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에든과 이야기를 마무리 지은 일행은 하멜에 있는 원래의 집으로 돌아왔다. 원래라면 집으로 돌아온 직후 현실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돌아가 봤자 새벽인 시간이었고 에든이 말한 루시퍼 사용자 플레이어 전현승을 만나야 했다.
에든은 우성이 거주하고 있는 집으로 전현승을 데리고 가겠다고 했다. 워낙에 자유분방한 성격이다 보니 자신이 추천하는 일행이라고 하면 직접 움직일 것이라는 말이었다.
하루가 지나자, 마당에서 땀을 흘리고 온 안현수는 슬슬 지루해졌다. 이곳에서 오래 있었던 터라, 어서 빨리 현실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기 때문이었다.
“언제쯤 올까?”
“오려면 당장도 올 수 있겠지. 도시 여기저기에 워프 게이트가 연결되어 있으니까.”
전현승이 거주하고 있는 도시는 드루드먼이었다. 하멜보다는 고 회 차 플레이어들이 많이 거주하는 도시였지만, 대도시에서 활동하지 않는다는 건 제법 의외인 말이었다.
2회 차 플레이어인 에든도 그렇고, 전현승도 그렇고, 플레이어의 수준치고는 활동하는 도시가 너무 작은 곳이었다.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나 싶었지만, 그거야 추후 일행으로 확정이 된 후에나 물어볼 일이었다.
“며칠이 더 걸릴 수도 있으니, 그 동안에는 여기서라도 푹 쉬었다가…….”
쿵쿵쿵-.
우성이 막 소파에 몸을 묻으며 기지개를 펴려던 때, 방금 들어온 문이 쾅쾅 울렸다. 라몬의 방문 이외에는 찾아오던 손님이 없던 터라, 우성은 설마, 하는 표정으로 문을 바라봤다.
“벌써?”
워프 게이트가 있어 며칠 걸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고작 하루 만에 찾아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도시가 다른 만큼 직접 찾아가고, 만나고 이야기 하는데도 시간이 걸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대문은 어떻게 넘어온 거지?”
우성의 집은 정원으로 들어오는 대문을 넘어야 문을 두드릴 수 있었다. 그런데 분명 대문을 열어준 기억도 없는데, 당장 집 문을 두드리고 있다니.
“아, 맞다. 잠그는 거 깜박했다.”
“이번에도 혜미 너였냐?”
“대문 같은 건 안 익숙하단 말이야…….”
잔뜩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울상을 지으며 혜미가 문을 향해 걸어갔다. 혹시나 싶어 우성은 그녀를 뒤로 물리며 현관으로 향했다.
“누구십니까?”
“저 에든입니다. 죄송합니다. 이 친구가…….”
“얼른 문 열어 주십시오!”
낯선 목소리. 쩌렁쩌렁 우렁찬 목소리는 문을 넘어 방 안을 울릴 정도였다. 악의가 없다고는 하지만, 다소 개념이 없어 보일 수 있는 모습에 우성은 자연스레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님을 문 밖에 세워둘 수도 없는 노릇. 더군다나 앞으로의 일정을 결정할 수 있는 제법 중요한 손님이었다.
달칵-.
우성은 문을 잠그고 있던 고리를 열었다. 잠겨있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덜컥 열렸다.
“죄송합니다, 플레이어…….”
“당신이 플레이어 이우성이요?”
다짜고짜 물어오는 무례한 언행에 우성은 눈살을 찌푸리고 그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하지만 곧 그는 에든의 옆에 있는 플레이어가 전현승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누굽니까?”
“나 플레이어 에릭이라고 합니다. 듣자하니 그쪽도 마검을 쓴다는데…….”
슬그머니 묻는 그는 오똑한 코에 뭉툭한 눈을 가진 외국인 플레이어였다. 샛노란 머리와 이국적인 노란 호박색 눈은 딱 봐도 ‘나 서양인이오’하고 광고하고 있어, 한국인 플레이어인 전현승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쪽도’라면, 당신도 혹시…….”
“거 성격 한번 급하네. 물론 내게 마검은 없지만 전현승과 난 둘도 없는 친구로…….”
“지랄 마십시오, 에릭. 그거야 당신 혼자 생각 아닙니까?”
그 점잖은 에든이 욕설까지 섞으며 톡 쏘는 걸 보면 에릭이라는 플레이어도 어지간한 모양이었다. 우성을 포함한 다른 일행들이 ‘별 이상한 사람 다 본다’는 표정으로 에릭을 바라보자, 에든은 한숨을 내쉬며 모두에게 그를 소개했다.
“소개하겠습니다. 여기는 3회 차 플레이어 에릭이라고 합니다. 전현승과 함께 이번 퀘스트를 함께 하게 된 플레이어인데, 대체 전현승은 왜 이런 플레이어를…….”
“야, 내가 뭐 어때서?”
“드루드먼에서 당신 꽤 유명하지 않습니까? 포함된 원정대고 파티고 개 박살 나고, 당신 혼자만 쏙 빠져나와 살아남는 걸로. 분명히 말해두는데, 전현승이 돌아오면 전 반드시 당신을 파티에서 빼고 말 겁니다.”
“야 이 새끼야! 그거야 다른 새끼들이 허접해서 그런 거고!”
얼씨구.
“이 몸으로 말할 것 같으면 말이야, 같은 3회 차 플레이어들 중에서는 더 이상 적수가 없을 만큼…….”
절씨구.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떡까지 먹을 모양이었다. 어떻게 자기 얼굴에 저리 금칠을 해 대는지, 낯짝 한 번 참 두꺼웠다.
그 때, 에릭의 어깨를 짚으며 집으로 들어오는 플레이어가 있었다. 자주색의 특이한 색으로 머리를 물들인 그는 머리색과는 달리 한국인의 얼굴이었다.
“그만 하십시오, 에릭. 그렇게 말 안해도 당신 실력이 진짜인 건 알고 있으니까.”
“오, 전현승 왔나?”
역시나.
‘저 자가 전현승?’
자주색의 머리를 제외하면 큰 특색이 없는 얼굴이었다. 번화가에 나가보면 한 번쯤 닮은 얼굴을 볼 수 있을법한, 이른바 ‘흔남(흔한남자)’에 가까웠다.
그런 평범한 얼굴 때문인지 우성은 그의 얼굴보다는 허리에 가로로 메어져 있는 검으로 시선이 쏠렸다. 저렇게 검을 메면 뽑을 때 불편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무래도 본인은 저게 편한 모양이었다.
‘저게 반(半) 마검 루시퍼인가?’
아포피스 외에 다른 마검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 때문인지 우성은 전현승보다는 그의 검에 쏠리는 시선을 인지하지 못했다.
“이걸 보고 계시는군요.”
“아, 죄송합니다.”
마검 루시퍼를 뚫어져라 보던 우성은 깜짝 놀라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저도 모르게 너무 티가 나게 무기를 구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닙니다.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구경하는 것쯤이야.”
전현승은 허리에 매고 있던 루시퍼를 검집째 앞으로 내밀었다. 검집은 마검과는 별계로 따로 제작한 것인지 아무런 느낌이 나지 않았지만, 반쯤 검이 뽑혀져 나오자 섬뜩한 예기가 느껴졌다.
“진짜군요.”
“그럼, 가짜일 줄 아셨습니까?”
루시퍼의 검신은 아포피스보다 조금 더 붉은색에 가까웠다. 그 때문인지 검신에 비친 얼굴이 더 빨갛게 보였는데, 핏빛색의 얼굴이 보이자 더욱 검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야, 전현승! 나도 안 보여주던 걸 왜…….”
“에릭. 당신은 마검이 없지 않습니까? 제가 플레이어 이우성에게 검을 보여준 건, 이렇게 해야 저도 플레이어 이우성의 검을 구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에릭의 입을 다물리면서 동시에 우성의 검을 볼 수 있는 명분을 만드는 말이었다. 과연 그런 계산이 깔려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렇게 되면 우성은 자신의 검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이우성씨. 에든이 당신 칭찬을 그렇게 하더군요.”
“전현승. 내가 언제…….”
“이우성씨 덕분에 원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최고의 찬사 아닙니까?”
확실히, 그 한 마디면 확실한 칭찬이긴 했다. 그래도 에든의 반응으로 보면 그리 길게 이야기 한 건 아닌 듯했다.
“거기다가 6회 차 플레이어라고 하더군요. 저도 5회 차 플레이어치고는 제법 강한 편이긴 한데, 6회 차 플레이어를 에든이 그렇게 칭찬하는 건 믿기 힘들었습니다.”
전현승은 대단하다는 듯 박수를 치더니 우성의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래도 우성의 검을 찾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이우성씨의 검은 어디에 있습니까? 귀속 무기의 특성 상, 장시간 멀리 떨어뜨려 놓을 수 없을 텐데요.”
귀속 주문서로 귀속시켜놓은 장비는 스스로의 의지로 장시간 떨어뜨려 놓을 수 없었다. 일정 거리 이상을 넘어선 순간부터 조금 시간이 지나면 자석처럼 다시 귀속자에게 돌아오게 되어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특별한 마법이 걸려 있기 때문에 귀속 주문서가 비싼 가격에 거래되는 것이다.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혹시 옷 속에라도 숨겨두고 계십니까?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우성은 잠시 갈등하다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봤다. 그의 손을 감싸고 있는 장갑 모양의 진(眞) 마검 아포피스. 과연 이걸 보여줘도 될까 싶었다.
‘어차피 알고 있는 거…….’
이미 자신에게 마검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먼저 루시퍼를 보여줬던 만큼, 그리고 앞으로 함께하게 될지도 모르는 만큼, 이 정도는 보여줘도 될 것이다.
“잘 보십시오.”
우성은 오른손을 살짝 앞으로 내밀었다. 그와 동시에 오른손에 착용된 장갑이 액체처럼 변해 꿈틀거리더니, 빠른 속도로 검(劍)의 형태로 변화하였다.
안현수를 비롯한 다른 일행들이야 몇 번 보았던 모습이지만 다른 이들은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에든의 경우, 우성이 처음부터 끝까지 검을 들고 있던 모습만 봐왔기에 놀람은 더욱 컸다.
아포피스와 루시퍼는 형태 자체는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비슷한 모양의 얇고 긴 검신에, 검신과 같은 원색의 손잡이. 다만 다른 점이라면 아포피스가 검은색에 핏빛을 머금고 있었다면, 루시퍼는 핏빛에 검은색을 머금고 있다는 정도였다.
“형태 변형 장비라… 마검 중에 이런 스타일이 있을 줄은 몰랐군요.”
전현승은 신기하다는 듯 우성이 보여준 아포피스를 관찰했다. 그 역시도 같은 마검 사용자는 처음인지, 우성처럼 큰 흥미를 보였다.
“색깔 외에는 루시퍼와 크게 다른 점이 없는데…….”
“능력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같은 마(魔)등급 무기인 옥토퍼스의 능력치를 확인했을 때, 우성은 아포피스의 능력치가 같은 마(魔)등급 장비 중 월등히 좋은 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비록 반(半) 마검일 때와 진(眞) 마검일 때의 능력치에 차이가 있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같은 마(魔)등급 장비 중 능력치가 월등한 편은 아니었다.
우성은 당연할 것이라 생각해 내뱉은 말이었지만, 전현승의 반응은 의외로 냉랭했다. 회의적인 쓴웃음을 지으며 아포피스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부러움’이라는 감정이 선명하게 비춰졌다.
“그럴까요? 제 검은, 아직 불완전한데 말이죠.”
“불완전?”
“이름에서 보면 아실 수 있지 않습니까? 제 검은, 아직 ‘반(半) 마검’입니다.”
유독 ‘반(半)’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는 전현승의 말에서 우성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성의 아포피스도 반(半)마검이라는 이름이 붙어있었던 만큼, 그것이 미완전하다는 말에 크게 공감할 수 있었다.
“이우성씨 마검은 뭡니까? 어떤 악마의…….”
“그건 아직 공개하고 싶지 않군요.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 전현승씨가 믿을 수 있는 플레이어라는 확신이 든 후, 그 때 말씀드리겠습니다.”
단호한 거절에 전현승의 표정이 아쉬워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날름 검명을 말해주기엔 아직 그를 믿을 수 있다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렇군요.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군요. 말하기 싫은 걸 너무 강요하는 것도 도리는 아니니…….”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캐묻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혹시라도 기분이 상하지 않을까 조심스러웠던 만큼, 전현승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자 분위기는 한층 가벼워졌다.
“아, 제가 너무 플레이어 이우성씨에게만 신경을 썼군요. 다른 분들의 이야기도 잘 들었습니다. 플레이어 안현수와 박혜미, 박혜정씨도 무척 뛰어난 플레이어라고 말이죠.”
화제를 바꾸려는 건지 전현승은 우성의 뒤로 서 있는 안현수와 혜미, 혜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긴, 우성 한 명만 함께할 건 아니니 그들에게도 신경을 쓰는 건 당연했다.
“뭐, 그렇죠.”
“저는…….”
“저희는 아직 많이 부족하죠.”
당당하게 대답한 안현수와는 달리, 혜미나 혜정은 조금 의기소침하게 대답했다. 두 사람 역시 부족한 플레이어는 아니었지만, 다른 플레이어들이 워낙 쟁쟁하다 보니 자신감이 떨어지는 건 당연했다.
“뭐 어떻습니까. 예쁘신데요 뭐.”
“네?”
“아름다우십니다. 플레이어… 아니, 레이디 혜미씨, 그리고 혜정씨. 하하하.”
‘레이디’라는 느끼한 단어를 내뱉은 전현승은 이내 부자연스럽게 웃었다. 그 순간, 우성은 에든이 한 말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