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병의 마개가 열렸다. 보라색 빛을 띠는 ‘강인한 정신의 물약’이 개봉되었다.
방금의 말처럼 더 이상의 대화는 없다는 듯, 우성은 물약을 곧장 들이켰다. 바닥이 드러날 즈음, 병을 휙 뒤로 던져버리고는 우성이 입가를 닦았다.
[1시간 동안 정신력이 스텟이 21포인트 상승합니다.]
[1시간 동안 반사능력 스텟이 3포인트 상승합니다.]
[1시간 뒤에 정신력 스텟이 원래대로 돌아옵니다. 추가로 정신력 스텟 포인트의 50%(35포인트)가 감소합니다.]
[1시간 뒤에 정신력 스텟을 제외한 모든 스텟의 20%(???)가 감소합니다.]
[부작용의 효과는 반나절입니다.]
정신력 스텟의 30퍼센트 상승. 총 70포인트의 정신력을 가지고 있던 우성은 물약으로 인해 21포인트의 정신력을 얻을 수 있었다.
이로서 우성의 정신력 스텟은 91포인트였다. 이만하면 어지간한 1회 차 플레이어도 한 수 접어주는 수준의 정신력 포인트였다.
“맛없군.”
하지만 우성은 이런 스텟 포인트의 변화 따위는 아랑곳 않고 입안에서 느껴지는 쓴맛에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누군지 궁금해 졌다. 이방인.”
“갑자기 내 정체는 왜?”
“그 과거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말해라, 이방인!”
다소 격양된 어조의 미카엘을 보며 우성은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이게 무슨 개소리야?’
과거라니? 무슨 과거를 말하는 걸까?
우성은 미카엘이 내뱉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내뱉은 말 또한 기억하지 못했다. 그가 기억하는 것이라곤, 미카엘의 등장과 함께 물약을 사용할 때라고 생각해 물약을 마신 것뿐이었다.
[정신력 스텟의 측정이 완료되었습니다.]
[물약의 일시적 효과를 빌어, 플레이어 특성 Lv. 2 - 초감각이 일시적으로 활성화됩니다.]
초감각.
반가운 메시지와 함께 우성은 짜릿함을 느꼈다. 다른 세상을 보는 듯한 느낌. 백골렘을 상대하면서 처음 느꼈던 이 기분을, 정신력 스텟이 일시적으로 오르며 다시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분신이라면… 될지도 몰라.’
입 안에 남아있는 물약의 쓴맛을 느끼며 우성은 진(眞 ) 마검 아포피스를 들어올렸다. 참으로 오랜만에 사용해 보는 스킬인지라,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플레이어 에든씨.”
“네?”
“다른 천사들을 부탁합니다.”
“네? 갑자기 무슨 소리를…….”
에든은 말을 끝까지 이을 수 없었다. 우성의 몸이 지금껏 본 적 없었을 정도로 붉게 물들기 시작한 것이다.
[광폭화 스킬이 발동됩니다.]
[근력이 5포인트 상승됩니다.]
[민첩이 5포인트 상승됩니다.]
[반사능력이…….]
[……]
[고유 능력 - <대리인 : E. rank> 가 발동됩니다.]
마지막 메시지를 기점으로, 우성은 정신을 잃었다.
**
그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시야가 깜깜하고, 머리가 핑글핑글 돈다. 눈앞에 보이는 잔상은 이전만큼 심하지는 않아도, 형체를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대리인>의 부작용인가?’
생각을 하면서 우성은 놀랐다. <대리인>을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멀쩡한 사고를 할 수 있다는 건, 이전과 비교해서 엄청난 장족의 발전이었다.
‘정신력 스텟의 영향 덕분인가?’
아니, 그 뿐만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Lv.2의 플레이어 특성, <초감각> 또한 <대리인>의 부작용을 완화시키는데 한 몫 했을 것이다. <불굴의 의지>특성이야 말 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이건 왜 이러지?’
분명 우성은 자아를 잃지 않았다. 그런데도 제 마음대로 몸이 움직여지지 않고, 눈앞이 흐리고 초점이 없었다.
부작용이 확연히 줄어든 것까지는 분명했지만 완전히 없애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까지는 이해해도, 자아를 빼앗기지 않았는데도 제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그 때, 우성의 발이 움직였다. 우성의 머릿속에 있는 자신의 자아가 크게 뒤흔들렸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우성은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그 전에, 눈앞에 일렁거리는 이 잔영들부터 어떻게 할 생각이었다.
우성의 몸을 움직인 건, 우성이 아니었다.
-잠시 몸 좀 빌린다. 작은 주인아.
‘뭐?’
**
우성은 성큼 미카엘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둘 사이의 거리가 제법 가까워지며, 천사들이 우성을 경계했다.
“가만히 있어라. 끼어들지 말고.”
미카엘이 천사들을 제지하며 마찬가지로 우성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둘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는 속도가 한층 더 빨라졌다.
“이방인. 다시 묻겠다. 넌 누구지?”
“미카엘. 어리석은 천사들의 겁화여. 반대로 묻겠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것이지?”
나지막한 목소리였지만, 목소리는 분명 우성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 말투는 도저히 우성의 것이라고 볼 수 없는 위엄을 갖춘 말투였다.
‘그 때와 똑같다.’
안현수는 우성의 모습을 보며 시작의 마을 투기장을 떠올렸다.
투기장을 나와, 정예지와 칼프를 비롯한 플레이어들을 만났을 때, 우성은 지금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말투가 바뀌고,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리고 도저히 우성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강해졌다.
‘그 때 분명, 제정신이 아니었는데…….’
지금 정도면 그나마 양반이었다. 이후에 완전히 정신을 잃은 우성은 보이는 것마다 닥치는 대로 검을 휘두르고, 결국은 자신에게까지 검을 휘둘렀다.
다행히도 그 뒤에 시간이 조금 지나 제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안현수는 그 때처럼 우성이 아군을 향해 검을 휘두를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그런 우려는 발생하지 않을 모양이었다.
“어리석다라… 한낱 인간 피조물에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군.”
“인간을 ‘한낱’이라고 말한 것부터 네 어리석음이 드러나는구나. 과거 대천사장 가브리엘을 죽인 게 누구였는지 잊었나, 미카엘?”
화륵-.
그 순간, 미카엘의 네 쌍의 날개에 붉은빛이 감돌았다. 지옥의 겁화를 태운다는 대천사의 염화(炎火)는 미카엘의 날개이자, 그의 힘이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이방인. 네가 어떻게 그 일을 알고 있는 거지? 누구에게 들은 것이냐?”
“이것이 너의 역린(逆鱗)이었나? 아차, 미안하군. 미카엘 넌 특출 나게 가브리엘과 친했었지. 그래서 인간들을… 더 미워하고.”
우성은 천사들에게로 가 있는 플레이어들을 보며 혀를 찼다.
“저들도 안타깝군. 멍청하고. 미카엘, 넌 저들을 어쩔 셈이지? 죽이고, 또 죽여서, 지옥의 개에게 영혼까지 먹이로 던져줄 셈인가?”
“닥쳐라, 이방인! 한낱 인간 주제에, 함부로 혓바닥을 놀리지 마라!”
화악-.
미카엘의 손에서 쏘아진 불길이 우성을 덮쳤다. 순식간에 영혼까지 소멸시킬 거대한 불꽃은, 우성의 재로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오빠!”
뒤쪽에서 혜미의 걱정어린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앞으로 막 달려 나가려는 혜미의 어깨를 안현수가 붙잡았다.
“그냥 보고 있어.”
“어떻게 보고만…….”
“어차피 도움도 안 되잖아. 도움 될 게 아니면, 방해라도 말아야지.”
평소와는 다른 냉정한 말투에 혜미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니라, 분한 마음에 반박할 수도 손을 뿌리치고 앞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아!”
우성을 보고 있던 혜미는 곧 안도감에 탄성을 질렀다. 다행히도 우성은 무사했다. 미카엘이 쏘아낸 불꽃을 검으로 휘둘러, 몸을 보호한 것이다.
“……검으로 불을 베었어? 그것도 염화(炎火)를?”
“진짜였으면 모를까, 분신 주제에 너무 바라는 게 많군.”
우성의 대꾸에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에든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분신이라 하더라도 미카엘은 대천사였다. 더군다나 모든 힘을 다 쏟아낸 게 아니라 해도, 그가 쏘아낸 염화(炎火)는 ‘어떤 것이라도 불태울 수 있다’는 권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우성이 휘두른 검은 그 권능을 파해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거나, 또 다른 권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보통의 검사가 보통의 검으로 미카엘의 염화에 부딪혔다면, 검과 함께 몸이 재가 되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에든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우성이 들고 있는 검이 보통 검이 아닌, ‘진(眞) 마검 아포피스’라는 것이다.
대천사의 염화에 대응할 수 있는 검. 그것도 고작 분신이라면 말 할 것도 없었다.
“아무래도 넌 보통 이방인은 아닌 듯하군.”
“아무렴. 보통 이방인은 아니지. 아직 모자르긴 해도, 내가 선택한 주인이니.”
우성의 말에, 미카엘의 눈에 이채가 띄었다.
“너, 이방인이 아니구나.”
“미카엘. 넌 여전히 눈치가 느리구나. 하하하!”
“그 몸뚱이에 무엇이 들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영혼까지 태워주마.”
화아악-.
미카엘의 네 쌍의 날개, 여덟 개의 날개가 활짝 펴졌다. 붉게 물든 날개는 서서히 불이 붙기 시작하더니 이내 염화(炎火)의 날개로 변하기 시작했다.
미카엘의 몸이 하늘로 떠올랐다. 그의 양 손에 이글거리는 불이 타올랐다. 네 쌍의 염화의 날개를 펄럭이며 이글거리는 불꽃을 거머쥔 미카엘은 천사들을 굽어보았다.
“칼랍.”
“부르셨습니까?”
“지금 당장 이방인들을 모두 죽여라. 한 놈도 남겨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칼랍과 함께 지상에 몸을 숙이고 있던 천사들이 일어났다. 그들 사이에 있던 리치앙과 세 명의 플레이어들은 미카엘의 등장과 천사들의 모습에 속으로 적잖이 안도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난 살 수 있어.’
리치앙은 아직까지도 몸이 떨렸다. 이 세 번째 던전에 들어와, 천사들을 마주했을 때, 그녀는 꼼짝없이 죽는구나 싶었다.
마지막 남은 목숨이었다. 4회 차 플레이어인 그녀는 배치고사에서 한 번을 포함해 총 네 번씩이나 목숨을 잃었다. 5천 포인트를 지불해 라이프를 살 수 있다면 좋으련만, 리치앙에게 5천 포인트는 너무나도 컸다.
그녀는 이번 원정을 하나의 반환점으로 생각했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목숨을 늘리고, 원정의 성공으로 얻은 포인트로 또 하나의 목숨을 살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또 다른 보상 역시 적지 않을 것이고.
그런데 그것이 천사들을 만나면서 틀어졌다. 난데없이 천사 진영으로 오라니, 그녀에게는 너무 무서운 이야기였다.
‘차라리 잘 된 것일수도 있어.’
이대로라면 얼마 가지 않아 남아있는 목숨 하나까지도 잃을지 모른다. 그렇게 되느니, 이참에 새로운 진영으로 옮기는 것도 다른 의미에서의 반환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천사들은 착할 테니까…….’
그녀 역시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천사(天使)’들에 대한 선입견이 없지 않았다. 천사는 선(善)이고, 악마는 악(惡)이다. 그녀는 현대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으로서, 당연히 선(善)을 동경했다.
푸욱-.
“흐억!”
그 때, 리치앙은 등을 파고드는 섬뜩한 금속의 느낌에 신음을 터뜨렸다. 시선을 조금 내려 보니, 등을 꿰뚫고 나온 새빨간 피를 머금은 순백의 창이 보였다.
“왜……에…….”
“목표는 이방인들의 말살(抹殺). 예외는 없다.”
“살려… 준…….”
‘살려 준다며’라는 말을 차마 잇지 못하고 리치앙의 숨이 끊어졌다. 고개를 떨어뜨린 그녀의 입에서는 가득 머금고 있던 핏물이 줄줄 새어나왔다.
다른 세 명의 플레이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리치앙과 같이 천사들의 사이에 있다가, 순식간에 창에 몸을 찔려 목숨을 잃었다. 단 하나밖에 남아있지 않던 목숨은,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졌다.
“시발! 살려준다며, 개새끼들아!”
천사들의 창에 찔려 죽은 플레이어들의 모습에 안현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의 거친 욕설에도 칼랍은 표정하나 바뀌지 않은 채 대꾸했다.
“우리들의 의지는 대천사 미카엘님의 의지보다 하찮은 것.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지랄! 시팔, 역시 니들은 믿을 게 못 돼, 빌어먹을 비둘기 새끼들.”
“비둘기라. 그 말이 정답이군.”
천사들을 향한 안현수의 말에 우성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안현수에게로 향하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 염화의 날개를 펄럭이는 미카엘의 분신에게로 향해있었다.
“그럼 난 붉은색 비둘기를 잡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