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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플레이어-84화 (84/258)

84화

현실로 돌아온 우성은 비현실적으로 자연스럽게 눈을 뜨며 일어났다. 또 다시 집구석에 처박혀 있던 스스로의 모습이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우성은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조각이라…….’

이 기억들은 분명 우성의 것이었다. 우성의 정신이 작게 나누어진 조각이 가지고 있던 기억. 그리고 현실로 돌아오며 본래의 우성이 작은 조각과 합쳐지며, 그 기억을 공유하게 된 것이다.

‘더는 신경 쓸 필요 없겠군.’

정신의 조각이 가지는 단점은 타인과의 소통에 본질적으로 거부감을 느끼고 복잡한 행동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성은 그것대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촤락-.

땅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던 우성의 손바닥으로 묵직하고 기분 좋은 금속음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손끝으로 시선을 돌려 보니, 익숙한 주머니가 보였다.

*

오래간만에 집구석에 썩혀 있던 가방을 메고 나선 우성이 향한 곳은 동네 한적한 금은방이었다. 금값이 크게 뛰어오른 요즘에는 어느 동네를 가나 금이나 보석을 취급하는 금은방이 한두 개 이상은 있었다.

짤랑-.

유리문을 열어젖히자, 어딜 나가 들을 수 있는 문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조용한 금은방에는 금으로 만들어진 여러 장신구들과 보석들이 전시되어 있어 눈이 부실 정도였다.

‘귀금속 백화점’이라는 흔한 이름의 금은방은 여러 금은방들이 하나로 합쳐져 있었다. 그렇다고 진짜 백화점처럼 규모가 엄청 큰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족히 100평은 되어 보였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그 때, 한참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금은방 가게 점원이 우성에게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장사할 마음이 있나 없나 구분이 가지 않는 태도였다.

“……더 플레이어.”

뜬금없는 대답이었지만 점원은 한참 집중하던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무표정하던 얼굴을 활짝 피우며 우성을 바라봤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어서 오십시오, 손님!”

뒤늦은 인사. 그 전까지는 손님이냐, 지나가는 개냐 하던 이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허리를 숙였다. 황당한 마음에 우성이 속으로 헛웃음을 들이켰지만, 허탕은 아니라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다. 설마하니 진짜 이런 곳이 있을 줄이야.

우성은 메고 온 가방을 벗어 점원 앞에 올려놓았다. 우성은 가방의 지퍼를 열고 안에 들어 있는 묵직한 주머니를 꺼내 올렸다.

주머니는 그렇게 작지 않았다. 무게도 제법 묵직했는데, 그 주머니의 크기를 확인한 점원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답니까?”

“다음에 또 오겠습니다.”

우성의 대답에 점원은 가늘게 눈을 좁히며 안경을 벗었다. 그는 무게를 가늠해 보려는 듯, 주머니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새내기인 모양이오?”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5회 차? 6회 차?”

“대답해야 합니까?”

우성의 되물음에 그는 씩 웃으며 답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지. 당돌하구만.”

이곳 귀금속백화점은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한 금은방이었다. 하지만 ‘더 플레이어’를 통해 알게 된 이곳은, 다른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금은방과는 거리가 멀었다.

뒤에서 쓰이는 이곳의 이름은 암상이었다. 그 이유는 아포칼립스를 플레이하는 플레이어들이 그곳에서의 금화를 현금으로 바꾸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아무 것도 없던 사람이 갑작스레 대량의 금을 가지게 된다면 의심을 살 수밖에 없었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사회적 시선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생겨난 곳이 바로 이곳, 귀금속백화점 ‘암상’이었다. 플레이어들이 현실로 가져온 금화들을 돈으로 바꿔주고, 그 출처를 속여 주는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물론 그에 따른 대가는 당연하게도 돈이었다.

“1돈에 14만원. 그 이상은 못 쳐준다는 거 알지?”

“네. 알고 있습니다.”

“어디보자, 금화 하나에 3.3돈정도 되고. 1돈에 14만원에, 금화가 300개면… 1억 2천 600만원. 어때?”

계산기를 두드려 보던 점원은 우성을 향해 0이 잔뜩 붙은 숫자를 보여주었다. 마지막에 ‘어때?’라고 물었지만, 우성은 감히 고개를 저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돈 한 번 벌기 쉽군.’

200포인트와 300골드가 아깝긴 했지만, 그 정도로 현실에서 1억이 훌쩍 넘는 돈을 구할 수 있었다. 새삼 지금껏 자신이 해온 고생들에 고개가 저어졌다.

“만족합니다.”

“현금으로 줄까? 아니면 계좌로?”

“……계좌는 좀 그렇군요. 여기가 그렇게 깨끗한 곳도 아니고 말이죠.”

우성은 얼굴에 쓰고 있는 하늘색 마스크를 코 위쪽까지 끌어 올렸다. 그뿐만이 아니라 어색하게 모자까지 쓰고 온 것이, 마치 범죄자 꼴이었다.

이곳은 암상이었다. ‘더 플레이어’를 보고 찾아온, 아포칼립스의 플레이어들이 이용하는 어두운 거래처.

그런 만큼 이곳을 방문했다는 것은 곧 아포칼립스를 플레이하는 플레이어라는 것을 증명하는 꼴이었다. 괜히 얼굴이나 신상이 팔려서 좋을 게 없었다.

“현금 있습니까? 가능하면 현금이 좋겠습니다만.”

“있지. 다행히 오늘은 금액이 적어서 되겠지만, 다음부터 현금을 원한다면 돈 가방이라도 구해서 오라고.”

점원은 우성의 가방을 집더니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기다리는 동안 답답한 마음에 마스크라도 잠깐 벗을까 했지만, 혹시라도 cctv라도 있으면 난처했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홀쭉했던 가방을 빵빵하게 채운 점원이 돌아왔다. 점원은 가방을 열어 내용물을 우성에게 보여줬다. 5만 원 권으로 묶여있는 돈다발이 가방에 가득 들어 있었다.

“1억 2천 600만 원. 500만 원 권 100개 묶음으로 26개다. 400만 원은 새로 온 손님에게 드리는 서비스라고 생각해.”

“……감사합니다.”

1돈에 18만 원이던 금을 14만 원으로 사갔으면서, 참 잘도 말한다 싶었다. 그래도 그들 입장에서는 400만 원이나 서비스를 해 줬으니 꽤나 대우를 잘 해줬다고 볼 수 있었다.

내용물이 금에서 돈으로 바뀌며 가방이 더욱 묵직해진 느낌이었다. 실제 무게야 큰 차이가 없다지만, 아포칼립스에서 자주 금을 만져본데 비해 이만한 현금은 만져본 적이 없어 심적인 부담이 더 컸다.

“그럼, 다음에 또 오겠습니다.”

“그래. 다른데 가지 말고, 꼭 일루 와.”

점원이 손을 흔들어 보이며 우성이 나가길 기다렸다. 처음과는 달리 꽤나 사근사근한 미소를 지어보인 그는 우성이 문을 나서자 돌연 표정을 굳혔다.

“애들아, 저 새끼 뒤 좀 캐 봐라.”

**

허름한 가방을 메고 비니모자와 마스크를 뒤집어 쓴 우성은 영락없는 범죄자 모습이었다. 되도록 사람이 많은 번화가 위주로 다니며 우성은 남몰래 뒤쪽으로 눈을 흘겼다.

‘역시, 미행인가?’

처음에는 확신하지 못했다. 하지만 애초 금은방에 들어설 때부터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인지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더 플레이어’에서 금을 처리할 때 주의할 점으로, 미행을 조심하라고 했다. 혹시나 했는데 이것도 역시나. 아까부터 자꾸만 자신과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오는 사람이 몇 명 있었다.

우성은 이대로 미행을 붙이고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이대로 미행을 붙이고 가면 집, 그리고 서현이가 있는 병원까지 드러날 수도 있었다.

‘데리고 오길 잘 했지.’

우성은 씩 웃으며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들어갔다. 번화가처럼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골목에는 일반인 사람들 몇몇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우성이 갑작스레 길을 돌아가자 미행하던 사람들, 아니 플레이어들은 잠시 갈등하다가 결국 뒤를 따라갔다. 그런데 그 때, 우성이 아는 얼굴을 발견하고는 빠르게 걸어갔다.

“오래간만이다.”

반갑게 손을 흔들며 우성이 안현수를 향해 인사했다.

“친구.”

“거 되게 오래간만에 보는 것 같네.”

현실에서 본 안현수는 아포칼립스 안에서와 똑같았다. 어딘가 모를 능글맞은 표정과 여유로운 몸짓, 듬직한 큰 키와 경찰복. 안현수는 우성과 어깨를 걸치며 말했다.

“이따 밤에 술이나 한 잔 하러 가자.”

약속한 자리에서 안현수와 만난 우성은 미행을 신경 쓰며 안현수를 따라갔다. 안현수 역시 대강의 상황은 듣고 난 후라 마찬가지로 따라오는 사람이 없나 눈을 힐끔거리며 감시했다.

그리 비싸지는 않지만 번듯한 직업이 있는 안현수는 젊은 나이에 차를 가지고 있었다. 우성을 옆 좌석에 태운 안현수는 안전벨트를 매고는 시동을 걸었다.

“어떻게 하지? 따라가야 하나?”

뒤따라오던 플레이어는 안현수의 차를 타고 떠난 우성을 눈으로 쫒았다. 함께 미행하던 두 명의 플레이어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한 명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만 돌아간다.”

“왜?”

“민간인, 그것도 경찰과 엮이면 골치 아파져. 가이드가 말 안 해 줬냐? 민간인들과 크게 엮일수록 저쪽 세상에서 패널티가 있다는 거. 경찰과 엮이는 것만큼 민간인과 크게 엮이는 일이 어디 있냐?”

플레이어들이 현실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수칙은 단 하나였다. 같은 플레이어가 아닌, 다른 민간인에게 자신의 능력이나 아포칼립스에서의 흔적을 결코 들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결국 아포칼립스에서나 현실에서나 어떠한 식으로든 패널티가 돌아왔다. 대표적인 예로 포인트의 감소를 들 수 있었는데, 이 포인트가 없을 경우에는 라이프를 잃거나 심하면 목숨이 위험한 큰 위험이 닥칠 수도 있었다.

“젠장. 알았어. 야, 이만들 돌아가자.”

아쉬운 마음에 우성을 미행하던 플레이어들이 입맛을 다셨다. 암상에서 하는 일은 플레이어들이 파는 금을 싼값에 사들여 다시 원래의 가격에 되파는 일이었는데, 그것뿐만이 아닌 ‘정보상’의 역할도 겸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정보상에서 주로 취급하는 정보는 바로 다른 플레이어들의 신상이었다. 어떻게 생긴 플레이어가 어디에 사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등등 여러 가지 정보를 종합해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파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정보가 비싼 값에 거래된다 하더라도 패널티를 떠안으면서까지 정보를 캘 필요는 없었다. 결국 그들은 몸을 돌려 다시 금은방, 아니 암상으로 돌아갔다.

엄연히 말해 안현수는 민간인이 아닌 플레이어였다. 하지만 미행하던 이들은 안현수가 플레이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겉으로 본 안현수는 단순한 경찰 친구일 뿐이었다.

안현수는 운전대를 한 손으로 잡으며 백미러를 통해 뒤쪽을 살폈다. 몇 대 차가 뒤에 있는 게 보였는데, 사람이 아니다 보니 하나하나 전부 수상했다.

“안 따라오지?”

“그러겠지. 저 녀석들도 패널티를 안다면 경찰인 너와 마주치는 건 꺼릴 테니까. 따라오는 것처럼 보이는 차도 없고.”

“이걸로 빚은 갚았다?”

“22만 골드짜리 천룡창을 고작 이걸로 갚으려고? 어림없는 소리 마.”

우성의 톡 쏘는 대답에 안현수는 피식 웃었다. 그 역시 고작 이 정도로 우성에게 진 빚을 갚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술 한 잔 하자는 우성의 요청에 겸해 부탁에 한 팔 거들어준 것뿐이다.

“그나저나 우리 동네 쪽에 저런 무서운 곳이 있었다니, 아우 소름돋아.”

“무서운 곳은 아니지. 이러나저러나 우리에겐 필요한 곳이니까.”

“그런가? 뭐, 나도 슬슬 경찰은 때려 치워야 할 것 같은데. 너처럼 게임으로 돈이나 벌어볼까.”

금화 300개를 현실로 가져왔다는 말에 안현수는 깜작 놀랐었다.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 돈을 환산하면 1억은 가뿐히 넘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 고생을 해서 경찰직에 취직하고, 나름 공을 세워 빠르게 형사까지 승진하기도 했지만 안현수의 연봉은 3천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 고작 200포인트 가지고 우성은 순식간에 1억이 넘는 돈을 가지게 되었다.

“오늘 술은 네가 사라. 그 돈 구하는데 나도 한 몫 한거 알지?”

“여부가 있겠냐. 그 전에, 혜미랑 혜정이에게 연락 해 보고.”

“아, 맞다. 나 그 둘은 번호 모르는데. 넌 알아?”

“알지. 전에 한 번 만나기도 했으니까.”

“아니, 만나기야 나도 매일 만났는…….”

손을 저으며 말하던 안현수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설마, 여기서 만났다고?”

“그래. 우연히.”

저장해 두었던 혜미의 번호를 향해 전화를 걸며 우성이 태연히 대답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배가 아픈 일이었을까?

운전대를 잡고 있던 안현수가 우성의 귀를 향해 버럭 소리쳤다.

“야,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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