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순식간에 둘이 죽었다.
가장 먼저 달려들었던 플레이어와 싸움 중 틈을 허용해 죽어버린 샤오만의 부재는 크나큰 공백이었다. 정예지를 포함해 넷 밖에 남아버리지 않은 기존 플레이어들은 <대리인>를 사용한 우성에게 형편없이 밀렸다.
스걱-.
피이이잇-.
한 명의 플레이어가 교전 끝에 우성의 검에 목이 베어졌다. 횡으로 그어진 검은 이내 부드럽고 날카롭게 이어지며 남은 두 명의 플레이어를 향해 뱀처럼 쏘아졌다.
“홀드(Hold)!”
그 때, 캐스팅이 끝난 정예지의 마법이 우성의 발을 묶었다. 순간적으로 우성의 검은 벽에 가로막힌 듯 움직이지 않았고, 우성의 몸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회라고 생각한 두 명의 플레이어는 각각 좌우로 나눠져 우성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움직임은 미리 입을 맞춘 것처럼 딱딱 맞아 떨어졌다.
“연기가 꽤 일품이었나 보군.”
스걱-.
우성의 검이 가로로 눕혀지며 몸이 빙글 돌아갔다. 검을 검집에 넣지도 않았음에도 순식간에 발도(拔刀)와 같은 위력을 낸 아포피스는 순식간에 두 명의 플레이어의 몸을 양단했다.
하늘로 잠시 피분수가 솟아올랐다 이내 땅으로 떨어졌다. 어두운 밤길에도 불구하고 우성의 검은 붉은 핏빛을 머금어 비추었다. 순식간에 동료들을 잃은 정예지는 뒤로 주춤 물러나며 마법을 완성한 손을 앞으로 가져갔다.
“오, 오지마!”
“두려움. 이 또한 나쁘지 않은 감정이지. 그리고 질투와는 달리, 드높은 존재에게 있어 두려움을 느끼는 건 지극히 당연한 감정이다.”
천천히 걸어옴에도 어찌 이리 빠르게 느껴질까? 우성과 한 걸음씩 거리가 좁혀질 때마다, 정예지는 마찬가지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두려움에 뒷걸음질 치는 정예지의 모습을 즐기기라도 하듯, 우성은 느릿하던 발걸음을 점점 더 빠르게 재촉했다.
“으아아!”
쉬이이익-!
시전어가 아닌 비명과 함께 정예지의 손에서 커다란 얼음의 송곳이 쏘아졌다. 순식간에 우성의 몸을 관통할 것만 같던 송곳은, 우성이 검을 크게 휘두르는 순간 반으로 쪼개어졌다.
쩍-.
“그쪽 마법사는 아무래도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모양이군.”
“히끅.”
딸꾹질과 함께 정예지는 몸을 반대로 돌렸다. 마검이고 마병이고, 일단 살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꽉 채웠다.
그러나 그녀는 우성에게서 도망가지 못했다. 우성이 제지한 게 아니었다. 몸을 돌려 달려가던 중, 다른 누군가와 부딪혀 뒤로 발라당 넘어지고 만 것이다.
“어딜 가는 거지?”
“카, 칼프?”
턱-.
“커컥! 카, 카…….”
곰같이 육중한 체구를 가진 남성 플레이어, 칼프는 다짜고짜 정예지의 목덜미를 움켜잡더니 우성을 바라봤다.
“멍청한 연놈들이 신규 플레이어 둘도 상대하지 못하는군. 재활용은 가능한 놈들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것도 아니었나?”
“카…카…….”
“플레이어 정예지, 네 라이프가 두 개 남았던가?”
칼프의 묵직한 음성에 정예지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목을 잡힌 상태에서도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려고 하는 게, 처절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지…마…….”
“다음번엔 더 잘 해주길 바란다.”
뚜두둑-.
“다음은 없을 테니까.”
우악스러운 손아귀에 잡혀 있던 정예지의 목이 기괴한 방향으로 비틀려 부러졌다. 입안에서 새하얀 거품이 쏟아지고, 눈알이 반대로 뒤집히며 정예지의 숨통이 끊어졌다.
손안의 정예지를 쓰레기마냥 한쪽으로 휙 던져버린 칼프는 우성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우성의 손에 들린 마검을 보며 칼프는 휘파람을 불었다.
“그게 마검인가?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군.”
“…….”
우성은 대꾸하지 않았다. 무시하는 건가 싶었지만 칼프는 성급히 행동하지 않았다. 이미 앞에서 우성에게 자신의 부하들 다섯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신규 플레이어라지만 마검의 힘은 무시할 수 없었다. 아니, 사실 이 정도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래 봤자 5회 차 플레이어 수준 정도면 후하게 쳐 준 거라 생각했는데, 4회 차 플레이어인 부하들 다섯을 쓰러뜨렸다.
그것도 상황을 보아하니 압도적이었다. 우성의 몸에는 그 어떤 상처도 찾아볼 수 없었다. 피가 묻어있기는 했지만 부하 플레이어들의 피였지 우성이 흘린 피는 아니었다.
그 때, 우성은 지끈거리는 머리가 쉬이 진정되지 않아 왼 손을 들어 머리를 감쌌다. 그럼에도 흐릿한 시야와 지끈거리는 머리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아… 머리야…….”
[띠링-! 정신 이상으로 인해 플레이어 특성, 불굴의 의지가 발동됩니다.]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 그와 동시에 우성은 조금씩이나마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불굴의 의지>특성이 마검으로부터 조금이나마 저항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다.
[띠링-! 아포피스의 자아가 물러납니다.]
[1라이프(Life)가 소모됩니다.]
[대리인의 지속시간이 초기화됩니다. 앞으로 1시간 동안 아포피스의 힘이 유지됩니다.]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들을 읽은 우성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리고 끝없는 상실감이 온 몸을 잠식하는 것을 느꼈다.
불굴의 의지가 발동되며 아포피스로부터 자아를 빼앗기는 것에 저항했다고 생각했는데, 크나큰 오산이었다. 불굴의 의지나 30이 넘어선 높은 정신력 스텟을 믿었건만,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그나마 불굴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라이프를 소모하면서 자아를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높은 정신력 스텟과 불굴의 의지가 없었다면?
완전히 자아를 먹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이프를 지불할 겨를도 없이 말이다.
불행 중 다행. 하지만 닥쳐온 불행이 너무 컷던 탓일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도 잃어버린 대가는 하나의 목숨이었다. <대리인>을 사용한 게 너무 섣부른 판단이었나 싶어 우성은 입술을 깨물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상황에선 이 방법밖에 없었다.
‘덕분에 대부분 다 처리할 수 있었으니 그마나 다행인가?’
<대리인>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하나하나가 우성과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는, 아니 그 이상의 실력을 가진 플레이어들이었다. 그런 플레이어들이 다섯에 마법사인 정예지까지. 우성은 <대리인>스킬을 사용함으로서 그들 모두를 홀로 감당하고, 쓰러뜨릴 수 있었다.
라이프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허탈감도 들었지만 우성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우선, 눈앞의 남자부터 해결하는 게 먼저였다.
‘칼프라고 했나… 이 자가 우두머린가?’
정예지를 대하는 태도나 풍기는 분위기로 보면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왜 가장 마지막에 나타났는지는 몰라도, 우성은 칼프만 쓰러뜨리면 이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나저나 지속시간의 초기화라…….’
우성은 몸에서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활력이 감도는 걸 느꼈다. 민첩이나 근력 스텟이 조금씩 올랐을 때만 해도 변하는 게 느껴졌는데, 지금은 너무 많이 바뀌다 보니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칼프는 어느새 허리춤에 걸어 두었던 두 개의 단단한 장갑을 착용하고 있었다. 직업이 ‘격투가’인 듯, 그는 별다른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긴, 한 손으로 목을 분지를 정도의 근력을 가지고 있으면 그 힘으로 내지르는 주먹이 가지는 파괴력은 가히 어마어마할 것이다.
칼프는 원래의 우성이었다면 감히 도전해 볼 수조차 없는 상대. 하지만 <대리인>의 효과가 남아있는 지금이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지금은… 내가 더 강하다.’
온 몸에서 힘이 넘쳤다. 마치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어느 누구와 싸워도 지지 않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곰아저씨.”
“……곰이라. 나 말이냐?”
“그래. 아저씨 목적도 이 검이겠지?”
우성의 물음에 칼프는 양 주먹을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회색빛을 띠고 있는 건틀릿은 은은한 달빛을 받았다. 제법 괜찮은 무기이구나 싶었는데, 그래도 아포피스의 검붉은 검신에 비교하니 초라해 보였다.
“그것뿐만 아니라, 뒤쪽에 있는 녀석의 마병도.”
“미안한데 처음엔 마병까지는 던져 줄 생각도 있었거든. 그런데 지금은… 아무래도 못 그러겠다.”
뜬구름 잡는 소리에 칼프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그 순간, 우성의 몸이 폭발적으로 튀어 나가며 순식간에 칼프와 거리를 좁혀왔다.
“지금은 내가 더 세거든.”
쩡-!
“큭.”
휘둘러 오는 우성의 검을 향해 건틀릿을 착용한 주먹을 내질렀다. 그 순간, 손이 잘려 나가는 착각이 들어 칼프는 서둘러 주먹을 뒤로 빼고 말았다.
‘겁먹었다? 내가?’
욱신-.
느껴지는 통증에 칼프는 방금 전 내지른 오른쪽 주먹을 확인했다. 자세히 보니 건틀릿의 중앙 부분이 베어지고, 그 안쪽에서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냥 욱신거리는 것만이 아니라 쓰라리기까지 한 걸 보면 아무래도 베인 모양이었다.
믿을 수 없었다. 그저 검을 한 번 휘두른 것뿐인데, 자신의 건틀릿이 베어지다니. 스텟 포인트가 어지간히 차이가 나지 않는 이상, 이런 일이 벌어질 리 없었다.
정작 앞으로 튀어나간 우성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가볍게 발을 튕겼을 뿐인데, 순식간에 앞으로 날아가 어느새 칼프를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 모든 과정이 너무나도 빠르고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마치 자신의 몸이 아닌 것처럼. 순간적으로 아직까지도 아포피스가 자신의 몸을 움직이고 있나 싶었지만, 이내 멀찡히 손발이 움직이는 걸 확인하고는 안도감이 들었다.
두근, 두근-.
심장 박동이 점차 빨라졌다. 귀를 통해 심장 박동 소리가 고요하게 들리고, 시간이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 칼프가 당황한 표정이나 거칠게 숨을 내쉬며 분한 표정으로 바뀌는 것도, 마치 비디오를 느리게 재생한 것처럼 보인다.
‘이런 느낌이구나.’
우성은 이 느낌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우성이 느끼고 있는 현상은 단순히 근력이 높다고, 그리고 민첩이 높다고 겪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단순히 힘이 세고 빨라진다고 해서 시간의 흐름을 역행하는 감각을 얻을 수는 없었다.
<대리인>스킬로 인한 정신력의 대폭 상승. 그로 인한 우성의 감각은 이미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어 있었다. 우성은 지금, 1회 차 플레이어들이나 경험했을 법한 감각의 지평선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었다.
“건방진 새끼가!”
입술을 꾹 깨문 칼프가 반대로 달려들었다. 베어진 건틀릿을 볼수록 머릿속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험의 경종이 울렸지만, 당장 눈앞에 있는 마검과 마병을 보니 유혹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저것만… 저것만 빼앗을 수 있으면!’
투기장에서 버는 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천문학적인 돈을 손에 쥘 수 있다.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칼프의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우성의 그의 부정적인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욕심이 과하면…….”
푸욱-.
“끄아아아아악!”
“눈이 머는 법이지.”
아포피스가 칼프의 건틀렛을 뚫고, 팔을 관통했다. 오른팔 깊숙한 곳까지 들어간 차가운 금속의 느낌에 칼프는 찢어질 듯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 역시도 35포인트라는 낮지 않은 정신력을 가지고 있었다. 오른팔을 버리겠다는 집념. 그리고 왼팔이 남아있다는 생각에 칼프는 남아 있는 왼 손의 건틀렛을 휘둘렀다.
퍽-.
왼손의 건틀릿이 정확히 우성의 얼굴에 박히자, 칼프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웬만큼 맷집 스텟이 높지 않고서야, 자신의 주먹을 맞고 멀쩡할 리 없었다. 정신을 잃지는 않더라도 한동안 어지러울…….
“생각보다 많이 약하네.”
뿌드득-.
“끄아아…….”
서걱-.
비명을 지를 수도 없었다. 고통에 비명을 질러야 할 입이 그대로 머리와 함께 반으로 잘려 나간 탓이었다. 오른팔에 박힌 아포피스를 더욱 깊숙이 꽂아 넣은 우성은 그대로 검을 크게 휘둘러 칼프의 얼굴을 베어버렸다.
지하 투기장의 우두머리 플레이어라고 보기엔 너무 허무한 죽음이었다. 눈앞에 다량의 포인트를 획득했다는 메시지가 떠올랐지만, 두근거리는 심장과 뜻 모를 희열에 우성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죽일… 거…….”
그 순간, 몸을 돌린 우성의 눈에 넋 나간 표정의 안현수가 들어왔다.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