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아포칼립스에서 나오기 전, 우성은 안현수의 연락처와 사는 곳을 알아뒀다. 그렇지 않아도 한 번 만나서 술이나 마시자던 안현수는 연락처를 묻는 우성에게 흔쾌히 번호를 건넸다.
더 플레이어에서 암상에 대해 알게 된 우성은 우연찮게 안현수와 지역이 같아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경찰인 안현수와 함께 있다면, 암상에서도 별다른 해를 끼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대 성공이었다.
“차로 오니까 금방이네.”
“oo아산병원이면 꽤 큰 병원인데. 이쪽 땅값도 꽤 비싸고.”
“그래봤자 3평짜리 고시텔에 사는 스물여섯 냄새나는 아저씨지. 여기 사는 것도 딸아이 병원이랑 일자리가 가까워서 그렇지, 돈이 많아서는 아니야.”
익숙한 병원이 눈앞에 보이자 우성은 의미 없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뒷자리에는 1억이 넘는 돈이 든 가방이 있었지만, 아직까지도 그리 실감이 나지 않았다.
“혜정이도 여기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그래. 그래서 혜정이 병문안 온 혜미랑 우연히 만났고.”
“부인은 어디가고 바람이냐?”
“딸은 있는데, 부인은 없어 인마.”
“…….”
안현수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차를 몰았다. 잠시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병원 주차장에 차를 대 놓고는 두 사람이 차에서 나왔다.
“어? 저기 왔다. 오빠들!”
“혜미 쟤는 여기서 보니까 더 예쁘네.”
혜미는 웬일로 평소 잘 입지 않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평소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게 꾸밈없이 수수하게 다녔던 혜미는 의외로 청초한 흰색 원피스가 잘 어울렸다.
도도도 빠르게 달려온 혜미는 우성과 안현수의 앞에 척 하고 섰다. 우성과 안현수를 향해 손을 과하게 흔들며 반갑게 인사한 그녀는 흰색 원피스를 팔랑 들어 올렸다.
“어때요 여러분? 이렇게 꾸며 입으니까?”
“빨리 헤정이 보고 싶다.”
“뭐라고? 이 오빠가?”
고양이처럼 양 손을 들어 올려 손톱을 세우며 혜미가 안현수의 가슴팍을 할퀴었다. 그렇게 아프지 않을 텐데도 안현수는 과한 몸짓으로 엄살을 부렸다. 두 사람의 장난을 지켜보던 우성이 피식 웃었다.
“잘 어울리네.”
“그치? 하여간 현수 오빠는 보는 눈이 없어요.”
“아니, 혜정이 보고 싶다는 말이 왜?”
“숙녀를 앞에 두고 다른 여자를 보고 싶다는 말이 나와?”
“야, 혜정이가 남이냐? 네 동생이야!”
티격 거리는 두 사람의 사이로 우성의 손이 끼어들었다. 아포칼립스에서도 자주 이러긴 했지만, 현실에서 만난 게 꽤 반가웠는지 오늘은 정도가 조금 더 심했다.
“그만들 하고, 혜정이나 보러 가자. 기다리겠다.”
“아, 맞다.”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며 길도 모르는 주제에 안현수는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그러면서 가만히 있는 우성과 혜미에게 빨리 따라오라며 손짓했다.
스물여섯 나이답지 않게 개구쟁이 같은 모습에 우성과 혜미는 동시에 웃고 말았다. 나란히 서 있던 두 사람은 천천히 안현수의 뒤를 쫒았다.
“오빠! 그쪽 아니야!”
**
“부모님도 계시다고?”
오늘도 역시라는 생각에 우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병실 앞에 도착해서야 혜미는 부모님의 존재를 알려주었다.
하지만 우성과 안현수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처음 부모님도 있다는 이야기에 도망가려 했던 우성과는 달리, 안현수는 거울을 찾더니 머리를 단정하게 정리했다. 그러더니 혜미에게 빌린 거울에 자신 얼굴은 이런저런 각도로 비춰보았다.
“……너 뭐 하냐.”
“됐어. 완벽해.”
비장한 얼굴로 병실로 다가가 문을 두드리는 안현수를 보며 우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지랄한다.”
똑똑-.
“들어갑니다.”
조심스럽게 병실 문을 두드린 안현수가 앞장서서 안으로 들어갔다. 혜미와 우성은 누가 먼저 할 것 없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며 그 뒤를 따랐다.
병실에는 역시 혜정과 그녀의 부모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때, 안으로 들어간 안현수과 눈을 마주친 혜정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오빠?”
“안녕하십니까.”
그답지 않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안현수가 혜정의 부모님에게 인사를 건넸다. 놀란 표정으로 안현수를 알아보는 혜정의 반응에 그녀의 부모님이 물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다시 뵙네요.”
안현수의 뒤쪽으로 우성과 혜미를 발견한 어머니는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우성을 데리러 가겠다는 혜미를 기다리고 있었던 차였다.
“그럼 이쪽이 그……?”
“안현수라고 합니다, 어머니.”
“아, 안녕하세요.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확실히 혜정은 어머니를 닮은 것 같았다. 차분하고 조용하면서, 나긋나긋한 말투하며 얼굴까지. 그렇기 때문인지 안현수 역시 혜정의 어머니가 꽤 호감이었다.
“아, 감사합니다.”
“어머. 칭찬이라고는 이야기 안 했는데요? 호호호.”
“…….”
이런 점에서는 혜미를 닮은 것도 같았다. 안현수는 오는 길에 산 과자 세트를 건넸다. 혜미에게서 예전에 얼핏 혜정이가 과자를 많이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어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와! 이거 제가 되게 좋아하는 과잔데.”
“좋아한다니 다행이네. 병원에 혼자 있으면 심심하지?”
“네. 그렇긴 한데, 자주 엄마랑 아빠랑 언니와 와 줘서 괜찮아요.”
활짝 웃으며 씩씩하게 이야기 했지만 그래도 얼굴에 드리운 그늘을 완전히 감출 순 없었다. 아포칼립스에서와는 사뭇 다른 혜정의 얼굴색에 안현수는 속이 쓰라리는 느낌이었다.
“난 안 보이냐?”
“헤헤. 우성 오빠가 안 보일 리가 있나요.”
“어라? 난 네 눈에 현수오빠밖에 안 보이는 줄 알았는데. 언니가 보이긴 하니?”
“언니!”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꽥 소리를 지르는 혜정을 보며 혜미가 까르르 웃었다. 불만스러운 듯 볼을 부풀리고 혜미를 바라보는 혜정에게 우성이 한 술을 더 떴다.
“아, 얼마 전에 말한 혜정이 좋아한다는 친구가 이 친구입니다.”
“그래 보이네요.”
“어, 어머니?”
당황한 안현수의 반응에 혜미가 아예 쓰러졌다. 볼을 부풀리고 힝, 하며 울상을 짓던 혜정이 역시 얼마 가지 않아 웃음을 터뜨렸다.
그 뒤로 우성은 혜미와, 안현수는 혜정과 그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눴다. 무뚝뚝한 혜정의 아버지까지 마음에 들 정도로 안현수는 어른들에게까지 싹싹했다. 오죽하면 ‘신랑 삼으면 참 좋겠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병실의 이용 시간은 무제한이 아니었다. 혜정이 있는 병실 역시 중환자실이었고, 면회 시간이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아쉬움을 채 정리할 시간도 없이 담당 의사가 찾아와 퇴실을 요청했다.
“혜정아, 오빠가 다음에 또 올게.”
“네. 꼭이에요.”
“응. 꼭! 그럼 어머니, 아버지도 다음에 뵙겠습니다.”
어느새 어머니, 아버지라고 부르기 시작한 안현수는 혜정에게는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혜정의 부모님도 헤어지기가 아쉬웠는지 우성과 안현수의 손을 꼭 잡으며 다시 올 것을 부탁했다.
“바쁘겠지만 둘 다 자주 와요. 전에 우성씨가 왔을 때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혜정이가 요새 너무 자주 웃는 것 같아서 그래요.”
“당연하죠! 시간 날 때 종종 들리겠습니다.”
“저도 그러겠습니다.”
힘차게 대답한 안현수에 이어 우성 역시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안현수야 모르겠지만 우성은 어차피 서현이를 보려면 병원에 들려야 하는 입장이었다.
우성은 일행과 함께 곧장 서현이의 담당 간호사를 찾아 면회를 요청했다. 담당 간호사는 늘어난 일행에 어쩐 일이냐며 웃었다. 그간 사람 한 명 데리고 온 적 없었던 우성이 근래 들어 사람들을 데리고 오는 게 무척 보기가 좋았던 모양이었다.
“요새 서현이 상태가 너무 좋아요. 정말로 곧 퇴원해도 될 거 같아요.”
“정말입니까?”
“네. 그래도 지속적으로 검진은 받아야겠지만, 요즘 보면 보통 또래 애들보다도 건강한 것 같다니까요? 보면 알 거에요.”
우성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서현이의 병실을 열었다. 병실 문을 열자, 혜미는 서현이가 있는 침상으로 달려갔다.
“서현아, 언니 왔다~.”
“언니? 아빠?”
침대에서 뛰듯이 내려온 서현이가 와~ 하고 소리를 지르며 혜미의 품으로 안겼다. 혜미는 서현이를 가볍게 번쩍 들어 올려 비행기를 태웠다.
“아유, 무거워. 너 살 좀 빼야겠다.”
“히히. 요새 살이 많이 쪘데. 그 전까지는 홀쭉했다?”
그 말처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현이의 몸무게는 보통 또래 아이들에 비해 저체중이었다. 제대로 음식을 넘기기가 힘들 정도로 아플 때도 있었고, 하루의 대부분을 잠으로 때우며 식사를 거르기가 일쑤였기 때문이었다.
혜미가 안아들고 있던 서현이를 우성에게 넘겼다. 근력 스텟이 비약적으로 늘어나긴 했지만 꽤 무게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언제 이렇게 컸지?”
“몰라. 나도 아빠가 언제 마지막으로 안아줬는지 기억 안나.”
“……그건 그러네.”
씁쓸하게 웃던 우성이 서현이를 더 높이 들어 올렸다. 목마를 태운 우성이 빙긋 웃으며 물었다.
“우리, 오랜만에 산책이나 할까?”
**
담당 간호사에게 사정사정한 끝에, 우성은 의사의 허락을 받고 서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서현이의 병이 많이 호전된 만큼 담당 의사도 우성의 부탁에 무리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승낙해 주었다.
밖으로 나온 서현이는 병원 인근의 공원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보이는 것마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신기하다며 난리라, 주위 시선이 다 부끄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것조차 이해 못 할 우성이 아니었다. 오히려 당연한 반응이었다.
서현이는 철이 들 무렵부터 벌써 병원에 입원했다. 갓난아기 시절을 제외하면 병원 밖에서의 기억이 얼마나 될지가 의문일 정도였다. 서현에게는 지금껏 병원 속, 병실 안이 세상의 전부였다.
‘병만 다 나으면…….’
작은 손으로 옷깃을 꼭 잡은 채 공원의 분수로 자신을 이끄는 서현이를 보며 우성은 속으로 다짐했다.
‘원하는 건 다 해 줄게. 꼭.’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의사와 약속한 시간은 딱 2시간이었다. 그 이상은 서현이의 몸이 견디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2시간. 또 다시 꿈같은 시간이 지나갔다. 아포칼립스고 뭐고 다 잊고, 서현이와 함께 평생 행복한 시간만 가지고 싶었다. 욕심이라는 건 알지만, 그렇게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혜미야 말할 것도 없고, 안현수 역시 서현이와 꽤 잘 어울렸다. 다른 점이 있다면 쿵짝이 잘 맞았던 혜미와 서현이와는 달리, 안현수는 의의로 서현이의 놀림에 꼼짝을 못한다는 점이었다. 거기에는 혜미의 도움이 꽤 컸다.
“네 딸 진짜 귀엽다.”
“그치그치? 서현이 완전 내 타입이라니까.”
서현이와 헤어지고 난 뒤, 안현수와 혜미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그렇게 당해 놓고도 안현수는 좋아 죽겠다는 반응이었다.
‘하긴, 서현이가 귀엽긴 하지.’
이 와중에도 팔불출 아빠 같은 생각을 하며 우성이 말했다.
“술 마시자며?”
“사 주게?”
혹하는 표정을 지어보이는 안현수에게 우성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돈도 많이 벌었는데. 그 정도야. 아, 혜미 술 마실 줄 알지?”
“한 병 정도…….”
“한 병은 무슨. 왜 내숭이실까? 얼굴 봐서는 다섯 병은 마시겠구만.”
“이 오빠가 진짜? 내 얼굴이 어때서?”
다시 손톱을 치켜세우는 혜미를 보며 우성이 피식 웃었다. 서현이와 다시 헤어지고, 기분이 울적했는데 이들과 함께 있으니 그 울적했던 기분이 빠르게 나아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들과 함께 있으면 즐겁다.
‘좋네.’
서현이 한 명만 바라보고 살았고, 앞으로도 그 사실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이제나 저제나, 우성에게는 서현이 한 명밖에 없으니.
하지만 가끔 이렇게 주변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함께 있으면 재미있고, 즐거운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오늘 한 번 거나하게 마셔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