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마병, 경매장에 나타나다>
혜미와 함께 서현이가 있는 병실로 향하며 우성은 잠시 회상에 젖어들었다. 처음 서현이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새삼스레 그날이 떠올랐다.
“무슨 생각 해?”
불쑥 앞으로 다가온 혜미의 얼굴에 우성이 깜짝 놀랐다. 회상이 조금 깊었던 모양이었다. 사람이 눈앞에 있었던 것도 모르고.
2년 반 정도 되었던 기억이었나? 처음 일을 시작하고, 병원에 서현이가 입원한 사흘 째 날 정도였으니 아마 그 때였을 것이다. 썩 슬픈 기억으로 남아 있어서 그런지 우성은 쓴웃음을 지었다.
“또, 또 그렇게 웃는다.”
“그렇게는 어떻게냐?”
“세상 만사 다 산 늙은이같애.”
“…….”
평소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싶어 우성은 이젠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이번엔 혜미가 ‘또 그렇게 웃는다.’라고 말했으나, 이번엔 우성도 어떻게인지 알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두 분 사이 좋네요.”
앞에서 걸어가던 담당 간호사가 우성과 혜미를 한 번씩 보더니 호호 웃었다. 젊은 간호사가 왜 또 저리 아줌마 같이 웃을까, 생각하며 우성이 물었다.
“그렇게 보입니까?”
“네. 우성씨 같은 분에겐 혜미씨 같이 활발한 여자분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우성씨는 얼굴도 좋고 성격도 좋은데, 조금 무뚝뚝한 면이 없지 않잖아요? 딸아이한테 웃어주는 반만 웃으면 여자들이 줄을 설 텐데 말이죠.”
염병.
우성은 한숨을 푹 쉬며 혜미를 힐끗 바라봤다. 그녀는 어느새 담당 간호사와 웃고 떠들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처음 볼 때에는 기가 좀 센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점점 그 이미지가 ‘활발한’여자로 바뀌고 있었다.
그녀와는 다르다.
“아, 도착했네요. 그럼 30분 뒤에 다시 올게요.”
“네.”
몸을 돌려 손을 흔드는 담당 간호사를 향해 우성은 희미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녀에게는 언제나 감사하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별 말씀을요.”
조금 뜬금없기는 하지만 담당 간호사는 우성이 말한 ‘고맙다’는 게 무얼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담당 간호사를 비롯해 혹시라도 그녀가 없는 날에까지 간호사들은 30분이었던 시간을 1시간 이상으로 대폭 늘려 주었다. 늘 언제나 30분 뒤에 온다고 해 놓고서는, 보통 1시간이 지나야 찾아왔던 것이다.
처음에는 간호사들이 바쁘구나 싶었지만 그런 일이 어느 순간부터 반복되자 우성도 알 수 있었다. 담당 간호사, 그리고 다른 간호사들이 우성을 위해주었음을. 언제고 한 번 간호사들에게 선물이라도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우성은 병실 문을 열었다.
복도 앞까지만 해도 분주했던 발걸음이 느려졌다. 발소리라도 날까 살금살금 걷는 우성을 보며, 혜미가 물었다.
“지금 뭐 해?”
“쉿.”
“아빠?”
입술을 향해 손가락을 가져가기가 무섭게 병상 칸막이가 걷어지며 서현이의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당연하게도 딸아이의 얼굴을 확인한 우성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안 자고 있었어?”
“응! 많이 잤어.”
힘차게 대답하는 서현이를 향해 우성이 손을 뻗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활짝 웃는 우성의 얼굴을 보며 혜미가 낯설게 말했다.
“와… 그렇게도 웃는구나.”
“이 아줌마는 누구야?”
‘아줌마’라는 단어가 거슬렸는지 혜미가 눈을 부릅뜨고 서현이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줌마 아니고 언니. 자, 언니 해 봐.”
“아빠 친구?”
“네, 그래요. 그러니까…….”
“그럼 아줌마 아니에요?”
“…….”
무슨 논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유부남인 우성은 ‘아저씨’였고, 그와 함께 온 혜미는 ‘아줌마’로 귀결되었다. 물론 결혼은 아직이지만.
“히잉. 그래도 언니라고 불러주라…….”
“히히. 봐서요.”
혜미와 서현이의 대화를 듣고 있던 우성이 순간 웃음을 뚝 그쳤다. 반대로 생각하면 서현이 입장에서 우성은 ‘아버지’이면서 ‘아저씨’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웃다가 울다가를 반복하다 우성은 손에 들고 온 선물용 초콜렛을 탁자 위에 올렸다.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포장되어 있는 비싼 초콜렛을 본 서현이의 눈이 동그랗게 떠 졌다.
“어! 초콜렛이다!”
“아빠보다 더 반가워하는 것 같다?”
“헤헤. 아빠 최고!”
초콜렛을 품에 꼭 끌어 안으며 혀를 내미는 모습을 보며 우성은 다시금 흐뭇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는 혜미는 무슨 천연기념물이라도 보듯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끙끙대며 열심히 초콜렛 선물 포장을 뜯는 서현이를 대신해 포장을 뜯으며, 우성은 혜미와 서현이가 대화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다.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서현이는 우성과 혜미의 관계를 물었고, 혜미는 당황해하며 얼버무렸다.
‘잘 어울리네.’
쿵짝이 잘 맞는 건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으면 웃기기도 하고 재미있었다. 우성은 포장을 뜯고 초콜렛 하나를 서현이의 입 안에 넣어주었다.
“그러니까, 아빠랑은 아무 관계도 아니라 이거죠?”
“음… 아무 관계도 아닌 건 아니고…….”
“그럼 무슨 관계인데요?”
“그, 그냥 엔조이……?”
“……야. 너 지금 무슨 헛소리냐.”
엔조이가 어디에 쓰는 단어인지나 알까? 클럽에서 자주 들었던 단어에 우성은 인상을 팍 찡그렸다. 어딜 서현이 앞에서 그런 단어를.
“헤헤. 그럼 아니야?”
“……너 앞으로 서현이 만날 생각 하지 마라.”
“왜!”
“왜!”
“……니들 언제 그렇게 친해졌냐?”
어이없다는 듯 물으면서도 우성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서현이야 아직 어리니 그렇다 쳐도, 혜미까지 어린애처럼 구는 게 웃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어느새 다시 쿵짝이 맞아 수다를 떠는 한 어린 아이와 어른을 보며, 우성은 속으로 혜미를 데리고 온 게 꽤 괜찮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간간히 서현이의 입에 초콜렛을 까 넣어주며 우성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거나, 묻는 것에 답해주며 조금씩 대화에 녹아들었다.
“그나저나 서현아, 몸은 좀 어때?”
“음… 모르겠어.”
“모르겠다니?”
“이틀 전에는 막 퇴원해도 될 것 같았는데, 오늘은 조금 졸려.”
입술을 삐죽 내밀며 눈을 비비던 서현이가 이내 우성을 보며 헤, 웃었다.
“그래도 아빠 오니까 안 졸려.”
애쓰고 있다는 것쯤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잘 이야기 하고 있던 혜미도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우물거렸고, 우성은 괜한 것을 물었나 싶어 초콜렛을 까 주던 손을 멈췄다.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생각하는지 서현이가 우성과 혜미를 번갈아 보다 양 손으로 두 사람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왜 말이 없어?”
옷깃을 잡은 손에 힘이 꾹 들어간다.
“그러지 마. 아빠랑 언니랑, 둘 다 금방 가야 되잖아. 나 또 여기 혼자 있으면 심심해…….”
*
서현이, 그리고 예상치 못하게 혜미까지 함께 할 수 있었던 한 시간은 우성에게 있어서 매우 특별했다. 평소 병 때문에 몸이 약했던 서현이는 잠을 자거나 힘이 없었는데,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역시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게다가 오늘은 특히 혜미라는 특별한 사람이 있어서 그런지 서현이가 꽤 신이 나 보였다. 아무래도 같은 여자이다 보니 이야기가 잘 통하기도 했고, 활발한 성격의 혜미인 만큼 서현이도 무척 재미있어 했다.
한 시간이 조금 넘어서 담당 간호사가 들어왔다. 이만하면 충분히 편의를 넘어 편애에 가까울 정도였다. 아쉬워하는 서현이를 뒤로하고 우성은 혜미와 함께 병실을 나섰다.
“많이 아쉽나봐?”
“……그렇지.”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한 시간이 아니라 하루, 한 달, 일 년, 평생 같이 있고 싶은데.
“미안해요. 더 시간 드리지 못해서…….”
“아닙니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감사…….”
“그래도 좋은 소식이 하나 있어요.”
좋은 소식? 병원측에서 지금껏 서현이에 관한 좋은 소식은 처음 듣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약이라도 개발된 게 아닐까 하는 기대에 우성의 마음이 부풀었다.
“서현이 병세가 갑자기 좋아져서, 잘만 하면 일반 병실로 옮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물론 앞으로 며칠 더 경과를 지켜보고, 다시 악화되지 않는다는 조건이 붙지만요.”
“……정말입니까?”
“네. 정말요.”
기대했던 약의 개발은 아니었지만 이만하면 우성에게 있어서 분명한 희소식임은 틀림 없었다. 일반 병실로 옮길 수 있다면 그만큼 병원비가 줄어들고, 서현이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도 늘어나기 때문이었다.
사실 병원비야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저 서현이와 좀 더 오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서현이와 만났을 때만큼이나 환하게 웃는 우성을 보며 담당 간호사와 혜미는 속으로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심각한 딸바보라 알려진 우성이고 그런 우성을 잘 아는 간호사들인 만큼, 이번 서현이의 소식은 간호사들도 무척 기뻐하는 일이었다.
연신 함박 웃으며 담당 간호사를 향해 감사하다고 인사한 후 우성은 혜미와 함께 간호사와 헤어졌다. 당장 며칠 후부터는 서현이와 더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정말 오래간만에 기쁜 마음에 심장이 뛰었다.
“그렇게 좋아?”
“……당연하지. 말이라고 하냐.”
우성의 표정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잔뜩 보였다.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 정도, 그것도 하루 한 시간 정도만 보아도 좋았다. 그런데 그 시간이 더 늘어난다고 하니, 우성은 마치 날아갈 것 같았다.
“하긴, 이쁘긴 하더라, 서현이. 귀엽고.”
“그렇지? 하하하.”
“와, 진짜 딸 바보.”
푼수처럼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우성을 보며 혜미 역시 피식 웃고 말았다. 하긴, 오늘 처음 만난 혜미도 서현이가 꽤 마음에 들었다. 병에 걸렸다고 해서 분위기도 우울하고 말이 없을 줄 알았는데, 어린애 치고 예쁘게 생기기도 했고 말도 잘하고 활발했다.
“이런 아빠 밑에서 어떻게 그런 딸이 나왔는지.”
“뭐?”
“아무것도 아니네요~.”
쌍심지를 키는 우성의 모습에 혜미는 꼬리를 내리고 달려갔다.
**
서현이의 병문안 후, 우성은 혜미와 적당히 저녁을 먹고 헤어졌다. 밤 12시 꼭 아포칼립스에서 만날 것을 약속한 우성은 할 게 없어져 PC방에서 시간을 때웠다.
물론 따로 하는 게임 같은 게 있지는 않았다. 오전에처럼 ‘더 플레이어’에 접속해 아포칼립스에 대한 정보를 습득했다. 아포칼립스도 게임인 만큼 당연하다면 당연하고, 의외라면 의외인 여러 시스템이 있었다. 꽤 흥미롭고 재미있기도 해서 우성은 생각보다 긴 시간 동안 사이트를 돌아다녔다.
저녁을 먹고, 피시방에서 나온 후 집에 도착하니 대충 시간이 12시에 가까워 있었다. 꽤 길었다고 느껴지는 하루에 피곤하기도 하고 씻고 누울까도 싶었지만 혜미와 철썩 같이 나눈 시간 약속이 떠올라 그럴 수 없었다.
잠을 잘 생각으로 우성은 이불을 깔고 자리에 누웠다. 아포칼립스에 접속하는 조건은 ‘수면’, 혹은 자신의 ‘의지’였다. 즉, 수면 역시 하나의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
피곤하고 노곤한 몸에 스르륵 잠에 빠져들자, 우성은 곧 익숙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잠시 머리가 어지러워지며,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는 광경.
“……또 여긴가?”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공간. 어딜 돌아봐도 보이는 거라곤 새하얀 벽지 같은 벽과 바닥뿐이었다.
처음 아포칼립스에 접속했을 때, 이곳으로 이동한다는 워프 게이트와 흡사한 느낌에 정신이 아득해졌던 기억이 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51포인트로 상승한 정신력 스텟 덕분인지 어지럽다는 느낌은 거의 없었다.
“오랜만이군, 플레이어 이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