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퀘스트 시작 날은 꽤 뒤에 있었다. 전현승은 퀘스트의 시작 날을 현실 시간에서 한 달 뒤에 있을 ‘선악공성’ 당일로 정했다.
루시퍼의 신전이 있는 장소는 천사 진영의 소도시인 라키아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번 선악공성의 공성 장소가 라키아의 바로 인근 도시인 소도시 샹데였다.
전현승의 말은 즉, 선악공성이 시작되면 수준 있는 플레이어들 대부분이 그곳에 모일 테니 퀘스트의 진행이 한결 수월해질 것이라는 뜻이었다. 소도시 라키아는 보통 2회~4회 차 플레이어들이 모이는 곳이니 아마도 선악공성에는 2, 3회 차 플레이어들이 대부분 참여할 것이다.
위험 부담이 줄어든다니 우성으로선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상위 회 차 플레이어가 더 많은 포인트를 가지고 있기야 하겠지만 괜히 퀘스트도 실패하고 위험부담을 높이느니 조금 얻을 수 있는 포인트가 적더라도 여기서 만족하는 게 낫다.
쉬익, 쉬이이익-.
나무로 만든 조잡한 창이 날아왔다. 열 개가 넘는 창은 일제히 우성을 노리고 쏘아졌는데, 우성은 자크 무리를 상대하고 있었다.
화르륵-.
하지만 갑작스럽게 솟아오른 뜨거운 불길이 나무로 만든 창들을 집어삼켜 불태웠다. 우성은 상대하고 있던 자크 무리를 향해 빠르게 몸을 날려 검을 휘둘렀다.
키악-!
자크는 사람과 원숭이를 섞어놓은 듯한 모습의 괴물이었다. 사람처럼 말은 하지 못하지만 그들은 지능이 제법 뛰어났고, 어느 정도 수준의 도구를 사용하거나 함정을 파는 등 제법 위험한 몬스터였다.
마수의 숲 중간쯤에 서식하는 자크는 5회 차 ~ 4회 차 플레이어들이 사냥하는 몬스터였다. 수준 자체는 그리 높지 않지만, 보통 10마리 이상씩 몰려다닌다는 점에서 4, 5회 차 플레이어들 서넛이 파티를 이루어야 사냥이 가능했다.
“잘 했어, 혜미!”
순식간에 자크 무리를 헤집어놓은 우성이 옆을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 자신의 뒤에 있던 안현수가 어느새 저 멀리 날아가 또 다른 하나의 자크 무리 사이에서 창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키에에에엑-!
신룡창(神龍槍)을 얻게 된 뒤로 안현수의 성장은 더욱 두드러졌다. 그렇지 않아도 S클래스의 플레이어인데다가 특전으로 인해 유니크 직업을 얻었고, 거기에 신(神)등급 무기를 얻게 되니 더 성장이 빨라진 것이다.
근래 들어서는 우성도 상대하기가 자주 벅찰 정도일 정도였다.
두 무리의 자크들을 잡는데 걸린 시간은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시작과 동시에 혜정의 저주와 버프, 보호, 그리고 우성과 안현수의 활약에 혜미의 보조까지. 어느새 척척 맞아 떨어지는 호흡은 마수의 숲 중간부에 있는 몬스터들 정도는 우스울 정도였다.
[자크 무리를 처치하였습니다.]
[25레벨 포인트(Lv. Point)를 획득하였습니다.]
자크 무리 하나를 잡을 때 얻을 수 있는 포인트는 100포인트. 그 레벨 포인트를 4명이서 분배하자, 25 레벨 포인트를 얻을 수 있었다.
퀘스트 보상을 통해 얻은 1만 레벨 포인트에 비교하면 심하게 초라했지만 퀘스트와는 달리 마수의 숲 사냥은 일행에게 크게 난이도가 어렵지 않았다.
* Lv. 포인트 : 2005
우성은 2천이 넘어간 레벨 포인트를 확인하자마자 곧장 레벨 포인트를 사용했다. 이번에 레벨을 올릴 스킬은 바로 <마검술>이었다.
[2000레벨 포인트를 소모하였습니다.]
[패시브 - 마검술의 레벨이 B. rank로 상승하였습니다.]
[근력 스텟이 2포인트 상승하였습니다.]
[민첩 스텟이 2포인트 상승하였습니다.]
[반사능력 스텟이 2포인트 상승하였습니다.]
[‘Mode - 유체화’를 습득하였습니다.]
‘드디어……!’
역시나, 스킬 레벨이 상승하자 기존의 보상보다 더 큰 보상이 있었다.
마검술은 플레이어 특성과는 달리 스킬 레벨을 올리기가 훨씬 힘들었다. 랭크(Rank)로 구분되어 있는 스킬은 플레이어만의 고유 특성으로 분류되었는데, 이 경우에는 스킬 레벨을 올리기 위해 일반 스킬들보다 훨씬 많은 레벨 포인트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런 단점을 덮고도 남을 만큼 <마검술>은 좋은 스킬이었다. 스킬 레벨 하나가 상승할 때마다 스텟이 쑥쑥 상승하기도 하거니와 새로운 추가 스킬들을 뱉어내니 말이다.
퀘스트 시작 전, 우성은 두 가지를 목표로 잡았다. 첫째로는 플레이어 특성인 <불굴의 의지>는 10레벨에 도달하자 <초감각>이라는 상위 호환의 또 다른 플레이어 특성을 습득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로는 <마검술>의 스킬 레벨의 상승이었다.
정신력 스텟이 제법 오른 지금, 우성에게 가장 시급한 스텟은 바로 근력과 민첩이었다. 체력이나 반사능력 스텟도 중요하긴 했지만 근력과 민첩은 근접 계열 플레이어들에게 가장 필요한 기본이었다.
그리고 근력과 민첩을 올릴 가장 빠른 방법으로 우성은 <마검술>의 스킬 레벨 상승을 떠올렸다. 실제로 스킬 레벨이 상승하며 <마검술>은 추가적으로 근력과 민첩, 그리고 반사능력 스텟을 상승시켜 주었다.
[Mode - 유체화]
* 마검을 보다 자유롭게 다룰 수 있게 됨에 따라, 몸에 내제되어 있던 힘을 한층 이끌어낼 수 있게 되었다. 유체화는 숙련된 검사들이 느낀다는 경지로, 자신의 몸을 한층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게 된다.
* 활성화 지속 시간은 1시간이며, 하루에 한 번 사용 가능하다.
+ 활성화 시 민첩 10포인트 상승+ 활성화 시 이동속도 10% 상승+ 활성화 시 활성화 시 근력 5포인트 감소
눈이 동그랗게 떠지는 효과였다. 근력이 떨어지는 건 아쉽긴 하지만, 그런 효과를 감수하고도 남을 만큼 앞의 두 가지 효과가 뛰어났다.
민첩 포인트가 무려 10포인트씩이나 상승하는데다가, 이동속도 10퍼센트의 상승은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어느 장비에도 이동속도를 2자리 수만큼 올려준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것도 직업 스킬인가?’
새삼 유니크 직업인 ‘아포피스의 대리자’가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왜 이름이 잘 알려진 네임드 플레이어들 중 유니크 직업을 가진 플레이어가 많은지 알 것 같았다.
“더 안으로 들어갈 거냐?”
우성이 막 스킬을 다 확인한 순간, 안현수가 옆으로 다가왔다. 창에는 자크들의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는데, 이미 앞서 잡은 몬스터들에게 묻은 피가 창에 붙어 굳어있었다.
“글세. 사냥으로 더 챙길 게 있나?”
“난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본다. 여기서 얻는 레벨 포인트 정도로 스킬 레벨 상승이 잘 되는 것도 아니고, 스텟 상승폭이 대여 수련장보다 좋은 것도 아니고. 스킬 레벨 상승은 이만하면 충분해.”
이야기를 더 들어보니 혜미나 혜정이도 같은 의견이었다. 마수의 숲에 등장하는 몬스터들 정도로는 더 이상 챙길만한 게 없다는 것이다.
벌써 마수의 숲을 돌아다니며 이른바 ‘앵벌이’를 시작한 게 백일 째였다. 그 전에까지는 대여 수련장에서 스텟 상승에 집중했다.
물론 사냥을 하던 그 사이 중간, 중간 현실에도 다녀왔으니 실제로 아포칼립스 안에서 있었던 시간은 100일이 조금 넘는 정도겠지만 말이다.
“그럼 슬슬 돌아가자. 여기서 얻은 아이템들도 처리해야 하니까.”
사냥의 좋은 점은 레벨 포인트의 습득도 있지만 몬스터를 잡은 부산물이나 간혹 등장하는 희귀 몬스터를 통한 부수입이었다. 중간에 한 번은 마수의 숲 중앙 부근의 네임드 몬스터를 잡았는데, 녀석에게서 얻은 장비는 알아보니 꽤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어 보였다.
‘대충 다 팔면 5천 골드 정도 되겠군.’
물론 그래 봤자 우성이 가진 돈에 비하면 새 발의 피 정도였다. 하멜에 있는 보통 4, 5회 차 플레이어들에게는 큰돈일지 모르나, 신규 플레이어라는 신분에 비해 엄청난 사치를 부려온 일행에게는 그리 큰돈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역시 원정에서 얻은 백골렘의 핵이나 천사들의 날개는 아직 창고에 남아 있었다. 에든에게 양보 받은 덕분에 온전히 일행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던 원정의 수확들은 다음 퀘스트를 떠나기 전, 경매장을 통해서든 상점을 통해서든 처리할 예정이었다.
‘이제 곧 이군.’
선악공성까지 남은 시간은 아포칼립스에서 30일 남짓이었다. 마수의 숲에 오기 전, 꽤 오랜 시간 동안 대여 수련장이나 다른 자잘한 퀘스트를 통해 시간을 보냈다. 아포칼립스에서의 30일이면 현실에서는 3일밖에 되지 않았다.
그간 혜정도 자신의 직업 스킬의 레벨이 제법 오르고 싸움에도 익숙해졌고, 혜미도 눈에 보일 듯한 성장을 이루었다.
그래도 역시 가장 큰 성장을 이룬 건 우성과 안현수였는데, 그 중 안현수의 성장은 우성도 놀랄 정도였다.
신(神)등급 무기로 변한 신룡창(神龍槍)은 안현수와 매우 궁합이 잘 맞는 무기였다. 더군다나 안현수 스스로도 S클래스의 플레이어인 만큼 보통이 훨씬 넘는 성장 속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우성과 전체적인 스텟 면을 비교하면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일행은 왔던 길로 마수의 숲을 되돌아왔다. 왔던 길도 그리 짧지는 않아, 일행은 하루를 더 소모해 돌아왔다.
“……이건 뭐야?”
집으로 돌아온 우성은 대문 앞에 붙어있는 천조가리를 보며 중얼거렸다.
검은색 천조가리 위에는, 하얀 분필로 메모가 적혀 있었다.
[타르여관 머물고 있을 테니, 돌아오면 연락 바랍니다.]
**
“기다리다 목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다짜고짜 집으로 쳐들어 온 전현승은 혜정이 타준 차를 홀짝였다.
이전과는 달리 에든이나 에릭은 함께하지 않고, 전현승은 혼자였다. 하멜에서 제법 좋은 축에 속하는 타르 여관에 머물고 있던 그는 벌써 일주일 째 그곳에서 우성과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왜 기다리셨습니까?”
“벌써 선악공성 날, 그리고 저희가 약속한 퀘스트 날짜가 금방 앞으로 다가오지 않았습니까?”
30일이면 꽤 남았구나 싶었지만,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시간은 현실에서의 시간으로 계산했다. 가끔씩 현실에 하루씩 다녀오면 아포칼립스에서는 시간이 짧게는 닷새에서 길게는 열흘까지 지나가는 바람에 아포칼립스에서의 시간 계산에는 오차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80일과는 달리, 그 1/10밖에 되지 않는 3일은 무척 짧게 느껴졌다.
“그래서요?”
“우성씨나 안현수씨나, 다른 분들 모두 에든에게서 실력이 제법 뛰어나다는 이야기는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저야 에든의 말을 못 믿는 것도 아니고, 걱정은 안 합니다만… 궁금하긴 해서요.”
“저희 수준이요?”
“네. 그 중, 이우성씨의 실력이 제일 궁금합니다. 같은 마검을 쓰는 플레이어니까요.”
앞의 말은 핑계일 테고, 결국 본론은 우성이었다. 같은 마검을 사용하는 플레이어인 만큼, 한 번 겨뤄보고 싶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키보드를 두드리는 진짜 게임도 아니고 직접 검을 휘둘러야 하는 아포칼립스에서 ‘겨뤄보고 싶다’는 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전현승은 진짜로 우성과 한 번 싸워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겁이 없는 건지, 아니면 싸우는 걸 좋아하는 건지. 아무튼 특이한 성격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결국 저와 싸워보고 싶다는 거 아닙니까?”
“하하, 역시 눈치 빠르시네요. 죄송합니다. 예전부터 검도를 좋아해서, 검으로 싸우는 건 꽤 재미있어 하거든요. 그런데 요즘 들어 딱히 플레이어와 싸울 일도 없고, 에든과 싸우는 것도 질려서요. 마침 곧 퀘스트도 시작할 때고, 저 외에 다른 마검 사용자 플레이어와도 겨뤄보고 싶었습니다.”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던 전현승이 변명하듯 말을 덧붙였다.
“사실 저희 외에 다른 마검 사용자 플레이어들은 너무 강해서 말이죠. ‘아직까지’는 상대하기가 조금 벅차달까요. 접점도 없고요.”
가장 최근에 등장한 마검 루시퍼의 사용자 전현승을 제외하고는 마검 사용자 플레이어들은 하나같이 고 회 차 플레이어들이었다. 가장 회 차가 낮은 플레이어만 하더라도 4회 차였고, 대부분이 1, 2회 차 플레이어들이었다.
4회 차 마검 사용자 플레이어는 행적이 워낙 잘 알려지지 않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우성이나 전현승이나, 같은 마검 사용자 플레이어끼리는 서로밖에 알지 못했다.
즉, 만만한 게 서로라고 할까.
‘나도 궁금하긴 한데…….’
우성이 싸우는 걸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전현승의 실력이 궁금하긴 했다.
신규 플레이어에 불과한 자신이 5회 차 마검 사용자 플레이어인 전현승과 어느 수준으로 싸울 수 있는지.
아니, 가능하면 이겨보고 싶었다. 그럼 자신이 정말 강해졌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 테니까.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