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짧지 않은 고민 끝에 내린 대답에 루시퍼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내심 그 역시 우성에게 자신의 마기를 주면 어떤 반응일까, 어떤 결과가 나올까 궁금했던 것이다.
“괜찮은 대답이다.”
스스스스-.
루시퍼의 몸에서 대량의 마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탁한 검은색의 진한 마기는 일행을 피했지만, 워낙 많은 양이라 절로 몸이 떨릴 정도였다.
사방으로 흩어졌던 마기는 곧 루시퍼의 손으로 모여들었다. 어디서 난 것인지 모를 작은 병이 루시퍼의 손에 생겨나고, 곧 흩어졌던 마기는 병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부시불식간에 일어난 일에 일행들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대량의 마기는 병 안으로 들어가더니 액체로 화했다. 검은색에 가까운 보라 빛의 액체는 연금술사가 만들어낸 물약 같아 보이기도 했지만, 실상은 훨씬 독에 가까웠다.
“받아라.”
루시퍼는 손을 뻗어 우성에게 병을 건넸다. 엄지손가락 크기 정도의 작은 병은 가까이서 보니 보라색 보다는 짙은 남색에 가까웠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병을 받아든 채 루시퍼를 빤히 바라봤다. 일단 먹으라고 준 것 같긴 한데, 이게 뭔지를 모르겠다.
“내 마기를 응축한 액체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아마도 네가 상상도 못할 마기가 들어 있을 거다. 사실상 약이라기보다는 독에 가깝지.”
마기는 생명을 죽이고, 신력은 생명을 살린다. 누구나가 알고 있는 정설인 만큼, 마기를 응축한 액체는 그 어느 약보다 완벽한 독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마왕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는 루시퍼의 마기가 응축된 액체였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입을 가까이 대는 것만으로도 죽을 수 있는 액체가, 우성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이다.
“마셔라. 네가 선택한 것처럼.”
“……마기를 전해준다는 게,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었네요.”
“그럼 무슨 거창한 걸 바란 거냐? 그거 잘 먹으면, 죽거나 흡수하거나 둘 중 하나일 거다. 물론 보통 인간은 반드시 죽겠지만.”
큰 기대를 한 건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너무 간단했다. 고작 마기를 응축한 액체를 마시는 게 끝이라니. 적어도 어떤 마법이라도 부릴 줄 알았다.
‘뭘 기대한 거냐.’
오히려 간단한 거라면 번거롭지 않고 좋았다. 우성은 병을 위로 들어 올렸다. 루시퍼에게 ‘독’이라는 말을 들어서 그런지 선뜻 마시기가 두려워 지는 게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보상을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두 개의 손가락으로 병을 집어든 우성이 눈을 감고 입가에 병을 가져갔다.
꿀꺽-.
입안에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액체의 느낌은 마치 도수 높은 술처럼 화끈했다. 그것도 우성이 지금껏 한 번도 마셔보지 못한, 아주 화끈한 술 같았다.
목구멍을 넘어가 몸속으로 들어간 액체는 다시 한 번 변신했다. 도수 높은 술보다 더 강렬한, 마치 용암 같은 뜨거움이 느껴졌다. 가슴을 꽉 움켜쥐었지만, 딱딱한 갑옷에 막혀 가슴을 쥐어뜯을 수도 없었다.
[‘용액 ? 루시퍼의 마기 정수’를 복용하였습니다.]
[몸속의 마기와 루시퍼의 마기가 부딪힙니다.]
[아포피스의 힘이 반응합니다. 보다 상위의 힘이므로, 일부 상향 저항 판정을 받습니다.]
눈앞에 연속으로 떠오른 메시지.
하지만 우성은 그것을 미처 다 확인하지 못했다. 몸속에 가득 퍼진 열기에 바닥을 뒹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복용한 지 얼마나 됐다고, 루시퍼의 마기는 벌써부터 우성의 몸을 헤집으며 괴롭히고 있었다.
“아아아아악-!”
**
눈은 까맣게 감겼지만, 고통은 생생했다. 차라리 정신을 잃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처음으로 높은 정신력 스텟이 원망스러워졌다. 우성의 정신력 스텟과 더불어 갑작스러운 <불굴의 의지> 특성의 발동은 희미해지는 정신을 붙잡아주었다. 아포칼립스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그토록 고마웠던 <불굴의 의지>가 원망스러웠다.
무언가 다급한 음성이 귀에 들어와 박혔지만, 정작 어떤 말을 하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귀에 들어오는 말소리도 사라졌다. 우성은 그 순간에도 바닥에 몸을 뒹굴며 뜨거워진 몸을 식혔다. <불굴의 의지> 덕분인지 처음보다는 고통이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아직 참지 못할 만큼 고통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힘이고 뭐고, 차라리 그냥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무렵.
차차 익숙해 진 건지, 아니면 약발이 다 한 건지 서서히 고통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뒹굴던 몸도 안정을 찾았고, 힘이 빠져나가 축 늘어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아직까지도 아슬아슬하게 붙잡혀 있는 정신은 이어지고 있었다. 제발 쓰러지면 좋겠다고 속으로 백 번은 넘게 외친 것 같았다. 여전히 몸은 후끈하게 덥혀져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전처럼 뜨겁진 않았다.
고통이 줄어듬에 따라 서서히 귀가 열렸다. 서서히 다른 일행의 말소리가 들렸다. 덩달아 풀로 깔려 있는 숲의 푸른색 땅이 눈앞을 가득 메웠다.
“으으으……”
입을 벌리자 절로 새어 나오는 신음. 언제부턴가 비명조차 지르지 않고 있었다. 간신히 쓰러져 있던 몸을 일으켜 뒤집자, 이제는 땅이 아닌 하늘이 보였다.
“어! 정신 차렸나 보네.”
안현수의 목소리. 평소의 방정맞은 말투가 아닌, 제법 걱정이 담겨 있는 목소리였다. 하긴, 이렇게 고통스러워 했는데 걱정을 안 했으면 일행도 아니지.
조금 떨어져 있던 일행은 우성이 몸을 뒤집자 우르르 몰려왔다. 아무래도 우성이 바닥을 뒹굴던 사이, 하나 둘씩 루시퍼에게 보상을 받은 모양이었다.
“오빠! 이제 좀 괜찮아?”
혜미의 목소리. 그녀의 표정에도 역시 한 가득 근심이 어려 있었다. 아마 가장 크게 걱정한 사람이 바로 혜미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목소리는 계속 들렸지.’
워낙 오래 고통스러워하다 보니, 보상을 받지 못한 다른 일행들도 하나 둘 루시퍼에게 보상을 받은 모양이었다. 하긴, 대충 느끼기에도 몇 시간은 지난 것 같았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요. 루시퍼가 그러지 않았습니까? 우성씨는 한참 전에 안정을 찾았어요.”
별 걱정을 다 한다는 투의 에릭의 말에 혜미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표독스러운 눈으로 에릭을 바라보며 혜미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래도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아니 그럼, 멀쩡한 사람을 뭐 하러 걱정합니까? 괜찮다잖아요.”
“괜찮은지 아닌지 그쪽이 어떻게 알아요?”
“그쪽? 아니 이 보세요, 루시퍼가 분명…….”
“아, 됐어요. 됐어.”
짜증난다는 듯 말을 자르며 혜미가 우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우성이 듣기엔 둘 다 ‘별 걸 다 따진다.’싶었는데, 혜미에게는 그게 무척 중요했던 모양이었다.
“몸은 어때?”
“좀… 안 괜찮은데.”
“거 봐. 안 괜찮을 줄 알았어. 삼십 분이 넘게 비명을 질러댔는데, 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어?”
삼십 분이 넘게?
하긴 목이 조금 아픈 느낌이긴 했다.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고. 하도 오래 소리를 질러댔더니, 목이 나갔나보다.
더군다나 꽤 오래 몸을 뒹굴고 있었더니,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축 늘어진 몸을 간신히 일으키며 우성이 물었다.
“몇 시간이나 지났어?”
“한 시간 쯤?”
“한 시간?”
적어도 세 시간은 지났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성은 한시도 정신을 잃었던 적이 없었다. 물론 계속 시간을 확인한 건 아니었지만, 우성이 느낀 체감상의 시간은 결코 한 시간이 아니었다.
‘시간 한 번 더럽게 안 갔네.’
우성은 늘어진 몸을 마저 일으켰다. 일행들 모두가 우성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풀숲에 앉아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하늘까지 높게 뻗은 거목에 기대어 있는 루시퍼가 보였다.
“다른 일행들도 다 오빠처럼 보상을 받았어. 루시퍼는 오빠가 일어나면 결과를 확인하고 싶다고 기다리고 있는 거고.”
“다들? 벌써?”
하긴, 한 시간 정도면 보상을 챙기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앞의 혜미와 에릭의 대화를 들어 보면, 우성의 상태가 안정되었다는 루시퍼의 말에 일행이 안심하기도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루시퍼가 우성을 기다린 건 분명 의외였다. 우성에게 마기의 정수를 건네준 것으로 루시퍼의 보상은 끝이났는데도 그는 결과를 지켜보겠다고 남았다.
‘아포피스와 연관이 있나?’
루시퍼의 반응을 보면 분명 아포피스와 무언가 연관이 있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아포피스의 마기를 가지고 있음으로서 루시퍼의 마기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루시퍼의 반응을 보면 둘이 아는 사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 그러고 보니 방금…….’
처음 ‘루시퍼의 마기 정수’를 복용했을 때 떠오른 메시지 중 하나.
‘상위의 힘?’
루시퍼의 마기보다 상위의 힘이라는 메시지가 있었다. 그것은 지금껏 막연하게만 생각해 오던 아포피스의 존재에 확신을 가지게 해 주는 문구였다.
지금껏 우성은 아포피스를 마왕과 같은 등급의 악마로 봐야 할지, 아니면 보다 높은 등급의 악마로 봐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태양신의 대적 악마라는 점에서 이미 왕(王)등급의 악마는 아닐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진짜 신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방금 전 떠오른 문구에서, 우성은 확신할 수 있었다.
아포피스는 보통 악마가 아니다. 마왕급의 악마들 역시 결국에는 악마들 중에서 최상위에 꼽히는 악마일 뿐, 악마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상위의 존재라면, 마왕을 초월하는 어떤 존재인 것이다.
잠시 다른 생각에 빠졌던 우성은 몸속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그토록 고통스러웠던 까닭은 루시퍼의 마기를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대체 스텟이 얼마나 상승했다고.’
[플레이어 정보]
이름 : 우성
직업 : 아포피스의 대리자
국적 : 대한민국
진형 : 악마
성별 : 남자
칭호 : 천사를 베는 검
클레스 : S
[능력치]
- [근력 : 58] [민첩 : 56] [체력 : 70] [맷집 : 54] [반사능력 : 47] [마력 : 61] [정신력 : 85] [마기 : 39] [PP : 1860]
: (- 1000p)
* 플레이어 특성 : 불굴의 의지 Lv.10 <상세정보>
* 업적 : 죽어가는 숲의 생존자, 숲의 입구를 열다, 개미소굴을 소탕하다, 대천사의 씨앗을 제거하다, 대천사의 분신을 제거하다.
* 포인트 : 32485p
* Lv. 포인트 : 8570
* Life : ******
아직 새로 얻은 업적을 착용하지 않아 다른 스텟의 변화는 없었지만, ‘마기’ 스텟의 변화는 확실했다. 확연하게 변한 마기 스텟의 변화에 우성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39포인트?’
보상을 받기 전, 우성의 마기 스텟은 24포인트였다. 애초부터 있던 스텟이 아니기도 했고, 중간에 새로 생겨난 스텟인 만큼 다른 스텟들에 비해 능력치가 낮은 건 당연했다.
때문에 평소 중요한 스텟임에도 불구하고 우성의 마기 스텟은 낮은 포인트에 머물러 있었다. 따로 스텟의 상승 비율이 큰 편도 아니었고, 근력이나 민첩처럼 확연한 수련 방법도 없었기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이번 퀘스트 보상으로 바닥을 기던 마기 스텟이 확연히 상승했다. 스텟 포인트 1, 2 정도가 보이는 변화도 눈에 보일 텐데, 무려 15포인트의 상승이라면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사뭇 기대되었다.
‘어쩐지 몸이 평소랑은 좀 다르긴 한데.’
민첩 스텟이 늘어났을 때처럼 몸이 가볍다는 등의 변화는 없었지만, 마력 스텟의 상승처럼 몸 안에 무언가 변화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결코 나쁜 변화는 아니라, 우성은 이 정도면 충분히 흡족스러웠다.
스텟 포인트 15개. 거기에 새로 얻은 업적 보상으로 모든 스텟 포인트와 추가적인 다른 자유 스텟 포인트까지. 물리적인 보상은 없다지만 이번 퀘스트로 인해 얻은 스텟 포인트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이제 다 끝났나 보지?”
막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을 때, 거목에 기대어 있던 루시퍼가 다가왔다. 마기 스텟이 늘어났기 때문인지 우성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루시퍼를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덕분입니다.”
“생각보다는 별로 강해진 느낌은 아닌데. 웬만한 군주들보다는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군주급 악마라면 72악마 군주인 볼락 정도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 정도는 꿈도 꾸지 않았던 우성은 루시퍼의 말에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도 갔다. 다른 누구도 아닌, 마왕과 견줄 만하다는 루시퍼의 마기를 받아들였으니. 아마도 우성이 그 정도까지 성장하지 못한 건 ‘플레이어’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런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루시퍼가 우성의 옆에 떨어져 있는 아포피스를 바라봤다.
“그럼, 그 분께서도 만족해 하시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