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천사들이 신전을 나섰다. 처음 서른 명의 천사들이 밖으로 나가고, 이어서 마흔 명의 천사들이 뒤따라 떠나자 거대한 신전 안은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이제 신전 안에 남은 천사들은 서른도 채 되지 않았다. 원래 북적거리는 신전은 아니었지만, 지나치게 휑해진 신전의 모습에 카시엘은 속이 쓰렸다.
‘이번 일만 무사히 잘 넘기면…….’
다시 루시퍼 신전의 부흥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너진 신전의 위상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때를 위한 잠깐뿐인 모습이었다. 카시엘은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원래의 차분함을 되찾고자 했다. 평소 자신답지 않게 너무 성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차분히 가다듬었다. 처음과는 달리,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생각나지 않던 것들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이상하다.’
불길하다던 생각이, ‘이상하다’로 바뀌었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이상한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루시퍼의 검은 분명 진짜였다. 수 천 년 전, 직접 루시퍼를 곁에서 모셨던 만큼 그건 확신할 수 있었다. 다만, 카시엘의 의문은 그 옆에 있던 마검을 들고 있던 이방인이었다.
‘왜 굳이 마검을 넘기지 않은 거지?’
이방인들의 사고방식은 천사들과는 많은 부분에서 달랐다. 카시엘 역시 신전 밖에서 몇 번 이방인들을 만나본 적이 있었고, 그들이 귀한 장비에 목숨을 건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정말, 루시퍼님을 믿는 자들인가?’
사실 이방인들이 천사들이 섬기는 대천사를 진실하게 믿는다는 것도 이상한 말이었다. 이방인들은 신을 믿지 않으며, 믿는다 치더라도 천신일 것이지 대천사들은 아니었다.
얼마 전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이방인들은 종종 신전을 방문했다. 많은 이방인들이 인근 도시인 라키아에 머물고 있었고, 그들은 가까운 곳에 위치한 루시퍼 신전에 들르곤 했다.
대부분의 이방인들은 도시 안에 있는 우리엘의 신전을 방문했지만, 그들 중에는 일종의 ‘관광’식으로 신전을 찾아오곤 했던 것이다. 천사들의 발길이 끊긴 신전은 그런 이방인들의 방문도 적극 환영했다.
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진실하게 루시퍼를 믿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루시퍼 신전만이 아니라 어느 신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방인이라는 존재는, 신을 믿지 않는다.
‘그런데 왜?’
그 때는 루시퍼의 검에 눈이 멀어, 이방인들의 특성을 바로 떠올리지 못했다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방인들이 대천사를 믿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들자, 루시퍼의 뜻을 전하겠다는 말도 거짓처럼 느껴졌다.
아니, 거짓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은, 이 세상의 사람들이 아니니까.
‘그럼 대체 왜 그런 거짓말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이었다.
아아아악-!
**
일행은 숲속에 숨어있었다. 멀찍이 떨어져 신전을 지켜보던 일행들 사이로 혜미가 눈을 반짝였다.
“성공했어요.”
“좋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에릭이 환호했다. 다른 일행들 역시 생각보다 술술 풀려가는 일에 쾌재를 불렀다.
혜미의 스킬 중 하나인 <붉은 눈>은 타인의 시야를 공유할 수 있었다. 시야뿐만이 아닌, 눈과 귀 등, 모든 것을 동유할 수 있었다. 물론 대상이 사용자의 능력치보다 월등히 낮지 않은 이상,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패널티가 있었다.
하지만 프엘은 우성의 ‘지배’ 스킬에 걸린 상태였다. 우성이 프엘에게 혜미의 마법에 동의하라고 하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혜미는 프엘을 통해 신전에 남아 있는 천사들이 밖으로 나가게 된 것을 확인했다. 우성이 ‘지배’를 통해 얻고자 했던 결과를 확인한 것이다.
“천사는? 몇 명이나 밖으로 나가게 됐지?”
“한 마흔 명 정도일 것 같아요.”
“마흔이라… 그럼 저 신전 안에는 서른 정도가 남아 있는 건가?”
안현수의 말을 우성이 정정했다.
“카시엘이라는 천사도 계산해 둬야지.”
가장 큰 변수는 역시 카시엘이었다.
무려 세 쌍의 날개를 가진 천사. 아무리 시간이 많이 흘러 겉으로는 힘이 없어 보인다지만, 그 정체는 천사장이었음을 잊어선 안 된다.
“그 녀석이 아직도 천사장급의 힘을 가지고 있으면, 이 퀘스트는 거의 불가능이나 다름 없을 겁니다.”
“……하긴. 천사장이면 볼락과 같은 수준이니까요.”
마수의 숲에서 볼락이 박윤성을 제압하는 장면을 떠올리며 우성이 몸을 떨었다.
72악마 군주 중 한 명인 볼락은 지금까지 우성이 겪어본 그 어느 누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했다. 던전의 보스로 설정되어 있던 미카엘의 분신도 볼락을 상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미카엘의 대리자이자, 유니크 직업을 가진 2회 차 네임드 플레이어 박윤성을 눈 깜짝할 사이 제압했다. 일행에 마검 사용자가 둘에, 실력 있는 2회 차 플레이어와 3회 차 플레이어가 포함되어 있다고 해도 볼락을 제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솔직한 심정으로, 최후의 수간인 <대리인>을 사용해도 자신이 없었다.
“그 정도 난이도는 아닐 겁니다. 퀘스트의 난이도가 저에게 S등급으로 설정되어 있는 걸 보면, 클리어가 불가능한 건 아니겠죠. 정말로 카시엘이 보통의 천사장급의 힘을 가지고 있다면, 난이도가 SSS정도는 되지 않겠습니까?”
반은 농담이었지만 전현승의 말은 진심이었다.
퀘스트는 처음 그 퀘스트를 받은 플레이어의 수준에 맞춰 등급이 설정되었다. 즉, 이 퀘스트는 처음 퀘스트를 받은 당사자인 전현승의 능력치에 맞춰져 등급이 설정되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전현승의 수준으로 ‘꽤’ 어려운 정도의 퀘스트일 것이다. 카시엘이 평범한 천사장 수준의 힘을 가지고 있다면 S등급 정도로 난이도가 설정되어 있을 리 없었다.
“일단 부딪혀 보는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러고 있을 새가 없습니다. 천사들이 반으로 갈라진 지금이 각개격파에는 최적의 상황입니다.”
에든이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말대로 천사들이 반으로 나누어진 지금이 일행이 퀘스트를 수행하기 위한 모토로 정한 각개격파(各個擊破)에 가장 적합한 타이밍이었다.
천사들이 언제 허탕을 치고 돌아올지 모르는 일이니, 한시가 바쁜 상황이었다. 어찌 보면 이번 기회가 최초이자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일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적인 반응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에든이 물었다.
“그럼 서둘러 정합시다. 신전을 공격할 겁니까, 아니면 신전 밖으로 나온 천사들을 공격할 겁니까?”
“신전.”
“신전.”
입을 모은 대답에 에든이 씩 웃었다. 모두의 생각이 정확히 일치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모두가 최종 보스격인 ‘카시엘’을 먼저 상대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결정됐으면, 갑시다.”
우우웅-.
우성이 손에 있던 아포피스를 검으로 바꾸고, 안현수가 창을 꺼냈다. 전현승은 언젠가부터 검을 집어넣지 못하고 있었다.
확실하게 천사들이 밖으로 나간 것을 확인한 일행은 신전으로 향했다. 더 이상 몸을 숨기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대리자님!”
신전의 입구를 통과하자, 신전 안에 있던 천사 하나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 역시 밖으로 나가지는 못했지만 루시퍼의 검을 가진 대리자가 위험에 처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멀쩡한 모습으로 신전으로 들어서자, 기쁜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천사는 반색하며 신전 안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아니, 소리치려 했다.
푹-..
재빨리 달려던 안현수가 천사의 목에 창을 꽂아 넣은 것이다. 크게 열리던 입은 아무런 말을 내뱉지 못하고, 천사는 의뭉스러운 얼굴로 안현수를 바라봤다.
“컥.”
마지막으로 핏물을 입 밖으로 토해내며 천사의 숨통이 끊어졌다. 그 때, 뒤이어 달려온 천사가 일행을 발견하고는 눈을 부릅떴다.
“이게 대체 무슨…….”
“슬슬 나오네.”
작은 소란이었지만, 워낙에 조용한 신전이다 보니 이 정도 소란에도 안쪽에 있던 천사들이 하나 둘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든 천사들이 밖으로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신전 안에 있는 천사들이 서른도 채 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그 정도만 하더라도 그리 쉽게 볼 수 없는 수였다. 더군다나 카시엘이 언제 등장할지 알 수 없었다.
근접 계열 플레이어인 우성과 안현수, 전현승, 에릭이 천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에든은 혹시 몰라 혜미와 혜정의 곁을 지켰다.
깡-!
가장 먼저 달려들기 시작한 에릭의 도끼가 천사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하지만 신전 밖에서의 전투와는 달리, 천사는 창을 들어 올려 에릭의 도끼를 막아냈다.
아니, 막아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창을 반대로 휘둘러 반격하기까지 했다. 다행히 에릭도 도끼를 제법 다룰 줄 알아 천사의 창으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었지만, 예상 외의 결과임은 분명했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입니까!”
“이것 봐라?”
움직임이나 창에서 느껴지는 단단함으로 보나, 밖에서 상대했던 천사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혹시 신전에 남아 있는 천사들이 정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닐 것 같았다.
“신전에 있으면 더 강해지기라도 하는 건가?”
신전은 곧 천사들의 성지(聖地)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 한 수에 불과했지만 방금 전 천사가 보여준 능력은 3~4회 차 플레이어에 버금갔다.
우성과 안현수, 전현승 역시 같은 느낌을 받고 있었다. 밖에서 상대했던 천사들과는 달리, 한 명, 한 명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상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예상외의 결과인 것만은 분명했다.
‘한 시라도 빨리 제압해야 하는데…….’
이 순간에도 천사들은 신전 안쪽에서 하나 둘 나타나고 있었다. 지금 당장에는 일행과 천사들의 대립을 보고는 어리둥절해 하지만, 곧 창을 빼들 가능성이 농후했다.
무엇보다 세 쌍의 날개를 가진 천사, 카시엘이 등장하기 전에 하나라도 더 천사들의 수를 줄여 놓아야 한다. 다급해진 마음에 우성은 결국 차선책을 꺼내 들었다.
[‘Mode - 광폭화’가 발동됩니다.]
[‘Mode - 유체화’가 발동됩니다.]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진다. 카시엘을 상대할 때를 대비해 아껴놓을 생각이었지만, 어차피 이 정도 소란이면 카시엘도 금방 눈치를 챌 것이다.
휘릭-.
우성의 자세가 낮아지며 순식간에 천사와의 거리를 좁혀들었다. 창의 안쪽으로 사정거리를 좁혀들자, 천사는 화들짝 놀라며 우성과 거리를 벌리려 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서걱-.
피이잇-.
베어진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신전의 바닥을 붉게 적시는 것을 본 다른 천사들이 화들짝 반응했다.
“네 이놈!”
몇몇 천사들은 아직까지도 전현승의 존재에 우물거리고 있었지만, 몇몇을 제외한 천사들은 피를 보자 일행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심은 방금 전 한 명의 천사를 베어넘긴 우성을 향해 집중되었다.
아무리 밖에서 싸웠던 천사들에 비해서는 더 상대가 까다롭다지만, 일행은 하나같이 3회 차 플레이어 이상의 실력을 가진 이들이었다. 특히 전현승과 <광폭화>와 <유체화>를 동시에 발동시킨 우성은 빠른 속도로 천사들을 하나 둘 상대해 나갔다.
“이, 이런 시펄!”
아무래도 가장 어려워하는 쪽은 에릭이었다.
3회 차 플레이어 중에서는 제법 실력이 뛰어난 편이라고 해도, 천사들은 하나같이 3~4회 차 플레이어에 버금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둘까지는 어찌 상대가 가능했지만, 셋의 천사가 달라붙자 에릭은 제법 힘겨워 했다.
다행히도 안현수의 상황은 썩 괜찮았다.
신룡창(神龍槍)을 얻은 이후로 안현수는 부쩍 강해졌다. 용력(龍力)을 끌어내는 힘도 한층 높아졌고, 더불어 얼마 전에 얻은 장비인 하늘용의 비늘 용포 덕분에 움직임이 한층 가벼웠다.
더군다나 꽤 많은 수의 천사들이 우성에게 집중된 덕분에, 안현수는 세 명의 천사들을 상대로 꽤 여유가 있을 수 있었다.
‘다행히 전현승이 선전해 주지만…….’
한 명의 천사를 더 베어 넘기며 우성이 진땀을 흘렸다.
유체화로 인해 더 빨리 움직이면서 <광폭화>로 인해 더 많은 체력을 소모했다. 물론 그 덕분에 수많은 천사들을 상대로 몸을 피하며 상대할 수 있었지만, 마음이 급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때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쩌어엉-!
신전을 가득 메우는 노호성에, 천사들의 움직임이 동시에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