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플레이어-124화 (124/258)

124화

신전의 마지막 방은 제법 성당처럼 잘 꾸며져 있었다. 마치 일전에 보았던 던전의 마지막 장소와 같은 느낌이었는데, 그보다는 규모가 훨씬 컸다.

성당의 가장 멀리로는 허리까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미남자가 서 있었다. 그의 등으로는 네 쌍의 거대한 날개가 흩어져 있었는데, 한 눈에 보아도 석상의 주인공이 루시퍼임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지금도 날개를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의외로 석상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다. 보통 사람의 크기와 비슷한 수준이었는데, 제법 잘 조각되어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특이하다고 볼 수 없었다.

“오랜만에 보는 이방인들이군.”

그 때, 목이 턱 막힌 칼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성의 시선은 저절로 눈앞에 보인 석상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향했다.

‘노인?’

세 쌍의 날개를 가진 천사. 하지만 그의 등에 돋아난 날개는 힘없이 꺾여 있었다.

천사와 악마는 인간과는 전혀 다른 시간을 살아간다고 한다. 가진바 힘이나 권세에 따라 수명도 제각기 다르겠지만, 등급 외 판정을 받은 최하급 악마들조차 천 년을 산다고 할 정도였다.

하물며 천사들 중, 대천사 다음가는 천사장급의 천사라면 그 수명이 어느 정도일지는 감조차 오지 않았다.

그런데 눈앞의 천사는 죽어가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 주름이 생기고 날개가 꺾여, 수명이 다 해 곧 죽을 듯 위태로워 보였다.

“카시엘님. 실은…….”

“안다. 문 밖에서 하는 이야기가 어찌나 시끄럽던지, 내 귀에까지 들리더구나.”

문 밖이라고 해도 족히 수백 미터는 떨어져 있는 장소에서 나눈 대화였다. 정상적인 청력으로 그곳에서 나눈 대화를 들을 수 있을 리는 없었다.

늙고 병들어도 천사장이라는 건가? 우성은 이미 자신들에 대해 알고 있다는 카시엘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봤다.

“어서 오시지요. 루시퍼님의 동반자시여.”

‘낯간지러워 죽겠네.’

천사들은 악마들과는 달리 고지식하고 오그라드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오히려 그런 점에서는 악마들이 더 인간과 닮았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분명 카시엘은 전현승을 비롯한 일행에게 호의적이었다. 다짜고짜 적대를 하는 것보다는 나은 일이라, 일행은 일단 반색했다.

“반갑습니다. 루시퍼님의 반쪽을 가지고 있는 이방인 전현승이라고 합니다.”

“실례지만, 가능하면 루시퍼님의 반쪽을 볼 수 있겠습니까? 무례라는 건 알지만, 확인이 필요합니다.”

기다리고 있던 일이었다. 카시엘이라는 천사가 반(半) 마검 루시퍼를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에 따라 앞으로 퀘스트의 난이도가 결정될 수 있었다.

전현승은 루시퍼를 꺼내 카시엘을 향해 내밀었다. 천사장 급의 천사라면 일반 천사들과는 달리, 루시퍼의 진가를 알아볼 가능성이 충분했다.

전현승에게서 루시퍼를 받아든 카시엘은 검을 들어 높이 올려보았다. 천장의 크리스털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검을 비추자, 검의 표면이 핏빛으로 형형하게 빛났다.

“기분 나쁜 색이로고…….”

‘역시.’

카시엘 정도의 천사라면 마검에서 느껴지는 마기를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마검이긴 해도, 루시퍼의 검이라는 것만은 변함이 없었다.

진정으로 루시퍼를 믿는 천사라면, 분명 검이 진짜임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이상하다. 이상해. 분명, 그분의 것이 맞는데… 이 무슨 기분 나쁜 기운인가. 마치 악마처럼…….”

이리저리 검을 둘러보며, 빛에 비추어 보기도 하고 검면을 만져보기도 하며 카시엘은 마검을 확인했다. 분명 그는 마검에서 느껴지는 마기를 알아차리고 있음에도, 마검이 루시퍼의 것이 맞다는 것에 더 중점을 둘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광신도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분명, 그분의 것이다.”

역시.

카시엘은 마검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 챘음에도, 루시퍼의 검임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분명 카시엘이 언젠가 루시퍼를 만나보았었기 때문일 것이다.

‘첫 번째 도박은 성공인가?’

루시퍼의 검의 사용자임을 확인받는 것.

이것이 바로 첫 번째이자, 가장 어려운 난관이었다. 카시엘과 같은 상위 천사가 있었기에 풀 수 있었던 난제이기도 했다.

하지만 첫 번째 단추가 꿰어진 이상, 두 번째부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곳은 루시퍼를 믿는 천사들이 모인 하나의 종교인만큼, 그 신에게 선택받은 자라는 것만 확인되면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다시 한 번 반깁니다. 어서 오십시오, 루시퍼님의 동반자시여.”

“어서 오십시오.”

카시엘의 말을 옆에 있던 라엘이 앵무새처럼 따라했다. 심지어 라엘은 전현승을 향해 무릎을 꿇기까지 할 정도였다.

예상치 못한 격한 반응에 전현승이 당황할 무렵, 우성이 막 입을 열었다.

“그런데 신전에 천사들이 많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미 전현승의 일행이라는 이름이 붙어서일까? 우성이 중간에 끼어들었음에도 카시엘은 전혀 기분 나쁜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안타깝다는 듯 대답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몇 천 년 전까지만 해도 그 많은 천사들이 오가던 곳이었는데, 저 악마들의 간교한 술수에 넘어가 루시퍼님을 등지는 어리석음을 범하다니 말이죠. 지금은 그 많던 천사들이 다 떠나고, 백 명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백 명.

하나의 종교를 이루기에는 터무니없이 적은 수지만, 상대하기에는 버거운 숫자였다. 백 명이 전부 일반 천사라 하더라도 이 전력으로는 힘들 것이다.

‘다행히 천사장은 조금 하자가 있어 보이지만.’

우성은 날개가 꺾여버린 천사장 카시엘을 보며 속으로 안도했다.

처음 세 쌍의 날개를 가진 천사장이 등장했을 때만도 이 퀘스트는 실패라고 생각했다. 천사장은 한 명만 하더라도 이 전력으로 상대할 수 있을까 의문인 존재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옛 천사장’이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카시엘은 보통 천사장이 아니었다. 이미 너무나도 오랜 세월을 존재해와 늙고 힘이 없어진 퇴물이나 다름없었다.

“카시엘님이 이곳 신전의 대표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수 천 년 전, 루시퍼님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필했던 천사로서, 전 이곳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비록 다른 무지한 천사들이 손가락질을 한다고 해도 말이죠.”

‘무지한 건 너다, 멍청아.’

다른 천사들과는 달리, 이곳의 천사들은 루시퍼가 아직까지도 자신들을 보호해주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천사들에게 믿음이 중요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 믿음이 너무 도를 지나친 나머지 이런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저희는 루시퍼님의 계시를 받고 왔습니다.”

‘시작인가?’

이미 생각해 두었던 각본이었다. 천사들을 발견하고 잠깐 사이, 애초 천사들을 속일 생각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우성이 제안했던 이야기였다.

‘계시’라는 말에 카시엘의 눈이 반짝였다. 루시퍼가 사라진 후 수 천 년 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계시였다.

“루시퍼님이 계시를 내렸다고요?”

“네. 루시퍼님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곳 신전에 계시를 내리지 못하고 계십니다. 여기 있는 석상도 이미 제 기능을 잃은 지 오래입니다.”

“이 석상이… 말입니까?”

루시퍼의 탄생 직후 만들어졌다는 신비한 힘을 가진 석상. 그것은 과거 신전에서 루시퍼의 계시를 받을 때 사용되었다.

또한 석상은 대천사 루시퍼를 신적인 의미로 만드는 하나의 상징물이었다. 석상 자체가 이 신전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 무슨 무례한 말입니까!”

“진정하십시오. 제가 아니라, 루시퍼님이 내려주신 말씀입니다. 바로 이 검을 통해서 말이죠.”

마검이긴 하지만 루시퍼의 검을 내밀자 카시엘을 말을 잃고 말았다. 분명 천사나 악마나 스스로가 만든 검을 통해서도 사용자에게 말을 전할 수 있으니, 전현승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석상은…….”

“빈껍데기일 뿐인 것이죠. 루시퍼님은 이 석상을 부수고, 새로운 석상을 짓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야만 그분께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실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현실에서 대체 뭘 하던 사람이었을까? 전현승은 각본도 짜여져 있지 않음에도 술술 사기성 짙은 사이비스러운 멘트를 술술 내뱉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일행들이 놀랄 정도였다.

그의 말은 제법 신빙성이 있고 자연스러워, 카시엘은 허탈한 눈으로 석상을 바라봤다. 루시퍼의 모습을 하고 있는 석상은 분명 이곳 신전에서 중요한 것이었지만, 루시퍼의 말이라고 한다면 어쩔 수 없었다.

“루시퍼 님께서 돌아 오실수만 있다면야…….”

“허락만 해주신다면, 그 일은 저희가 하겠습니다. 저 또한 루시퍼님께서 저에게 명하신 일이라, 제가 직접 하는 게 마음에 편할 것 같습니다.”

“네, 그러시지요. 가슴 아픈 일이지만, 저는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카시엘의 허락이 떨어지자, 전현승은 망설임 없이 루시퍼를 받아들어 석상으로 향해 걸어갔다. 기둥에 세워져 꽤 높은 곳에 위치한 석상을 올려다보던 전현승은 그 자리에서 뛰어올랐다.

퍼억-.

마검 루시퍼가 석상의 머리에 박혔다. 루시퍼의 반쪽이, 루시퍼의 모습을 형상으로 한 석상을 부수는 광경은 정말 아이러니했다. 석상은 보통 돌로 이루어진 물건은 아닌 듯, 꽤 단단해 한 번에 베어지지 않았다.

쩌적, 쩌저적-.

하지만 단단하기로 보자면 당연히 마검이 훨씬 단단했다. 더욱이 전현승은 루시퍼에게 직접 선택받은 사용자였다. 한 번에 베어지지는 않았지만, 계속 힘을 주자 갈라졌던 금이 서서히 벌어지며 석상이 반으로 쪼개어졌다.

쩍-.

[히든 퀘스트(Hidden Quest) - 타락 천사의 완성을 1/2만큼 완료하였습니다.]

[타락천사 루시퍼가 더욱 완전한 악마에 가까워집니다.]

[신전에 남은 루시퍼의 천사들을 모두 죽이십시오. 그것이 바로 타락천사가 아닌, 진정한 대악마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석상을 부순 것만으로도 퀘스트의 반은 성공했는지 눈앞에 기분 좋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타락천사가 더욱 악마에 가까워 졌다는 것은, 바로 진정한 악마로 거듭나기 위한 루시퍼의 의도대로였다.

“아아, 루시퍼시여…….”

석상이 부서짐과 함께 카시엘과 라엘이 안타까운 신음을 흘렸다. 평생을 신처럼 떠받들고 모셔온 석상이 무너짐과 함께, 그들은 가슴이 와르르 무너짐을 느꼈다.

하지만 일행의 목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제 남아있는 천사들을 죽여야만, 일행의 목적이 달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끝난 게 아닙니다.”

무너진 석상과 메시지를 확인한 전현승이 쉴 세 없이 카시엘을 몰아붙였다. 석상이 무너졌다는 충격이 다 가시기도 전, 카시엘은 전현승의 말에 고개를 들어야만 했다.

“끝난 게 아니라니요?”

“루시퍼님이 돌아오시기 위해서는, 아직 남아있는 과제가 있습니다.”

‘루시퍼가 돌아오기 위해서’라는 말은 그들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달콤한 유혹이었다. 이미 신전의 상징이었던 석상이 깨어진 것, 그들에게는 더 못할 것도 없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 전에, 이걸 봐 주십시오.”

전현승의 말을 자르고 이번엔 다시 우성이 앞으로 나섰다. 그의 손에는 평소 사용하던 ‘진(眞) 마검 아포피스’가 들려 있었다.

“이건……?”

“카시엘님이라면 알아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듣기보단, 직접 한 번 보시죠.”

핏빛이 살짝 감도는 시커먼 검은 손이 닿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빴다. 카시엘은 우성이 내민 검을 살피더니 눈살을 찌루폈다.

“조금… 아니, 소름 끼질 만큼 기분 나쁜 검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잠시 뜸을 들이던 우성은 검끝을 위로 향하게 세우고는 말을 이었다.

“마검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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