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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플레이어-116화 (116/258)

116화

검은색 광채가 옅어짐에 따라, 방 안을 가득 메운 연기가 서서히 흐려졌다. 혹시나 싶어 우성이 다리를 앞으로 내밀자, 아까와 같은 메시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아직 안개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닌지, 다리에 미약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만하면 들어갈 만하다 싶어, 우성은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직 까맣군.’

방 안으로 들어가자, 안개에서 느껴지는 따끔거림은 온 몸을 찔렀다. 그래도 금세 고통에도 익숙해져 우성은 혜정의 앞까지 다가갈 수 있었다.

“오… 빠?”

“끝났냐?”

정신을 차린 듯, 혜정이 우성을 보며 중얼거렸다. 힘없이 비틀거리는 혜정을 막 부축하려던 때, 안현수가 뒤에서 달려와 그녀를 받아 안았다.

“혜정아?”

“히, 살았다.”

그녀답지 않게 히죽 웃으며 혜정이 안현수와 우성을 번갈아봤다. 힘은 없어 보이지만, 아무래도 결과는 그리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혜정아,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나중에 이야기… 나 졸려…….”

끔벅 눈을 감던 혜정이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다행히 정신을 잃은 게 기절은 아닌 듯했다. 안현수의 품에서 새근거리는 게 아무래도 잠이 든 모양이었다.

안현수는 혜정을 안아든 채 다시 1층의 거실로 향했다. 우연찮게도 혜정을 안고 아래로 내려오던 도중, 혜미가 접속했다.

안현수의 품에 안겨 잠이 든 혜정을 보며 혜미가 ‘이젠 대놓고 연애질이냐’며 핀잔했지만, 곧 안현수의 심각한 표정을 발견하고는 무슨 일이냐며 물었다. 우성이 대신 방금 전의 일을 설명했다.

“계승 의식? 진짜?”

“그래. 우리가 없던 하루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다행히 일이 잘 풀린 모양이야.”

우성은 소파에 누워 있는 혜정을 바라봤다.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우성이나 안현수의 경우를 보듯, 계승 의식을 통해 특별한 직업을 얻는다 하더라도 겉으로는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오히려 특이한 점이라면 혜정이었다. 큰 변화라고 할 수는 없지만, 혜정의 이마에는 보라색의 작은 십자가가 새겨져 있었다.

“대체 무슨 직업인 거지?”

“깨어보면 알겠지.”

들어오면 곧장 대여 수련관으로 향할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조금 미뤄야 할 것 같았다. 혜정이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자리를 비우기는 조금 불안했다.

‘궁금하기도 하고 말이지.’

혜정의 직업에 따라 일행의 전력이 급증할 가능성이 컸다.

혜정의 직업은 사제 계열이었다. 암흑사제는 플레이어의 치유와 보호, 버프로 전투의 전체적인 조율을 담당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런 만큼 혜정의 능력의 상승은 곧 전투에 직접 참여하는 우성이나 안현수의 생존률의 상승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뒤로 일행은 혜정을 중심으로 거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거실에서 할 거래봤자 간단한 잡담 정도가 전부였는데, 그 사이 혜미가 만든 최악의 텁텁한 차라는 소소한 해프닝이 생겼다.

“아…….”

몇 시간이 지나고, 밖이 슬슬 어두워질 쯤 혜정의 입에서 가느다란 탄식이 터져 나왔다. 거실에서 수다를 떨고 있던 일행들이 그녀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혜정아!”

한 번 눈을 뜬 혜정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체를 일으킨 그녀는 가장 얼굴을 들이민 안현수를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 얼마나 잤어요?”

“한… 다섯 시간 쯤?”

“아, 많이 잤네…….”

머리를 긁적이며 헤헤 웃는 그녀는 아무런 이상이 없어보였다. 방금 전 그 큰일을 치룬 게 맞나 싶을 정도였다. 마치 낮잠이라도 자고 일어난 것 같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계승 의식은 뭐고?”

“아, 그게 오빠… 이야기 하기가 좀…….”

“들어야겠다. 그래도.”

단호한 우성의 말에 혜정의 표정이 울상으로 변했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함께 할 일행인 이상, 이대로 넘어갈 순 없었다.

“그게, 사실은…… 힝.”

울먹거리던 혜정이 고개를 푹 숙였다.

“잘못했어요.”

혜정의 말은 곧 이랬다.

얼마 전 원정에서 성마검 벨제뷔트를 발견했던 마지막 성지에서, 혜정은 하나의 책을 발견했다.

성서라는 이름을 발견했을 때, 혜정은 곧장 다른 일행들에게 그것을 가져다주려고 했다. 하지만 책을 집어든 순간,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성마서 벨제뷔트. 그것은 최고악 벨제뷔트가 악마들의 신으로 추앙받던 때, 벨제뷔트의 발자취를 남겨 적어두었던 책의 원본이었다.

본래라면 단순한 책일 뿐인 물건이었다. 하지만 혜정은 이곳의 NPC가 아닌, 플레이어였다.

성마서 벨제뷔트를 집어든 혜정에게 새로운 전직 창이 떠올랐다. 플레이어인 그녀에게는 성마서가 곧 계약 의식을 진행하기 위해 필요한 전직서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자리에서 곧장 성마서를 이용해 계약 의식을 치룰 수 없었다.

‘벨제뷔트의 상태가 온전하지 못해, 계약 의식이 실패할 수 있다.’

‘계약 의식의 실패 시, 마력이 역류해 사망에 이룰 수 있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 그녀는 끝까지 결정을 망설였다. 원래라면 우성이나 안현수, 혜미와 함께 의논할 문제였지만 그녀는 그러지 못했다.

일행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 그녀는 조금이라도 더 자신의 능력을 끌어 올릴 필요성을 느꼈다. 새로운 직업, 더 높은 클래스의 직업은 혜정의 능력을 단숨에 끌어 올릴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계약 의식이 잘못되어 사망할 수도 있다는 조건이 있는 이상, 안현수가 그것을 승낙할 리 없었다. 우성이야 혜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혜정은 다른 일행들이 없을 때를 노려 계약 의식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원래라면 다른 일행들이 없을 때 은밀하게 이루어졌어야 했겠지만, 생각보다 계약의식이 길게 이루어진 것이다.

“대체 언제부터 접속해 있었던 거냐?”

“아마… 현실 시간으로 6시쯤이었을 거예요.”

“6시 부터면… 거의 3일 가까이 너 혼자 여기 있었다는 거야? 그 시간 동안 계약 의식을 진행한 거고?”

“네. 헤헤헤.”

혜정은 애써 웃음을 흘리며 안현수의 화난 표정으로부터 도망쳤다.

다행히 사망이라는 패널티는 적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혜정의 이마에 나 있는 보라색 십자가를 보면, 계약 의식은 성공적으로 끝이 난 모양이었다.

“다음부턴… 이런 거 하지 마.”

“네! 죄송해요.”

화가 난 표정으로 으르렁거리는 안현수에게 혜정은 씩씩하게 대답했다. 크게 혼이 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주의에서 끝이 난 것이다.

“그래서 직업 이름은 뭐야? 무슨 계열이고?”

“직업 이름은 ‘벨제뷔트의 성직자’고, 사제 계열인 것 같아요. 그런데… 아무래도 치유보다는 저주나 소환 계열에 특화되어있어요.”

“소환?”

직업의 이름이야 생각했던 대로 평범했지만 사제 계열에 소환 마법이 있다는 건 제법 의외의 말이었다.

보통 일반적인 사제들의 경우, 치유와 버프, 저주와 방어에 특화되어 있는 게 보통이었다. 그 중 지금껏 혜정은 치유와 버프 마법에 편중되어 있는 편이었다.

그런데 새로운 직업 ‘벨제뷔트의 성직자’는 그와 반대인 저주와 소환 마법. 즉, 공격적인 성향의 직업이었다. 사실 이만하면 마법사지 사제나 성직자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소환이면 어떤 거?”

“음… 저도 아직 잘 모르겠어요. 벨제뷔트의 종속 중 마력 스텟과 마기 스텟에 따라 소환된다고 하는데, 제 역량에 따라 소환수의 숫자도 달라져요.”

“마기 스텟?”

“네. 전직하면서 새로 생겼어요. 아직은 스텟이 1밖에 되지 않지만요.”

혜정에게도 마기 스텟이 생겼다는 건 꽤 의외의 일이었다. 하긴, 그녀도 악마 진영의 플레이어고 평범하지 않은 직업을 얻게 된 만큼 아주 예상치 못한 일은 아니었다.

‘스텟에 따라서 소환물이 다르다…….’

혹시나 하는 일이지만, 어쩌면 최종 소환물이 벨제뷔트 본인이 아닐까도 싶었다. 벨제뷔트의 성직자는 어디까지나 벨제뷔트와의 계약 의식을 통한 직업이었으니, 마력만 충분하다면 벨제뷔트를 소환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한 번 보여줄 수 있을까?”

“물론이죠.”

씩씩하게 대답한 혜정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베란다를 나갔다. 베란다 밖으로는 넓은 마당이 펼쳐져 있었는데, 혜정은 마당을 향해 양 팔을 뻗어니 외쳤다.

“나 벨제뷔트의 대리인의 자격으로 말하노니, 나오라 그대의 종속이여!”

처음으로 문장 단위의 영창이 나왔다. 영창을 필요로 하는 주문은 보통 일부 희귀 주문, 혹은 최상위 마법 주문으로 랭크되어 있었다.

혜정은 처음 외워본 주문에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모두의 관심은 곧 혜정의 손이 향하는 곳, 마당의 바닥으로 그려진 직경 2미터 정도의 마법진으로 향했다.

우웅, 우우우웅-.

알 수 없는 글자들이 새겨진 마법진이 긴 울음을 흘렸다. 마당에 깔린 잡초들이 흔들리고, 울리기 시작한 마법진이 곧 환하게 빛났다.

키릭, 키리릭-.

“……어?”

실망감이 가득한 탄성.

그것은 바로 혜정의 것이었다.

요란한 주문과 마법진을 통해 나타난 소환물은 고작 스컬레톤이었다. 마수들 중, 최하위에 랭크되어 있는 최하급 마물. 벨제뷔트의 종속이라더니, 고작해야 뼈다귀가 나온 것이다.

“이게 뭐야?”

우성의 입에서도 반사적으로 어이없다는 중얼거림이 튀어나왔다. 혜정은 부끄러운 마음에 아예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래도 설마…….’

혹시나 싶은 마음에 우성은 아포피스를 검으로 형상화했다. 스컬레톤은 우성이 다가가자 온 몸의 뼈를 삐거덕거리며 손에 들고 있는 뼈로 만들어진 검을 들었다.

쉬익-.

우성의 검이 스컬레톤을 위에서 내려쳤다. 반사적인 생존 본능인지 스컬레톤은 혜정의 명령이 없었음에도 우성의 검을 막고자 검을 들었다.

깡-!

스컬레톤의 검이 뒤쪽으로 튕겨져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뾰족한 팔이 우성의 복부로 날아왔다. 겉보기와는 달리, 제법 민첩한 움직임이었다.

“오?”

재빨리 몸을 뒤로 뺀 우성이 스컬레톤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퍼석, 하는 소리와 함께 스컬레톤의 목이 부러져 바닥으로 으스러졌다.

“그래도 쓸 만한데?”

“그래…요?”

그 때, 밝아졌던 혜쩡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어지러운 듯 몸을 잠시 휘청거리던 그녀의 팔을 안현수가 붙잡았다.

“아무래도 소환물이 당하면 혜정의 몸에도 무리가 가는 모양이네.”

“그런 거 같아요.”

아직 이 소환 스킬이 좋은 건지 아닌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스컬레톤이 생각보다 제법 강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크게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물론 이제 막 배운 스킬이라 스킬 레벨이 1에 불과하기는 했다. 지금까지의 경우를 미루어 보아, 레벨 포인트를 쏟아 부어 스킬 레벨을 올리면 더 강력한 스킬으로 변할 것이다.

‘투자할 만한 가치는 있겠지만…….’

문제는 혜정의 몸이었다. 소환물이 당하지 않으면 아무 상관없겠지만 혜정의 상태를 보아하니 소환물이 당하면 타격이 제법 큰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혜정이 너에게 과제가 생긴 것 같다.”

“네? 과제요?”

눈을 깜박이는 혜정에게 우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 두 개를 펴보였다.

“첫째는 방금 전 소환 스킬과 다른 저주 스킬의 레벨을 올려두는 것. 이게 네 직업의 주 능력이라고 했으니, 다음 퀘스트 까지 반드시 쓸 만한 수준으로 만들어 놔야 해.”

“그 다음은요?”

“체력 스텟. 혜정이 네가 소환물이 당하고 충격이 큰 이유는, 맷집보다는 체력 스텟이 낮지 때문일 확률이 커. 지금까지는 사제 계열이라는 이유로 체력 스텟을 소홀히 했지만, 지금부터는 체력에도 신경을 써야겠어.”

혜정의 체력 스텟은 20도 되지 않았다. 마력 스텟은 높지만 그밖의 다른 스텟은 마력 스텟에 비해 너무 낮은 수준이었다.

높은 마력으로 인한 과부하를 몸이 견디지 못하는 상황. 아마 소환물의 등급이 높아질 수록, 몸에 가해지는 충격은 더 커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알았어요.”

“혜미, 너도 혜정이랑 같이 체력 스텟에도 신경 쓰도록 해. 언제 필요하게 될지 모르니까.”

“응, 알았어.”

혜정이 깨어난 이상, 우성은 다시 일행들의 능력 향상에 치중할 생각이었다.

얼마 뒤에 있을 새로운 퀘스트를 위해서. S등급의 퀘스트를 지금과 같은 상태로 진행했다가는, 절대로 무사히 마칠 수 없을 것이다.

“안현수.”

“응?”

“너랑 난, 리턴 코드(Return Code)를 구하러 간다.”

암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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