성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드루드먼. 연금술사들의 도시로 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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