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분명했다. 단순히 닮았다고 보기 힘들었다. 아니, 그보다는 우성은 그림에 그려진 검을 보는 순간 그것이 진정한 마검 아포피스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게… 아포피스의 진짜 모습?’
그림에 그려진 아포피스는 우성이 들고 있는 아포피스와는 조금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좀 더 화려하고, 수수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고작 그림일 뿐이었지만 우성은 아포피스에서 무언가 특별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우성에게는 그림을 해석하는 재주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앞에서와는 달리 우성은 이 그림을 단박에 해석할 수 있었다.
‘싸우고 있다.’
이 검을 두고.
수천, 수만의 천사들과 악마들.
대천사들과 군주급 악마들.
그들이 이 검 한 자루를 사이에 두고, 싸우고 있었다.
‘아니… 한 자루가 아니야.’
한 자루가 아니다. 우성의 시선이 위로 올라갔다. 문의 크기는 처음에 비해 훨씬 커져서, 삼 미터가 족히 넘어있었다.
땅에 박혀 있는 마검 아포피스. ‘진(眞) 마검’의 형태를 넘어, 무언가의 형태를 띄고 있는 완전체의 모습. 그것의 위로 태양 아래에는 아포피스와 비슷하면서도 전혀 반대되는 힘을 가진 어떤 검 한 자루가 떠올라 있었다.
‘혹시… 저것이 라?’
아포피스의 대적신. 태양을 지배하고, 지상을 밝히는 하늘의 지배자.
아포피스라는 검이 있으니 태양신을 상징하는 검 또한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마냥 추측이었을 뿐, 확신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 그 생각을 하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아, 태양신의 검으로 추측되는 검의 그림을 바로 발견할 수 있었다.
‘이 그림은 대체 뭐지?’
천사와 악마들의 신화?
실제로 있었던 일일까? 우성은 침을 꿀꺽 삼키며 손에 쥐고 있던 아포피스를 떨리는 눈으로 바라봤다.
‘대체 이 검은, 뭐지?’
문득 아포피스를 선택했을 때, 오더가 경고한 까닭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감당할 수 없는 무기이기 때문에? 아니면, 이 검으로 인해 일어날 무언가 때문에?
어떤 이유건, 보통 검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다른 마검들 역시 모두 이와 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부터 겁을 집어 먹으면 어떻게 하자는 거냐. 작은 주인아.
그 순간 머릿속을 쾅쾅 울리는 나긋한 음성.
“아아악!”
우성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지끈거리다 못해,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검이 ‘두렵다’라는 생각이 든 순간, 진통이 오기 시작한 것이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머리가 욱신거렸다. 머리를 쥐어뜯듯 붙잡았지만 진통은 가시지 않았다. 오히려 진통은 점점 더 심해져, 몸까지 떨려왔다.
“오, 오빠?”
“왜 그러십니까?”
옆에 있던 혜미와 에든이 우성의 몸을 붙잡았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몸을 부르르 떨던 우성은 간신히 고개를 들고 그림을 바라봤다.
-고작 검 따위에게 겁을 먹은 것이냐? 작은 주인아, 진정 내가 두렵고 무섭다면 넌 진정 주인으로서 실격이로구나.
아포피스의 음성이다. 분명했다. <대리인>스킬을 사용했을 때 외에, 아포피스의 음성이 이토록 또렷하게 들린 적은 처음이었다.
‘젠장. 무섭긴…….’
우성은 그림에 그려져 있는 아포피스를 또렷이 바라봤다. 그림 속의 아포피스가 점차 선명해지더니, 이내 자신이 들고 있는 검과 겹쳐 보였다.
‘고작 검 따위가 뭐라고……!’
씨익.
왜일까?
우성은 누군가 웃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누군가가 아니었다. 분명 자신이 들고 있는 검, ‘아포피스’는 웃고 있었다.
-그거다, 작은 주인아.
[아포피스의 시련을 극복하였습니다.]
[정신력이 더욱 견고해집니다. 정신력 스텟이 2포인트 상승하였습니다.]
[마력 스텟이 2포인트 상승하였습니다.]
[마기 스텟이 2포인트 상승하였습니다.]
깨질 듯이 밀려오던 두통이 사라짐과 동시에, 우성은 더없이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난데없이 이어진 스텟 포인트 보상이라니.
‘이건 또 무슨 경우지?’
아포피스의 시련이라니? 뜬금없이 퀘스트였던 건가?
아무래도 그건 아닌 듯했다. 퀘스트라는 시스템 창도 뜨지 않았고, 퀘스트 보상 같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 퀘스트가 뜨다니, 영 이상했다.
우성은 들고 있던 검을 올려 검신에 자신의 얼굴을 비쳐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마치 검이 웃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다시 잠잠하다. 원래부터 도통 모를 검이라는 생각은 종종 했지만, 이런 섬뜩한 느낌은 또 처음이었다.
‘아니, 그런 생각 하면 안 되지.’
두통이 생긴 시점은 검이 무섭다고 생각했을 때부터였다.
마검은 사용자를 잡아먹는 검이었다. 정신력이 약해지는 순간, 주인의 정신과 자아를 잡아먹는다. 어쩌면 방금 전만 해도 아포피스에게 자아를 먹힐 뻔한 위기였을지도 모른다.
“왜 그러십니까?”
“오빠, 괜찮아?”
그 때, 차차 정신이 돌아오자 우성은 비로소 옆을 돌아볼 수 있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의 혜미와 혜정, 안현수와 에든. 그밖에 다른 플레이어들이 하나같이 우성의 주위로 몰려들어 있었다.
하긴,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머리를 잡고 바닥에 쓰러졌으니 걱정할 만도 할 것이다. 특히 혜미의 표정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지, 우성 본인도 흘리지 않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제 괜찮습니다. 끙.”
우성은 조금 남아있는 두통을 머리를 휙휙 흔들어 털어냈다. 그러면서 몸을 일으켜 팔을 빙글 돌리며, 애써 괜찮다며 몸을 과시했다.
“정말 괜찮은 것 맞습니까?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머리를 잡고 쓰러져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지금까지 써온 스킬의 부작용 같은 겁니다. 패널티가 조금 있는 스킬이었거든요.”
“스킬의 부작용? 대체 어떤 스킬이기에…….”
“자세한 건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죄송합니다.”
어떻게 둘러대야 할까 고민하던 우성은 결국 <광폭화>스킬에서 변명거리를 고안해 냈다. 실상은 단기간에 강해지는 대신 체력 스텟의 감소라는 패널티가 있었지만, 그것을 두통과 같은 부작용으로 돌린 것이다.
우성의 변명이 제법 그럴듯 했는지 에든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같아선 어떤 스킬인지 궁금했지만, 플레이어의 고유 스킬을 캐묻는 건 도리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에든은 회 차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강한 우성의 모습이 내심 의아하던 차이긴 했다. 하지만 부작용을 감수하고 사용하는 스킬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 비정상적인 강함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그럼 이제 부작용은 좀 괜찮아 진 겁니까?”
“네. 이제 괜찮습니다. 걱정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확 줄어든 원정대인데, 우성이라는 중요한 전력을 잃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불안한 건 있어, 에든은 찝찝한 기분을 남기며 말했다.
“그럼 이제 사제분들과 마법사분들은 준비해 주십시오. 이 문을 열면, 이번엔 또 뭐가 나올지 알 수 없으니까요.”
첫 번째 문에서는 기형 천사들과 백골렘이, 두 번째 문에서는 천사 진영의 플레이어들이 나왔다.
갈수록 강해지는 적들에 이제는 진절머리가 날 정도였지만, 이제 와서 뒤로 돌아갈 순 없었다. A+등급의 퀘스트, 그것도 히든 퀘스트(Hidden Quest)는 2회 차 플레이어인 에든조차도 처음 맡아 보는 등급의 퀘스트였다. 등급으로 보나, 히든 퀘스트라는 점으로 보나 그 보상을 생각하면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나도…….'
그저 그런, 아니 2회 차 플레이어 치고는 조금 부족하다 에든 자신이 한두 단계 도약할 수 있는 계기였다. 그런 에든은 물론이고 다른 플레이어들 역시 이번 퀘스트를 포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사제들과 마법사들의 주문이 모두 완성되었다. 더 이상 지체하느니, 차라리 매도 일찍 맞는 게 낫다고 생각되어 에든은 지체 없이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럼, 열겠습니다.”
끼이이이익-.
3미터가 넘는 거대한 문은 쇠가 끌리는 거친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렇지 않아도 환한 던전 안이었는데, 문을 열자 더욱더 환한 빛이 눈앞을 가렸다.
“윽.”
“뭔 빛이야?”
너무 환한 빛에 플레이어들은 각자 경계하며 손으로 눈앞을 가렸다. 그 중 우성은 반사적으로 손이 아닌 아포피스를 앞으로 겨눴다.
[성스러운 빛이 전신을 감쌉니다.]
[마기와는 상극의 힘입니다. 강력한 신력이 감도는 공간 안에서 마기는 힘을 쓸 수 없습니다.]
[일시적으로 마기 스텟이 5포인트 감소합니다.]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느낌에 우성은 눈살을 찌푸렸다. 방금 전에 정신력과 마력, 마기 스텟이 상승하는 효과를 보았는데 다시 도루묵이었다.
‘신력?’
신력이라면, 천사들이 쓰는 그 힘을 말하는 게 아니었나? 하긴, 처음 이곳에 들어올 때 던전의 입구를 막고 있던 힘 역시 신력에 해당하니 던전 안쪽에 신력이 있다고 해서 크게 이상할 건 없었다.
다행히 이번엔 문을 열자마자 기형 천사가 튀어나오거나 천사 진영 플레이어가 있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만약 있었다면 갑작스러운 빛으로 시야를 가린 틈을 타 기습을 했을 텐데, 그랬다면 상당히 곤란할 뻔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빛에도 익숙해 진듯 차차 시야가 돌아왔다.
“여긴 뭐가 이리 환해?”
“으, 아직도 잘 안 보여.”
혹시라도 뭔가 있을까 소곤소곤 말하는 플레이어들은 각자 무기를 앞으로 뻗은 상태였다. 우성은 이상하게도 다른 플레이어들에 비해 시야를 찾는 게 조금 느렸는데, 그래도 잠시 후 세 번째 던전의 내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긴…….”
세 번째 던전을 확인한 우성은 익숙한 광경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이 자리에 모인 플레이어들이라면 모두가 이곳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소원의 방?”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순백의 공간.
어디까지가 끝인지, 발밑이나 위나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공간이었다. 어디선가 불쑥 오더가 나타나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것 같은 던전의 모습에 우성은 물론이고 플레이어들 모두가 넋을 잃었다.
“여긴 대체 뭐지……?”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에든은 일단 던전 안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갔다. 아무것도 없다면 그것대로 고마운 일이라, 일단 기꺼운 마음이었다.
그렇게 에든과 함께 원정대가 세 번째 문 안으로 깊숙이 들어왔을 때였다.
아아아아아-.
하아아아아아-.
익숙한 울음소리. 기형 천사들이 등장할 때 울부짖는 소리였다.
헌데, 이번엔 뭔가 이상했다. 지금까지의 울음소리가 구술픈 비명과 같았다면, 지금 들리는 울음소리는 마치 기쁨에 신음하는 듯했다.
“어, 어디서 들리는 거야?”
“도통 뭐가 보여야…….”
보이는 적보다는 보이지 않는 적이 훨씬 무서운 법이었다. 원정대 플레이어들은 사방에서 울리는 거대한 울음소리에 놀라 엉거주춤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은 울음소리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저, 저거…….”
한 플레이어가 아무것도 없던 벽을 가리키며 입을 쩍 벌렸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플레이어가 가리킨 방향으로 모아졌다.
그곳에는 사람의 머리가 순백의 벽을 물처럼 통과하며 서서히 튀어 나오고 있었다. 그뿐만 해도 놀라울 진데, 그것의 등 뒤로는 역시나 천사의 날개가 뻗어 있었다.
그것도…….
두 쌍이나 말이다.
“저기도!”
“저, 저기!”
넋놓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플레이어들이 하나 둘 여기저기를 가리켰다. 지금껏 만난 날개 한짝의 기형 천사들과는 다른, 두 개의 날개를 온전지 갖춘 진짜 천사들이었다.
하나, 둘, 셋…….
하나씩 그 수를 세어가던 우성은 결국 세는 것을 포기했다. 결국 수십으로 늘어난 ‘진짜’ 천사들을 보며 우성은 입술을 깨물었다.
“미치겠네, 이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