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거 맘에 안 드는 소리네.”
애써 웃으며 안현수는 우성의 보폭에 맞춰 앞으로 나아갔다. 섬뜩한 소리에 겁을 먹었던 혜미와 혜정은 되려 용감하게 앞으로 나가는 두 사람의 모습에 용기를 얻어 빠르게 주문을 완성시켰다.
“스트랭스! 헤이스트!”
전신에 힘이 감도는 걸 느끼며 우성은 자신감을 찾았다. 과연, 사제의 버프 마법은 단순히 전투력의 상승뿐만이 아니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오는 효과도 있는 모양이었다.
파사삭-.
수풀이 흩어지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그와 동시에 쿵, 하는 미약한 울림이 땅을 통해서 전해진다. 아무래도 덩치가 꽤 있는 녀석인 모양이었다.
그래도 꽤 빨리 주문을 완성했는지 혜미의 손에도 검붉은 빛이 뭉치기 시작했다. ‘다크 파이어(Dark fire)’라는 기초 마법 주문인가 싶었는데, 이미 앞서 진거미들에게 보인 위력이 있으니 믿을 만할 것이다.
“왔다.”
파삭-.
높은 위치에 있는 나뭇잎들을 헤치며 녀석의 모습이 드러났다. 가장 먼저 나타난 얼굴은, 익숙한 신체 부위를 물고 있는 날카로운 어금니였다.
오도도독-.
“저, 저게 뭐야?”
겁에 질린 혜정의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우성을 포함한 일행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네임드 ? 라큘’이 출몰하였습니다.]
[처치 시 소량의 포인트를 획득하실 수 있습니다.]
‘네임드?’
보스 몬스터가 아니었던 건가.
그래도 네임드라면 일반 몬스터에 비해서 훨씬 강력할 게 분명했다. 보스 몬스터가 아니라는 게 다행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을 놓을 순 없었다.
라큘의 모습은 흡사 몬스터 도감에서 본 ‘오우거’와 느낌이 비슷했다. 하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사람보다는 말에 가까운 모습이었는데, 덩치가 위로만 3미터는 되어 보였다.
라큘의 입에는 사람의 몸통 하나가 물려 있었는데, 이미 반쯤 먹혀 속에서 뜨끈한 내장을 흘리고 있었다. 날카로운 어금니가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아까부터 들리던 ‘오도독’소리가 나며 사람의 몸통이 부수어졌다.
앞서 만났던 진거미들과는 전혀 다른 위압감에 혜정과 혜미는 물론, 나름 겁 없는 편이라 자부하는 안현수까지도 주춤할 정도였다.
“……도저히 눈 뜨고는 못 보겠네.”
그러더니 안현수는 이를 악물며 우성을 따라 앞으로 더 나아갔다. 우성을 포함한 일행을 마주치고도 여유롭게 식사를 즐기고 있던 라큘의 눈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우어어어.
말 주제에 황소 같은 울음소리는 뭐란 말인가? 하지만 결코 작지 않은 울부짖음에 라큘이 화가 났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녀석의 생각은 ‘먹이’주제에 덤벼드는 게 가소롭다는 것이겠지.
“지랄하네, 몬스터 주제에.”
우우웅-.
안현수의 창끝에 맺힌 용력이 꿈틀거렸다. 마력과 용력을 동시에 머금은 창은 바위도 꿰뚫을 만큼 단단하고 날카로웠다. 두 가지 힘을 동시에 사용하는 권능이야말로 용기사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였다.
쉬익-.
선제공격은 안현수였다. 창의 긴 사거리를 이용한 덕에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안현수는 식사중인 라큘의 입안을 향해 창을 쑤셔 넣었다.
떵-!
그 순간, 라큘은 입에 물고 있던 몸통을 들어 휘둘렀다. 안현수의 창대를 쳐내는 걸 보니, 지성이 있거나 위험에 대한 나름의 본능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어어어
식사를 방해 받았다는 생각인지 라큘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어금니를 더욱 날카롭게 드러내며 몸을 낮춘 라큘은 안현수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디그(Dig)!”
일전에 진거미들을 상대로 펼쳐 보였던 마법. 하지만 이번에는 좀 더 규모가 컸다.
1미터 가량 깊숙이 파인 땅은 아무리 덩치가 큰 라큘이라 하더라도 균형을 잃기에 충분했다. 물론 금세 다시 빠져 나올 테지만, 그 정도 시간은 번 거면 충분했다.
[띠링-! ‘라큘’을 적으로 인식합니다.]
[‘직업 특성 ? 절대적인’이 발동됩니다.]
[마(魔)계열 적임을 확인했습니다. 앞으로의 모든 공격에 추가 15%의 피해를 입힙니다.]
눈앞에 떠오르는 기분 좋은 메시지들. ‘아포피스의 대리자’가 가지는 최고의 특성인 ‘절대적인’이 라큘을 적으로 인식했다.
우성은 30포인트가 넘는 근력 스텟으로 높이 뛰어 올라 라큘을 향해 달려들었다. 지금껏 쌓아 올린 스텟 포인트들과 <마검술>, <절대적인>과 같은 사기적인 패시브 스킬들의 도움을 받아 우성은 단숨에 라큘의 목을 베어버릴 작정이었다.
쉬이익-.
푹-.
안타깝게도 우성의 검은 라큘의 목을 베지 못했다. 구멍에 다리를 빠뜨린 채 녀석이 팔을 들어 머리를 보호한 탓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성이 라큘의 팔을 베어낸 것도 아니었다. 어찌나 단단하던지, 우성의 검은 라큘의 팔을 반도 채 베지 못하고 뼈에 걸려 박혀버렸다.
‘뭐 이리 단단해?’
생물의 팔이 아니라 마치 바위에 걸린 느낌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 쯤, 성난 라큘의 몸짓이 우성을 뿌리쳤다.
-크아아악!
소 울음소리에서부터 시작해 점점 톤이 높아진 라큘은 어느새 어금니뿐만 아니라 모든 이빨을 다 드러내놓고 있었다. 마치 사람의 울부짖음 같은 소리에 우성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고 황급히 아포피스를 빼내었다.
휘익-.
“헉!”
퍽-!
헛바람을 들이키는 순간, 라큘의 다른 한쪽 팔이 우성을 후려쳤다. 근육으로 똘똘 뭉친 성인 남성만한 크기의 팔에 얻어맞은 우성의 허리가 반으로 접혔다.
[띠링-! 플레이어 특성, <불굴의 의지>가 발동됩니다.]
단 한 번에 <불굴의 의지>가 발동될 정도. 레벨이 올라간 <불굴의 의지>덕분인지, 아니면 제법 높아진 맷집 스텟 덕분인지 정신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쿵-.
라큘의 팔에 얻어맞은 우성의 몸이 멀리 날아가 가까운 나무에 부딪혔다. 충격에 축 처진 몸은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오빠!”
“꺄악!”
걱정 어린 혜미의 외침이 들려왔고, 그 뒤를 혜정의 비명이 이었다. 쓰러진 채 계속 있을 수는 없어 우성은 충격으로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그 때, 혜정이 비명을 멈추고 우성을 향해 빠르게 달려왔다. 그 어느 때보다도 다급히 주문을 외우며 혜정이 우성을 향해 양 손을 내밀었다.
“히, 힐(heal)!”
검푸른 빛이 우성의 몸을 덮기 시작한다. 물 먹은 것처럼 무겁고 욱신거리던 몸이 점차 나아지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멀쩡해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정도면 그래도 움직일 만하다 생각이 들어 우성은 혜정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돌아가면 <불굴의 의지>도 고려해 봐야겠군.’
이번엔 <마검술>에 레벨 포인트를 몰아줬지만 다음번엔 <불굴의 의지>를 올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우성은 몸을 움직였다. 라큘은 구멍에 빠졌던 다리를 빼고 안현수의 창을 한 손으로 쥐고 있었다.
과연 네임드 몬스터라고 해야 할까? 우성은 도박을 걸기로 생각했다.
[광폭화 스킬이 발동됩니다.]
[근력이 5포인트 상승합니다.]
[민첩이 5포인트 상승합니다.]
[반사능력이 5포인트 상승합니다.]
[마력이 5포인트 상승합니다.]
[체력이 15포인트 감소합니다.]
우성의 눈이 붉어지며 시야도 함께 붉어졌다. 호흡이 가빠지는 게 느껴졌지만, 그와 동시에 몸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힘이 솟았고, 몸이 훨씬 가벼워졌다. 그리고 몸 안에서 꿈틀거리는 마력이 폭발적으로 용솟음쳤다. 시야까지 빨갛게 물들어 마치 사람이 아닌, 짐승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눈을 마주한 혜정이 흠칫 놀라 뒤로 주춤 물러났다.
“오, 오빠?”
“공격 마법은 됐어. 디그 마법이나, 보조 마법을 사용해. 네 마법으론 저 녀석에게 타격을 주기 힘들어.”
혜미의 옆을 지나가며 우성이 싸움을 지시했다. 방금 전 라큘의 팔을 베지 못했던 건 꽤나 충격이었다. 무기를 들고 있는 것도 아니고 피부와 뼈를 베지 못하다니.
‘단단하다. 하지만…….’
이제는 벨 수 있다!
우성은 확신했다. 더 이상 아까와 같은 경우는 없었다. 아까는 팔을 반 정도밖에 베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확실히 벨 수 있었다.
물론 <광폭화>에는 명백한 단점이 있었다. 체력의 감소와 상승하는 다른 능력치, 그리고 그를 통해 더욱 빠르게 고갈되는 체력이었다.
체력 스텟은 단순히 오래 싸우기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근력과 민첩, 마력 등 여타 능력치들이 상승함에 따라 그 능력을 100퍼센트 발휘하고 오랫동안 힘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스텟이 바로 체력이었다.
그런데 그 체력 스텟이 감소하고 다른 스텟들이 상승했으니 기존에 있던 체력은 반감, 그 이하로 내려갔다고 봐야 할 것이다.
더 이상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이제부터는 시간이 걸린 싸움이었다. 우성은 지체하지 않고 라큘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거 놔, 이 개새끼야!”
우우우웅-.
안현수의 창을 붙잡은 라큘은 창을 빼앗으려는지 힘을 주고 있었다. 팔뚝에 징그럽게 돋아난 힘줄은 라큘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고 있었는데, 거기에 잠깐이나마 버티는 안현수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허나 그것도 잠시.
“어, 어?”
창을 놓지 않은 안현수의 몸이 라큘에 의해 위로 떠올랐다. 창을 붙잡은 상태 그대로 창과 함께 들린 안현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팔!”
나직한 욕지껄이와 함께 위로 들렸던 라큘의 팔이 아래로 떨어지려던 순간이었다.
사악-.
살갖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아래로 라큘의 팔이 힘없이 아래로 내려갔다. 반 이상 베어져 덜렁거리는 팔이 고통스러운지 라큘이 비명을 질렀다.
-크아오오!
쿵쿵쿵-.
비명과 함께 다리를 휘두르며 발광하는 라큘의 목표는 자신의 양 팔을 벤 우성이었다. 한쪽 팔은 반쯤 베어지고, 다른 한쪽 팔은 덜렁거리는 수준이라 이젠 더 이상 휘두를 만한 팔이 남아있지 않았다.
우성은 재빨리 거리를 벌려 발광하는 라큘로부터 멀찍이 떨어졌다. 안현수 역시 위험하다 생각했는지 창을 고쳐 잡으며 우성을 따라 라큘로부터 거리를 벌렸다.
양 팔이 다치긴 했지만 라큘은 아직까지도 거대한 덩치와 힘, 그리고 어금니가 남아있었다. 자신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라큘은 성난 이빨을 드러내며 우성을 향해 거대한 몸을 날렸다.
“후욱. 후욱.”
벌서부터 차오르는 숨을 거칠게 내쉬며 우성이 라큘을 향해 함께 달려들었다. 그와 함께 우성의 도움으로 안전하게 라큘의 손아귀로부터 빠져 나온 안현수가 용력과 마력을 함께 머금은 창을 휘둘렀다.
두 사람과 라큘의 몸이 부딪히려던 그 순간.
“우드 월(Wood Wall)!”
드드드드-.
나무로 만들어진 조잡한 벽이 우성과 라큘의 사이로 나타났다. 아니, 정확히는 라큘의 바로 앞이었다.
화가 나 우성과 안현수를 향해 달려들던 라큘의 몸이 나무로 만들어진 벽과 부딪혔다. 돌로 만든 벽보다야 무를 테지만 나무로 만들었음에도 혜미의 마력을 머금은 벽은 꽤 단단했다.
콰직-.
나무로 만들어진 벽이 라큘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하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힘껏 달려들던 라큘의 몸에 제동이 걸린 것이다.
-우어어어어!
“거 참 시끄럽게도 울어대네.”
쉬익-.
푹-.
안현수의 창끝이 라큘의 가슴을 꿰뚫었다. 달려들던 힘 그대로 충돌했다면 안현수 역시도 위험했을 테지만, 나무로 만든 벽에 부딪힌 라큘은 잠시 움직임을 멈춘 후였다.
그리고 그 순간, 우성의 검이 라큘의 지척으로 다가갔다.
“……이제 베어진다.”
우우웅-.
아포피스가 우성의 검붉은 마력을 가득 머금었다. 마지막 순간, 우성이 최대한으로 힘을 끌어 올려 절삭력을 높인 것이다.
사악-.
-끄어어…….
비명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 라큘의 얼굴이 반으로 베어지며 숨통이 끊어졌다. 마력을 가득 머금은 우성의 아포피스는 녀석의 숨통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자 다시 장갑의 형태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순간, 우성을 포함한 일행의 눈앞에 첫 ‘네임드’ 몬스터를 잡은 보상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