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하멜로 들어오며 가장 큰 변화가 생겨난 사람은 바로 혜정이었다. 도시 중앙에 위치한 암흑신전에서 자격을 얻은 혜정은 암흑사제(暗黑司祭)로 전직할 수 있었다.
전직을 마친 혜미와 혜정의 플레이어 정보를 확인해본 결과, 두 사람은 각각 3포인트씩의 마력 능력치가 상승해 있었다. 그 결과 혜미와 혜정, 두 사람 모두 27포인트씩의 마력 능력치를 보유하게 되었다.
혜미의 경우에는 시작의 마을에서부터 일찍 직업을 얻어 마법사라는 직업에 조금 익숙해진 상태였지만, 혜정은 완전히 백지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마력 능력치를 활용한 마나력의 응용 법에 대한 기초가 잡혀 있다는 건 만족할 만한 일이었다.
안현수의 상처는 놀랍도록 빠르게 치료되었다. 큰 상처는 아니더라도 족히 몇 주는 있어야 아물 상처들이 대부분이었는데, 포션을 바른 결과 하루 만에 모든 상처가 거의 아물어 있었다. 새삼 게임 속에서 ‘포션’이 가지는 효능에 감탄하며 우성은 준비가 되었다 생각해 일행을 모았다.
넉넉한 돈으로 잡은 여관의 방은 시작의 마을에서 사용했던 숙소와는 달리 꽤 넓었다. 15평정도 되는 여관 숙소는 4명이서 쓰기에도 크게 좁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시작의 마을에서 말했다 시피, 우린 하멜에 있는 ‘그’ 퀘스트에 참여한다.”
기존 플레이어들에게 언뜻 들었을 뿐이지만 거의 확실한 정보이기도 했다. 그만큼 하멜에 있는 어떤 퀘스트는 유명했고, 어려운 난이도만큼 확실한 보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보상을 듣는 순간, 우성은 다음 목적지를 이곳 하멜로 확정했다. 그리고 그 생각에는 다른 일행들 역시 동의했다. 게임을 시작한 이상, 보상이 확실한 퀘스트에 중점을 두는 게 당연했으니까.
“그런데 문제가 있어.”
“혜미랑 혜정이?”
우성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나도.”
“네가 문제면, 나도 문제겠네.”
우성이 말한 문제란 플레이어가 가지는 힘을 뜻했다. 직접 무기를 들고 싸우는 만큼 실력도 실력이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스텟과 스킬이었다. 하지만 현재 혜미와 혜정의 상태로 보아 제대로 싸울 수 있을지 의문이긴 했다.
‘정예지 정도만 되어도 꽤 쓸 만할 텐데.’
마법사로서 우성이 처음 본 플레이어가 바로 정예지였다. 마법 자체를 빠르게 사용하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사용하는 마법들은 제법 위력이 있었다. 그 중에는 크라켄의 다리에게까지 큰 타격을 줄 정도의 마법도 있을 정도였다.
“하긴, 지금 이 상태로는 힘들긴 하지.”
고개를 끄덕이던 안현수가 이내 우성을 빤히 바라봤다.
“네가 그 때만큼만 싸울 수 있다면 모를까.”
안현수가 말하는 ‘그 때’란 투기장에서 나온 직후, 우성이 기존 플레이어들과 싸우던 때를 뜻했다. 만약 우성이 항상 그 때처럼 싸울 수 있다면, 이번 퀘스트를 무사히 마칠 확률도 비약적으로 상승할 것이다.
“안 돼. 부담이 너무 커.”
“음, 하긴 그렇긴 하지.”
우성이 말한 ‘부담’은 포인트와 라이프의 소모를 뜻했지만, 안현수는 자아를 잃은 우성을 떠올렸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자신을 공격했던 우성이었다. 그나마 자신이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혜미나 혜정을 공격한다면 그녀들은 제대로 저항도 못해보고 죽을 것이다.
“혜미, 지금 당장 사용할 수 있는 공격 계열 마법이 몇 개나 돼?”
“어… 한 3개 정도? 그 중 연습한 건 2개 정도고.”
“게임 시간으로 보름 뒤까지 연습해 둬. 그 때까지는 현실로 돌아갈 생각 말고.”
“……응.”
“그리고 혜정. 이번에 암흑사제로 전직하며 습득한 스킬이 몇 개지?”
“5개요. 치유계열 마법이 1개고, 버프 계열 마법이 2개, 공격 마법이 1개, 저주 마법이 1개. 그런데 아직 숙련도가 낮아서인지 별로 큰 효과는 없는 것 같아요.”
끝으로 갈수록 말이 흐려지는 걸 보면 정말로 큰 효과는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마법의 종류가 다양하고 사제라는 직업 자체가 공격이나 방어보다는 보조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도움이 되기는 마법사인 혜미보다는 수월할 것이다.
“공격과 저주 마법은 됐어. 공격은 나와 현수, 그리고 혜미가 할 테니까. 혜정이 넌 치유 마법과 버프를 중점으로 숙련도를 쌓도록 해. 마찬가지로 기한은 보름 뒤까지야.”
“보름 뒤까지요?”
“응. 그리고 공통적으로 두 사람 모두 보름 뒤, 퀘스트 시작 날까지 마력 스텟을 30포인트까지 올리도록 해봐. 가능하면 더 높일수록 좋고.”
30포인트의 스텟이면 신규 플레이어 치고는 어딜 가서도 꿀리는 스텟이 아니었다. 신규 플레이어의 기본 스텟이 10이니, 무려 3배에 해당하는 능력치이기 때문이었다. 신규 플레이어들 중 최상위에 속하는 우성만 하더라도 30포인트가 넘어가는 스텟은 일부밖에 되지 않았다.
무리한 요구라고 볼 수도 있지만 우성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기본 능력치가 23인 혜미와 24인 혜정이었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직업을 얻으며 27포인트의 마력 능력치를 보유하게 되었다.
퀘스트가 시작되는 날은 앞으로 보름 뒤였다. 그 때까지 30포인트의 마력 스텟을 달성하고, 습득한 마법 주문에 익숙해지면 두 사람 모두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네! 알았어요!”
“노력해 볼게.”
힘차게 대답하는 두사람의 대답에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 특히 혜정은 기존 마력 능력치 24포인트에 오더가 추천할 정도이니 그녀는 꽤 사제라는 직업에 재능이 있을 것이다. 내심 보름 뒤가 기다려지며 우성은 현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용기사 직업엔 창이 필요하지?”
“그렇지. 패시브 스킬도 창에 영향을 받고, 그 때문인지 내 손에도 이제 창이 더 맞는 느낌이니까. 그런데 지금 당장은 창보다는 저걸 사용하는 게 더 나을걸?”
방안 한쪽에 놓아둔 옥토퍼스를 가리키며 말하는 현수에게 우성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당장이야 무기의 힘을 빌릴 수 있다고는 해도, 결국 자신에게 맞지 않는 무기는 뒤로 갈수록 독이 될 뿐이다.
“옥토퍼스는 경매에 내놓을 거다.”
“……판다고?”
“그래. 그 새끼들이 노렸던 만큼 싼 값은 아니겠지. 들어보니 마검이나 마병 같이 마(魔)자가 들어간 아이템들은 부르는 게 값이라더군. 우리에게 맞지 않는 무기인 만큼, 사용하기보다는 팔아서 다른 장비를 맞추는 게 나아.”
틀린 말이 아니었다. 다른 게임에서도 역시 비싼 아이템을 팔아 조금 더 저렴한 아이템 여러 개를 구입해 장비를 맞추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직업이나 손에 맞지 않는 무기를 사용할 바에야 그런 선택을 내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판매 시기는 언제로 할 건데?”
“퀘스트가 끝나고, 현실에 다녀온 후에. 이 여관에 다 같이 다시 모이면 그 때 처분할 거다. 현실에 간 김에 ‘더 플레이어(The Player)’라는 사이트에서 아이템 처분 시스템에 대해서나 알아 봐야지.”
앞으로의 계획이 막힘없이 흘러나오는 우성을 보며 안현수가 휘파람을 불었다. 앞으로 뭘 해야 할지 고민하던 차에 하나 둘씩 계획이 착착 정리되어 있는 우성을 보니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게임 좀 했나봐? 어떻게 할지 팍팍 돌아가네.”
“게임은 무슨.”
그런 것보다…….
“게임이든 현실이든, 인생은 실전이야.”
**
과연 하멜은 도시는 도시였다.
조잡한 여관이나 몇 개의 직업 시스템이 전부인 시작의 마을과는 달리, 하멜에는 다양한 종류의 노멀(Normal) 직업들과 아이템 상점, 그리고 개별 수련장 등이 구비되어 있었다.
1인 1실. 50평 남짓한 공간의 아무것도 없는 방을 빌려주는 대신, 하루 4골드를 지불해야 하는 수련장은 여관비에 비교하면 엄청난 과소비라고 할 수 있었다. 나흘 치 여관비가 2골드인 걸 생각하면, 아무리 넓다고 해도 여관보다 무려 8배가 비쌌다.
하지만 일행은 과감하게 2개의 수련실을 대여하기로 결정했다. 사냥을 통해 성장할 수 없는 아포칼립스의 시스템 상, 강해질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수단은 바로 수련이었다.
우성과 안현수가 한 방을, 그리고 혜미와 혜정이 한 방을 사용했다. 각각 직업이 근접 계열과 마법사 계열인 만큼, 서로가 서로를 도와줄 수 있다는 점에서 구분한 것이다.
실제로 우성과 안현수는 50평 남짓한 공간에서 자주 대련을 벌였다. 안현수는 아이템 상점에서 구입한 30골드짜리 창을 사용했는데, 그렇게 좋지는 않지만 투기장에서 사용한 보급형 창에 비하면 감지덕지였다.
“하. 미친. 뭐 이리 세졌어?”
바닥에 대자로 엎어지며 안현수가 두 손을 들었다. 진이 다 빠진 안현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창을 놓고 말았다.
“세지긴.”
“배치고사 볼 때랑 비교하면 완전 다른 사람인데?”
“그거야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대련을 하면 할수록 안현수의 실력에 놀랄 따름이었다. 옥토퍼스를 들고 싸우는 모습을 잠깐 볼 때는 몰랐는데, 창을 들고 싸우는 모습을 가까이서 보면 그렇게 화려하고 위력적일 수가 없었다.
우성과 안현수의 실력을 놓고 비교해보면 우성이 한 두수 정도 위라고 할 수 있었다. 무기의 차이를 생각해 보더라도 우성의 힘과 움직임은 안현수와 비교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현수는 우성을 상대로 꽤 접전을 벌였다. 타고난 운동신경인지 반사능력이 꽤 좋았고, 체력도 우성 못지않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버티기’일 뿐, 결과가 나타나는데 걸리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확실히… <마검술>을 올린 게 정답이었어.’
[패시브 - 마검술 : C. rank]
* 수비를 도외시한 공격적인 검술. 일반 검술보다 훨씬 위력적이지만 그 대신 검사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마검의 등급에 따라 위력이 배가된다.
+ Mode : 광폭화 활성화 가능
+ 마검 사용 시 근력 5포인트 상승+ 마검 사용 시 민첩 5포인트 상승+ 마검 사용 시 절단력(공격력) 35% 상승
[Mode : 광폭화]
* 숙련된 마검술은 육체와 정신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공격력을 극대화시키는 대신, 체력이 빠르게 소모되며 마검에게 자아를 빼앗길 가능성이 소폭 상승한다.
+ 활성화 시 근력 5포인트 상승+ 활성화 시 민첩 5포인트 상승+ 활성화 시 반사능력 5포인트 상승+ 활성화 시 마력 5포인트 상승+ 활성화 시 체력 -15포인트 감소
E. rank에서 C. rank로 바뀐 마검술의 효과는 생각 이상으로 컸다. 우선 1포인트 상승이었던 근력과 민첩의 상승폭이 5로 확 뛰어 총 8포인트의 스텟이 올라갔다. 게다가 절단력(공격력)의 상승률 또한 기존 25포인트에서 추가로 15퍼센트가 올라갔다. 이는 근력과 민첩 스텟의 영향에 더해 힘을 발휘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수확은 였다. 마검에 자아를 빼앗길 확률이 소폭 상승한다는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상승되는 능력치가 무려 도합 20포인트였다. 대신 체력이 15포인트가 내려가지만, 기본 체력 능력치가 탄탄하고 <불굴의 의지>가 있는 우성이니만큼 충분히 효과적인 스킬이라고 할 수 있었다.
“슬슬 일어나지.”
“진짜 체력 한번 무시무시하다.”
잠시 쉬고 있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마검술>을 연마하던 우성이 다시 대련을 요청하자, 안현수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성의 체력 스텟을 알 수 없는 안현수로서는, 그저 어이가 없었다.
사실 우성과 안현수의 체력 스텟은 그렇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우성이 안현수에 비해 오래 서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체력이 떨어져도 버틸 수 있는 높은 정신력 스텟과 <불굴의 의지>라는 플레이어 특성 덕분이었다.
무엇보다도 우성이 쉬지 않는 이유는 바로 <불굴의 의지>때문이었다. <마검술>이야 대련을 통해서나 혼자 검을 휘두르는 과정을 통해 숙련도를 높일 수 있다지만 <불굴의 의지>는 한계까지 밀어붙인 체력과 정신적인 타격에 의해서만 숙련도를 높일 수 있었다.
<불굴의 의지>는 스킬 레벨이 올라가면서 체력, 맷집, 정신력을 올려주었다. 현재 우성에게 가장 필요한 스텟은 마검에게 자아를 빼앗기지 않기 위한 정신력과 <광폭화>스킬을 오래 유지하기 위한 탄탄한 체력 스텟이었다. <광폭화>스킬을 얻음으로서 체력 스텟 역시 강해지기 위한 필수 스텟으로 변한 것이다.
곧 안현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을 우성에게로 겨눴다. 흠뻑 젖은 땀으로 목욕이라도 한 것 같았지만, 그래도 꽤 재미있는 듯 안현수의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깡-!
두 사람의 창칼이 부딪히고.
그렇게 보름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