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나가(Naga) 한 마리를 소환하는데 필요한 포인트는 400포인트였다.
400포인트를 벌기 위해서는 웬만한 C등급 퀘스트 2개는 완료해야 한다. 아니면 작은 던전의 보스를 잡거나. 결코 적은 포인트라고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우성이 가지고 있는 포인트는 400포인트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물론 그렇다고 그 포인트를 펑펑 써댈 수는 없겠지만, 여유가 있는 만큼 위급한 상황에 다수의 나가를 소환해 싸울 수 있을 만큼은 되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중요한 퀘스트 도중. 그것도 최종 보스라고 할 수 있는 카시엘을 상대하던 중이었다.
나가의 능력치가 불확정한 때라면 모를까, 한 마리의 나가를 소환해 그 능력이 꽤 쓸 만하다는 걸 확인한 이상 한두 마리 정도 더 소환하는데에는 그리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번 소환을 통한 가장 큰 수확이 있었다.
‘마법 저항력이 상당한데?’
카시엘이 뿌려댄 낙뢰를 정면으로 맞았으면서도 나가는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지 않았다. 매끈하던 녹색의 피부가 살짝 검게 그을린 것 같긴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물론 여러 번을 더 얻어맞는다면 이야기야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가의 마법 저항력이 높다는 걸 확인한 이상, 카시엘을 상대하기가 한결 수월해질 것이다.
-주인, 명령을.
우성을 보호했던 건 소환물으로서의 본능이었던 걸까? 소환된 직후 우성을 보호했던 두 마리의 나가는 곧장 명령을 물어왔다.
명령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우성은 아포피스를 들고 앞으로 성큼 발을 내딛었다.
“저기 있는 날개 여섯 짝 달고 있는 비둘기. 나랑 같이 가서 죽이자.”
-알았습니다, 주인.
우성과 두 마리의 나가가 카시엘을 향해 달려들었다. 한 마리의 나가는 천사들로부터, 그리고 카시엘의 낙뢰로부터 혜정과 혜미를 지키기 위해 남겨두었다.
카시엘의 신경은 대부분 전현승에게로 쏠려 있었다. 일행들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나기도 했고, 마검 루시퍼를 들고 있는 당사자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아무리 카시엘이라 하더라도 전현승을 상대로 방심할 순 없었다. 처음 한 번 낙뢰를 얻어맞았던 전현승은 그 뒤로 구름이 번쩍일 때마다 이리저리 낙뢰를 전부 피해내고 있었다.
단순히 움직임이 빨라서가 아닌, 판단력과 반사능력이 좋기 때문이었다. 물론 피해내는 게 고작이라 전현승도 어찌 카시엘을 향해 혼자서 달려들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카시엘의 상대는 전현승 한 명만이 아니었다.
꽈릉-!
구름이 번쩍이며 낙뢰가 떨어져, 우성은 뜀박질을 멈추고 옆으로 우회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처음과는 달리 분명하게 낙뢰가 떨어지는 위치나 타이밍을 잡을 수 있었다.
많은 신경이 전현승을 향해 쏠려 있던 덕분인지, 우성은 가장 먼저 카시엘을 향해 다가갈 수 있었다. 물론 그 이유 중에는 ‘나가(Naga)’를 방패처럼 사용한 까닭도 있었다.
‘닿았다!’
우성의 검이 위에서 카시엘의 머리를 내려쳤다. 순식간에 머리를 쪼갤 듯, 우성의 검이 일도양단(一刀兩斷)의 기세를 품었다.
이번 기회에 카시엘의 머리를 베어내려던 우성의 기대가 깨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카시엘의 손에 들린 짧은 단창(短槍)이 우성의 검을 막아낸 것이다.
“다가오기만 하면, 날 어찌할 수 있을 것 같더냐?”
휘리익-.
퍼억-!
순식간에 빙글 돌아간 단창이 우성의 배를 후려쳤다. 뒤로 몇 미터씩이나 날아가며 우성이 얻어맞은 배를 양 손으로 감쌌다.
“커억!”
“귀찮은 이방인들이…….”
우성의 숨통을 끊으려 낙뢰를 쏘아내려 했지만 카시엘은 그럴 수 없었다. 바로 앞에서 전현승이 검을 들고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쨍, 쨍쨍-!
가까이 다가온 전현승은 자신의 모든 능력을 동원해 카시엘을 공격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은 빠른 속도로 검이 움직였지만, 카시엘은 그리 어렵지 않게 전현승의 검을 모두 막아냈다.
‘저 영감, 늙은 거 맞아?’
얻어맞은 배를 부여잡으며 우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겉으로 보기엔 힘없고 늙은 천사일뿐인데, 하늘에서 낙뢰를 마구 뿌려대는 것이나 단창을 휘두르는 힘이나 절대 늙은 천사라고 보기 힘들었다.
늙어도 천사장이라는 건가? 카시엘은 생각 이상으로 강했다. 루몬의 정수 갑옷이 물리 공격에 대한 방어력이 높아서 다행이지, 잘못했으면 뼈 하나둘 정도는 부러졌을 것이다.
겨우겨우 낙뢰를 피해 접근했으면서도 전현승은 카시엘을 이기지 못하고 계속해서 밀리고 있었다. 아무리 전현승이라 하더라도 일대일의 상황에서 천사장을 이기는 건 무리인 모양이었다.
“비켜, 비켜-!”
그 때, 익숙한 목소리가 높은 곳에서 들려왔다. 동시에 거대한 그림자가 카시엘과 전현승을 가리기 시작했다.
성체가 된 용을 올라탄 안현수였다. 전현승은 무언가를 눈치 채고는 검을 크게 휘둘러 카시엘과 거리를 벌렸다.
거리가 멀어지면 유리한 쪽은 자신이기에 카시엘은 떨어지는 전현승을 쫒지 않았다. 그가 막 손을 들어 낙뢰를 부르려던 때, 화끈한 열기가 신전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브레스?”
싸움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카시엘이 당황했다.
브레스는 성체 용의 권능(權能)이었다. 수만 년을 산 거대한 용은 브레스 한 번에 성 하나를 날려버릴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안현수가 불러낸 용은 성체라고 하기엔 아직 작은 편이었다. 하지만 헤츨링을 벗어나, 성체에 가까워진 만큼 무리를 한다면 브레스 한 방이야 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처음부터 용의 출현에 ‘아직 성체도 되지 못한 용’이라며 무시했던 카시엘은 브레스의 등장에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손을 들어 막 낙뢰를 떨어뜨려 용을 제압하려 했지만, 이미 용의 입을 벌어지고 있었다.
크아아아아-!
화르르륵-.
새빨간 거대한 용염(龍炎)이 쏘아졌다. 제 아무리 천사장이라 할지라도 정면으로 맞는다면 멀쩡할 순 없는 불길이었다.
카시엘은 낙뢰를 떨어뜨리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몸을 보호했다. 투명한 신력으로 만들어진 막이 그의 몸을 보호했다. 용염이라 하더라도 녹여낼 수 없는 단단한 막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선택은 아무 소용없는 짓이었다.
왜냐하면, 애초에 안현수의 용이 쏘아낸 불길은 카시엘을 노리지 않았으니까.
“으아아아악!”
“피, 피해!”
불길은 카시엘과 정 반대 방향의, 천사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쏘아졌다. 이미 말을 맞춘 상태인지 혜미와 혜정, 에든, 에릭은 한데 모여 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혜정의 보호에 비교적 어설프긴 하지만 혜미의 방어 마법이 겹쳐진 보호막이었다.
하지만 일행에 비해, 천사들은 용염으로부터 몸을 보호할 방책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맨몸으로 부딪히기에 용이 뿜어낸 브레스는 일반 천사가 버텨낼 수 없는 것이었다.
비교적 브레스의 범위 가장자리에 있는 천사들을 겨우겨우 몸을 피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천사들이 훨씬 많았다. 브레스에 직격당한 천사들은 몸이 시커멓게 타 죽었고, 열기에 휩싸인 천사들도 적지 않은 화상을 입었다.
“네 노옴-!”
카시엘의 눈이 뒤집혔다. 자신이 아닌, 다른 천사들이 표적이 되었다는 사실이 그의 화에 불을 지폈다.
신전의 내부가 번쩍였다. 구름이 시커멓게 물들며 안현수와 용 위로 움직였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낌 안현수는 타고 있던 용을 향해 소리쳤다.
“아래로 내려가!”
콰릉-!
시커먼 구름이 빛나며, 성체의 용을 향해 떨어졌다. 용은 안현수를 지키고자 날개를 접어 그를 감쌌다. 수십 가닥의 낙뢰가 한 점으로 합쳐졌다.
캬아아아아-!
한 점으로 합쳐진 낙뢰는 질기고 두꺼운 비늘과 가죽을 가지고 있는 성체 용이라 하더라도 버티기 힘든 것이었다. 낙뢰를 얻어맞은 용은 비명을 지르더니 그대로 바닥을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빠-!”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혜정이 깜짝 놀라 소리쳤지만, 그녀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녀가 소환한 데스 나이트(Death Knight), 에릭과 에든, 혜미는 남은 천사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카시엘을 상대하고 있던 전현승과 우성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앞뒤에서 달려들었다. 전현승이 훨씬 빠르기야 했지만, 우성에게는 세 마리의 나가가 함께 있었다. 나가의 힘은 거의 3회 차 플레이어에 버금갈 정도에, 뛰어난 마법 저항력을 가지고 있었다.
일행들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난 전현승과 우성. 두 사람이 앞뒤에서 각각 달려들자, 카시엘도 쉽게 볼 수만은 없었다.
더군다나 용을 격추시키느라 방금 전 낙뢰를 떨어뜨린 후였으니.
“귀찮은 것들.”
“과연 귀찮기만 할까?”
순식간에 검은 날개를 펄럭이며 다가온 전현승의 검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카시엘은 방금 전과 마찬가지로 단창을 꺼내어 응수했다.
하지만 상대는 전현승 한 명만이 아니었다. 바로 우성과 나가들이 뒤에서 달려온 탓에 카시엘은 전현승을 상대하는데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다.
쉬익, 쉬이익-.
우성의 검과 나가들의 창을 옆으로 피해내며 카시엘이 단창을 휘둘렀다. 그러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신력을 끌어 모아, 우성과 전현승을 향해 신력으로 만들어낸 뇌전을 쏘아냈다.
빠지지직-!
하지만 그럴 때면 어김없이 나가들이 앞으로 나섰다. 구름에서 떨어진 낙뢰도 큰 무리 없이 버텨내던 나가는 카시엘이 쏘아낸 뇌전을 막아주었다. 마법 저항력만으로 보자면 방패 대신 사용해도 될 정도였다.
물론 나가라고 해서 무적은 아니었다. 신력으로 이루어진 뇌전은 마기로 이루어진 나가의 몸을 점차 둔화시켰다. 나가가 카시엘이 쏘아낸 전류로부터 버틸 수 있었던 것도 더 상위의 악마인 ‘아포피스’가 만들어낸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고기방패 역할도 몇 번 남지 않았다. 하지만 나가들 덕분에 카시엘의 전류가 크게 위협적이지 않았고, 수적으로 훨씬 우세해진 만큼 상대하기도 한결 수월했다.
전현승을 선두로 우성과 세 마리의 나가는 카시엘을 상대로 밀어붙였다. 전현승이 워낙 강한 덕분도 있지만, 우성은 카시엘을 상대할 수록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역시.’
“천사장 급은 아니야.”
“닥쳐라!”
밀리고 있으면서도 카시엘은 우성의 말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카시엘의 세 쌍의 날개는 부러져 날 수 없었다. 그것은 누군가에 의해 부러졌다기보다는, 힘을 잃어 꺾인 것이었다.
부러진 날개에서 정상적인 힘이 나올 리 없었다. 카시엘의 신력은 두 쌍의 날개를 가진 엑시드급 천사들에 비하면 강했지만, 다른 천사장급 천사들에 비하면 부족했다. 즉, 카시엘의 신력은 엑시드급과 천사장급의 사이에 있다는 뜻이었다.
‘볼락과 비교하면, 너무 약해.’
만약 눈앞에 상대하고 있는 게 카시엘이 아닌 볼락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우성의 검이 닿는 일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박윤성을 제압한 그 힘은 감히 우성이 다가가기 어려운 것이었으니까.
지금의 카시엘은 볼락은 커녕, 박윤성과 비교해도 부족했다.
“난 루시퍼님의 천사장이다!”
“지랄, 넌 천사장으로는 빵점이야!”
푸욱-.
“크악!”
아포피스가 한 짝의 날개를 꿰뚫었다. 역린(逆鱗)을 건드린 탓에 빈틈을 보여, 그곳을 찌른 것이다.
우성은 날개를 찌른 검을 망설임 없이 휘둘렀다. 검을 크게 휘두르자, 카시엘의 날개 한쪽이 베어져 바닥에 떨어졌다.
서걱-.
툭-.
“끄아아아-!”
천사의 약점은 날개라는 말이 있다. 악마의 뿔처럼, 힘의 원천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천사에게 있어서 날개는 소중했다. 더욱이 천사에게 날개는 힘의 근원이자 상징이었다.
“네 이노옴-!”
“닭 날개 하나가 떨어졌으니, 이제 더 약해지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