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마지막으로 좋아하는 사람들과 술을 마셨던 게 언제인지 모르겠다. 학창 시절이 끝나갈 때쯤이 마지막이던가? 변변찮은 대학도 가지 못했던 우성은 마지막으로 즐겁게 술을 마셨던 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클럽에서 마시는 술은 썼다. 여자 손님들이 한 잔씩 따라주던 술. 손님 관리 차원에서 마셨던 술은 쓰디쓴 약처럼 맛이 없었다.
무슨 차이일까? 똑같은 술인데, 맛이 다르다. 술이 달다고 느껴지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단 셋뿐이었지만 도란도란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회 한 접시를 시켜놓고 마시는 술은, 단순한 소주일 뿐인데도 지금껏 우성이 마셔온 어떤 술보다 달았다.
세 명 중 제일 주량이 약한 사람은 혜미였다. 물론 그녀도 1병반까지는 별로 힘든 기색이 없었다. 2병째 될 때쯤, 슬슬 어지럽다고 잔을 놓았으니 그녀의 주량은 대략 1병반에서 2병 사이쯤이었다.
안현수는 생각 이상으로 꽤 주당이었다. 내심 자신보다 술을 잘 먹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싶었던 우성이었다. 소주가 아닌 양주, 보드카 종류의 비싸고 도수가 강한 술을 주로 마셨던 만큼 우성은 남들에 비해 술이 무척 강한 편이었다.
그럼에도 안현수는 우성과 페이스를 맞춰 잔을 부딪쳤다. 둘이서 4병까지는 무리 없이 비웠고, 함께 비운 병이 6병이 넘어설 때에도 크게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주당은 주당이군.’
우성은 자신의 주량이 시중에서 판매하는 소주로 4병에서 5병 사이가 아닐까 추측하고 있었다. 이만하면 보통 사람들 치고는 엄청 강한 편이었다.
하지만 안현수는 그런 우성과 비슷한 페이스로 마시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보다 주량이 더 강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우성은 슬슬 자리를 파했다.
“이만 가자. 혜미도 힘들어 보이고.”
“쩝. 그렇긴 하네. 세 명이서 이만하면 많이 마시긴 했다.”
슬슬 얼굴이 붉어진 안현수는 그래도 꽤 힘들긴 한지 몸을 슬슬 비틀거렸다. 하긴, 두 명이서 비운 술이 10병에 혜미가 2병 정도를 비웠으니 우성과 안현수, 둘이서 각각 4병씩은 비운 것이다.
“오랜만에 기분 좋게 잘 마셨네. 오늘은 푹 잘 수 있겠어.”
“자면 또 만나겠군.”
“아, 그러고 보니 그러네. 흐미, 지겨운거.”
과하게 손사래를 치는 안현수의 액션에 우성은 피식 웃으면서도 부정하진 않았다. 현실에서나 저쪽 세상에서나, 이들과 함게하는 시간이 과하게 많아졌다.
‘서현이도 아포칼립스를 하게 된다면…….’
더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질 텐데.
문득 떠오른 생각에 우성은 양 손으로 뺨을 탁 쳤다.
‘아니지. 내가 무슨 생각이냐 대체.’
우성은 취해서 살짝 비틀거리는 혜미의 몸을 부축했다. 대리운전 번호를 가게 주인에게 부탁하며 안현수가 손을 흔들었다.
“잘 들어가라. 도착하면 연락하고!”
“그래. 이따가 보자.”
손을 흔들며 우성은 혜미와 함께 택시를 잡았다. 어느새 시간이 벌써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른 저녁부터 마시기 시작했으니, 꽤 오래 마시긴 했다.
혜미가 사는 아파트는 근방에서 집값이 가장 비싼 곳이었다. 재벌까지는 아니어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부자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겉으로는 조금 좋아 보이는 아파트도 이상하게 으리으리해 보였다.
‘난 언제 내집 마련 해 보나.’
하긴, 저쪽에서는 이미 집이 있다. 그것도 도시 한복판에 마당까지 있는 넓은 집으로.
“우성 오빠…….”
“아, 아직 안자고 있었어?”
간드러지는 혜미의 목소리에 우성은 황급히 그녀의 몸을 더 강하게 부축했다. 그녀는 몸에 힘이 빠졌는지 자꾸만 축 늘어지고 있었다.
“오빠… 혜정이 좋아해?”
“……응?”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슬슬 비틀거리던 몸을 세우며 혜미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 이제 좀 괜찮아?”
“응. 속이 좀 메스껍고 토할 것 같긴 한데, 어지러운 건 괜찮아.”
그게 괜찮다는 거냐, 아니면 안 괜찮다는 거냐.
어차피 혜미가 사는 아파트는 코앞이다. 경비도 있으니 굳이 이 늦은 시간에 집 앞까지 바래다 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럼 잘 들어가. 가다가 실수하지 말고.”
“오빠도… 조심히 들어가.”
혜미는 손을 흔들며 우성이 시야에서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우성 역시도 혜미가 들어가기를 기다리다, 먼저 가라는 혜미의 말에 뒤돌아섰다.
사라진 우성의 자리를 바라보던 혜미가 돌연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휙 돌아서 아파트 안으로 들어서는 그녀의 걸음걸이는 어느새 멀쩡해져 있었다.
“아오, 저 멍청한 놈.”
**
현실에서의 18시간, 아포칼립스에서의 7일.
집으로 돌아간 우성은 바로 자리에 누웠다. 클럽에도 잘 나가지 않았던 터라 오래간만에 술을 마셔 몸이 꽤 노곤했다.
조금 비틀거렸던 몸은 금세 수면에 빠졌다. 이렇게 편한 마음에 잠자리에 든게 얼마만인가 싶었다.
소원의 방을 생략하고 우성이 눈을 뜬 곳은 익숙한 거실이었다. 우성과 일행들의 리셋 포인트로 지정되어 있는, 하멜의 북동쪽의 집이었다.
접속해 보니 혜미와 혜정은 이미 들어와 있었다. 막 씻고 나온 혜미는 수건으로 머리를 털더니 우성을 밝견하곤 소리쳤다.
“오빠! 왜 이리 늦었어?”
“네가 빠른 거다. 집 앞까지 바래다 줬으니, 나도 집에 가는 시간이 있지.”
“바로 들어온 거야? 흠. 하긴, 아직 하루도 안 지나긴 했지.”
“언니. 기다리긴 내가 제일 많이 기다렸는데…….”
언제부터 접속해 있었던 건지 혜정이 울상을 지으며 거실로 들어왔다. 두 명의 얼굴을 확인한 우성은 어깨를 으쓱이며 소파에 앉았다.
“현수는?”
“아직 안 들어왔어요. 술 마셨다면서요? 현수 오빠 꽤 많이 드셨다는 것 같은데.”
“많이 먹긴 했는데, 괜찮아. 취하기는 혜미가 많이 취했지.”
“네에? 언니가요? 혼자 세 병은… 으읍!”
황급히 혜정의 입을 틀어막으며 혜미가 화제를 돌렸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혜정이 경매장에서 괜찮은 매물을 봤다더라고.”
“괜찮은 매물? 혹시 마법서냐?”
“으응, 그, 그랬던 거 같은데. 그렇지?”
평소답지 않게 혜정은 가느다랗게 치켜 뜬 눈으로 혜미를 흘겨봤다. 하지만 이내 무슨 의미인지 흥, 하고 콧바람을 불며 대답했다.
“네, 그랬던 것 같네요.”
“요 기지배가 말투 봐?”
둘의 행동이 수상하긴 했지만 쓸 만한 마법서라면 구해둘 필요가 있었다. 혜미나 혜정은 이미 한 사람 몫을 톡톡히 해 낼 스텟을 가지고 있었고, 부족한 건 그 스텟을 십분 활용할 스킬이었다.
괜찮은 마법서의 가격은 어지간한 장비 아이템을 웃돈다. 물론 그렇다고 마병이나 안현수가 가지고 있는 천룡창(天龍槍)처럼 비싼 건 아니지만, 유니크(Unique)등급의 마법서는 몇 만 골드는 필요했다.
‘원정까지는 시간이 꽤 남긴 했지만…….’
볼락의 원정 퀘스트 까지는 아직 80일이 넘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아, 그런데 마법서에도 직업 제한이 붙어있는 거 알아요?”
“직업 제한?”
“네. 사제가 익힐 수 있는 마법서는 마법사가 익힐 수 없어요. 그리고 반대로 마법사가 익힐 수 있는 마법서는 사제가 익힐 수 없고요.”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대부분의 게임에도 스킬북에 직업 제한이 걸려 있으니. 물론, 그런 게임들의 경우 전사 계열의 직업에도 스킬북이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아주 가끔이지만, 전직서도 있는 모양이에요.”
“전직서?”
지금까지 들었던 이야기들 중 가장 귀가 솔깃해지는 이야기였다. 책을 통한 전직이라면 노멀(Nomal) 직업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방법이었다.
“더 플레이어에서 알게 된 사실인데, 특별한 던전이나 히든 퀘스트를 통해서 레어(Rare)나 유니크(Unique) 직업으로 전직할 수 있대요. 그리고 그 방법 중 하나가 전직서라는 책을 통한 전직인데, 이 책이 필요 없는 플레이어들이 경매장에 이걸 내놓기도 한데요.”
“하긴. 책이라면 어쨌건 주고받을 수 있는 물건이니.”
하지만 역시 책을 통한 전직은 한정되어있었다. 전사 계열의 직업은 책을 통한 이론의 습득만으로는 전직의 성립이 되기 힘들 테니까. 지나치게 현실도가 높은 만큼, 그건 당연한 일이다.
“꽤 많이 알아봤나보네.”
“저 시간 많잖아요. 병실에 누워있으면 뭐라도 해야죠. 안 그럼 얼마나 심심한데요.”
하긴, 사람이 다녀가지 않을 때 혜정이 침상에서 할 가 바로 노트북 정도였다.
혜정은 우성과 안현수, 혜미를 포함한 모두가 떠난 이후로 노트북으로 ‘더 플레이어’에 접속했다. 워낙 방대한 양의 정보가 노출되어 있는 만큼 시간 죽이는 용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래도 그런지 전 여기도 꽤 마음에 들어요. 처음엔 너무 무서웠는데… 이젠 쉴 곳도 있고, 여기선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있고, 안 아프잖아요. 다 같이 돌아다닐 수도 있고요.”
“……그래? 다행이네.”
어쩐지 서현이와 혜정이 겹쳐 보여 우성은 측은한 표정을 지었다. 어색함에 머리를 긁적이던 우성이 화제를 돌렸다.
“네가 봐 두었다는 마법서는 가격이 얼마지?”
“그렇게… 싸지는 않아요. 5천 골드에요.”
“확실히 싼 편은 아니네. 하지만 그렇다고 비싸지도 않고.”
신규 플레이어나 5회, 6회 차 플레이어들에게 5천 골드는 상상도 못할 금액이다. 고작 스킬 하나 더 배우겠다고 마법서 하나에 전 재산을 투자하는 플레이어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원정때까지 마법서, 장비 위주로 경매장이나 상점가를 뒤져 봐. 가격은 상관없어. 목표는 단기간의 스텟의 성장, 그리고 그를 통한 원정 퀘스트의 무사 완료다.”
“정말? 가격은 상관없어?”
“……넌 또 언제 왔냐. 넌 예외.”
우성은 언제 들어왔는지 반짝거리는 눈으로 얼굴을 들이민 안현수의 얼굴을 밀어냈다. 처음부터 장난이었던 안현수는 히히 웃으며 구석자리 소파에 털썩 앉았다.
“알아. 난 이 창 하나면 충분해. 완전 마음에 들어.”
“넌 가격은 상관있고, 1000골드 안쪽으로 무기를 제외한 다른 장비를 알아봐. 가능하면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장비들도 같이 알아봐 주면 더 좋고. 물론, 나도 같이 알아보긴 하겠지만.”
천룡창을 사느라 돈을 많이 사용해 다른 일행들에 비싼 장비를 사 주지는 못하지만, 1000골드면 그리 적은 돈은 아니었다. 그 정도면 어지간한 3, 4회 차 플레이어들이 사용하는 장비를 살 수 있었다.
우성이 사용하고 있는 마검 아포피스야 말할 것도 없고, 안현수의 천룡창 역시 어지간한 1회 차 플레이어들도 만져보지 못한 어마어마한 장비였다. 우성이 얼마 전에 구입한 ‘레바논의 미스릴 팔찌’역시 어지간한 상위 1회 차 플레이어들도 군침을 흘릴 만한 아이템이었다.
1000골드 정도면 신규 플레이어인 안현수에게 차고 넘친다. 이미 천룡창 하나만으로도 안현수의 장비는 어느 플레이어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할 수 있었다.
“신규 플레이어 주제에 친구 한 번 잘 둬서 장비 빨 한번 제대로 받겠군.”
“알면 잘 해라.”
“당연하지. 원정에서 내 실력을 아주 제대로 보여주마.”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우성은 안현수의 실력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말로 하지 않아도 그는 유니크 직업에 S클래스를 보유한 플레이어였다.
이미 그 수준은 신규 플레이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였고, 천룡창을 손에 쥔 지금은 어지간한 4회 차 플레이어는 가볍게 찜 쪄 먹을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장비 빨의 영향이 꽤 크긴 하겠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천룡창을 손에 쥔 안현수는 얼마나 강해졌을까? 그 전까지 대여 수련장에서 보여주었던 안현수의 실력만 해도 보통 수준은 아니었는데.
문득 궁금증이 든 우성이 제안했다.
“경매장에 잠깐 들렀다가, 마당에서 오래간만에 대련이나 하지.”
“어, 그거 좋지! 나도 빨리 이 녀석을 써먹어 보고 싶었거든. 아무래도 네 무기보다야 좀 떨어지지만.”
안현수 역시 등에 맨 천룡창을 부드럽게 쓸며 기대로 가득 한 표정을 지었다. 어린아이처럼 호들갑을 떨긴 했지만 안현수는 싸움을 썩 꺼리는 편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스스로도 근래 강해지고 있다는 걸 느꼈는지 대련이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그 뒤로 우성과 일행의 일과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보름에서 스무 날에 한 번, 현실로 돌아가는 걸 제외하면 괜찮은 장비를 구하기 위해 경매장에 들리고, 스텟을 올리기 위해 대여한 수련장을 이용했다.
장비.
스텟.
그리고 개인 역량.
일행은 차곡차곡 실력을 쌓아 나갔고 원정 시작 날 100일은 빠르게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