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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플레이어-50화 (50/258)

50화

깜깜한 시야 속으로 흐릿하게 인영이 출렁거렸다. 그것들이 움직이고 있는지, 멈춰 있는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어지럽다.’

정신이 아늑하다. 아니, 혼란스러운 건가? 이런 느낌은 생전 처음이라, 무어라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그저 어지럽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메아리처럼 반복되고 있었다.

손에 쥔 마검, 아포피스가 울부짖었다. 이전처럼 낮게 우는 정도가 아니었다. 잔뜩 신이 난 아이처럼, 또는 성난 짐승처럼 마검이 울리는 강도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왜 이러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우성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흐릿하던 모습들이 조금씩 퍼즐처럼 맞춰지며 서서히 사람의 형체를 갖춰갔다.

무기를 들고 있는 사람들. 검이나 창, 지팡이 따위를 들고 있는 모습들을 보니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아, 맞다. 나 싸우고 있었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우성의 기억이 다시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눈앞에 흐릿하게 일그러지는 남자들과 한 명의 여성. 그들은 적이고, 자신은 그들로부터 궁지에 몰려있었다.

함께 있던 사람은… 누구였더라? 기억이 나질 않았다. 다시 한 번 눈을 감았다 뜨며, 옆을 돌아봤다. 얼굴은 익숙한데…….

그 순간, 우성의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여러 기억들이 스쳐갔다. 처음 시작은 이곳과는 다른 세상. 현실에서 고생하며 돌짐을 옮기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딸 서현이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 순간,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곧 신기루처럼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아아…….”

아쉬움과 그리움, 그리고 슬픔 등이 뒤섞인 탄성이 입을 통해 흘러 나왔다. ‘누구였지?’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불쑥 나타났지만,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걸 잊은 기분이었다.

다음으로 우성의 눈앞에 나타난 환상은 아포칼립스에서 만난 사람들이었다. 혜미와 혜정을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첫 살인, 김정원과 안현수, 그리고 마지막 날 혜미의 죽음. 자신을 위해 대신 죽어주는 혜미를 보며, 우성은 참 고마운 사람이구나 싶었다.

‘하지만… 누구지?’

기억 날 것도 같은데.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까 보았던 여자 아이도 그렇고, 잡힐 듯 말듯 눈앞의 신기루처럼 잡을 만하면 다시 흩어졌다. 그 다음으로 우성의 눈앞으로 나타난 환상은 투기장의 잔인한 광경과 토르안과의 경기였다.

‘저건…….’

우성의 눈에 토르안이 들고 있는 옥토퍼스가 들어왔고, 그 무기와 옆에 서 있는 남자, 현수의 무기가 겹쳐졌다. 그리고 이어진 환상, 아니 과거에 우성은 손에 들고 있는 마검 아포피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

아포피스를 발견함과 동시에 우성은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앞서 스쳐갔던 얼굴들의 정체가 둑 터진 강처럼 우수수 떠올랐다.

안현수는 마병 옥토퍼스를 손에 쥐어 이 싸움을 위해 자신의 포인트를 아끼지 않고 크라켄을 불러내었다. 그 덕에 여섯 명의 기존 플레이어들로부터 나름 잘 버텨낼 수 있었지만, 결과는 수세에 몰리고 말았다.

어차피 이대로 가면 둘 다 죽게 된다. 그렇게 판단한 우성은 ‘어차피 죽을 것, 발버둥이라도 쳐 보자’라는 생각에 대리인 스킬을 발동했다.

‘그래. 맞아. 그렇게 된 거였지.’

-이제야 정신을 좀 차렸군.

*

“야, 너…….”

안현수는 물론이고 자리에 모여 있는 그 어느 누구도 우성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적들은 물론이고, 안현수까지도 우성에게서 몇 걸음씩 물러날 정도였다. 동공을 잃은 새까만 동공과 몸에서 피어오르는 검은색 연기는 ‘다가가선 안 된다’는 느낌을 물씬 풍겨내고 있었다.

초점을 잃은 우성의 검은 여전히 기존 플레이어들에게로 향해있었다. 그 중, 검 끝은 정확히 정예지에게로 향해 있었는데 우성과 눈이 마주친 정예지는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초점이 없는 검은 눈은 그렇다 치자. 마병으로 크라켄의 다리도 소환하는 마당에 저런 것 하나 신기할까. 검은 수증기도 이곳은 아포칼립스이니 전혀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었다.

하지만 가장 그럼에도 정예지를 포함한 모든 플레이어들의 머릿속에는 공통된 생각이 떠올랐다.

‘이길 수 있을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한 생각이었다. 고작 해야 신규 플레이어 둘에게 이렇게 고전할 줄은 꿈에도 몰랐고, 나아가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다니.

아니, 단순히 승리를 확신할 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귀신처럼 눈동자가 삼켜진 우성을 보고 있노라면 두려움밖에 들지 않았다.

“이제 니들이 누군지 알겠다.”

초점 없는 검은 눈 때문에 정신을 차렸는지 아닌지 분간할 수 없었다. 말투 역시 어눌한 것이, 아직까지 제정신이라고 보기는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그래도 처음의 멍한 상태보다는 한결 나아 안현수의 어두웠던 얼굴이 조금 펴졌다.

“너 대체 왜 그래?”

“안… 현수.”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우성에게 오싹하고 소름이 끼쳤지만 안현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우성의 정신부터 찾는 게 먼저라고 생각하면서.

“그래, 나 현수…….”

그 때, 가장 앞에 서 있던 플레이어 한 명이 우성과 안현수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민첩 능력치가 제법인 듯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온 플레이어는 양 손에 들고 있는 단검을 X자로 교차하며 우성의 품으로 파고들…….

푹-.

육질이 꿰뚫리는 소리가 눈앞에서 들려왔다. 안현수는 단검을 교차시킨 채 우성의 아포피스에 머리가 꿰뚫린 플레이어를 보며 눈을 깜박혔다. 그야말로 찰나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머리가 꿰뚫린 플레이어는 영문을 모르겠는지 눈알을 몇 번 굴리더니 급작스럽게 숨이 끊어졌다. 푹, 소리와 함께 아포피스가 플레이어의 머리에서 빠져나오고, 이내 숨이 끊어진 플레이어의 몸이 허물어졌다.

“헐…….”

처음으로 죽인 적이었다. 지금껏 옥토퍼스를 소환해 겨우겨우 상대하던 적을, 그것도 기존 플레이어를 순식간에 쓰러뜨린 우성을 보니 헐 소리가 안 나올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안현수의 주위를 감싸고 있던 크라켄의 다리가 불에 구워진 오징어마냥 잔뜩 움츠러들고 있었다. 키에에에 하는 구슬픈 비명소리가 들렸는데, 어지간히도 겁을 먹은 모양이었다.

“이놈의 몸뚱이는 아직 형편없군.”

“응?”

“쯧. 아무래도 괜찮은 던전 하나 둘 정도는 던져 줘야지 안 되겠…….”

쉬쉬쉬쉬쉬쉭-.

느릿하고 더듬거렸던 말투가 사라지고, 또박또박 이어지던 말투에 정신이 들었나 싶어 반가웠지만 이내 날카로운 송곳들이 날아와 우성과 안현수를 노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자아를 가지고 있는 옥토퍼스의 다리가 움직여 우성과 안현수를 보호했다.

겁을 먹었어도 마물은 마물이라는 건가? 아니면 우성이 아군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건가? 처음과 같지는 않지만 옥토퍼스는 여전히 꿈틀거리며 자신의 힘을 과시하듯 다리를 크게 휘둘렀다.

촤촤촤촤촤촥-.

옥토퍼스의 다리에 박혀 있던 날카로운 송곳들이 일제히 적 플레이어들을 향해 뿌려졌다. 정예지는 빠르게 마법을 캐스팅해 방패를 형성했고, 다른 플레이어들은 민첩한 몸놀림으로 주위로 몸을 피했다.

모여 있던 플레이어들이 사방으로 퍼지자 안현수는 다시금 옥토퍼스를 들어 주위를 경계했다. 어두운 밤 골목, 게다가 워낙에 재빠른 놈들이라 한 순간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켜라, 옥토퍼스.”

키기기기-.

기어들어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옥토퍼스의 다리가 안현수의 주위를 감싸 안았다. 자신의 의지를 따르거나, 혹은 자아를 가지고 싸우던 옥토퍼스가 우성의 말을 듣자 안현수는 깜짝 놀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성은 아포피스를 손에 든 채 앞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그 방향은 곧장 정예지에게로 향하고 있었는데, 정예지는 우성이 다가오는 걸 보고는 곧장 다음 마법을 준비했다.

“죽지 말고 있어라, 어린 주인의 친구.”

“우성 너…….”

쉬이익-.

말을 마친 우성의 몸이 스프링처럼 튕겨져 나갔다. 방금 전까지 싸웠던 기존 플레이어들보다 훨씬 빠른 움직임에 안현수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정예지는 빠르게 접근하는 우성을 보며 당황한 나머지 캐스팅이 덜 끝난 상태로 마법을 구현하기 시작했다.

“플레쉬 투 스톤(Flash to stone)!”

쩌저적-.

우성의 몸을 단단한 돌이 에워싸기 시작했다. 한껏 가속되어 달려오던 우성의 몸이 점차 느려지는 걸 확인한 정예지의 입가에 씩 미소가 걸렸다.

“죽여!”

쉬쉬쉭-.

사방으로 퍼졌던 플레이어들이 다시 나타났다. 정예지의 마법으로 움직임이 제한된 우성에게 가장 먼저 샤오만이 창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마검은 감사히 받아…….”

우수수수-.

자신만만한 투의 샤오만을 비웃기라도 하듯, 우성의 몸을 감쌌던 단단한 돌이 파편이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워낙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당황할 틈도 없이 우성은 곧장 검을 내질렀다.

쩡-!

샤오만의 창과 우성의 검이 부딪혔다. 그나마 재빠르게 창을 끌어당겨 방어를 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앞의 동료처럼 순식간에 목숨을 잃을 뻔했다.

“미, 미친!”

반사적으로 욕설이 튀어나온 샤오만은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얼얼함에 팔을 떨었다. 우성의 검은 빠르기도 빨랐지만 느껴지는 힘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신규 플레이어? 말도 안 된다. 샤오만은 마치 자신들보다 더 상위의 플레이어를 만난 듯한 기분이었다.

‘정말 신규 플레이어 맞아?’

옥토퍼스를 소환한 것까지야 어찌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템에 의한 소환물은 간혹 플레이어의 구애를 받지 않고 강한 힘을 내곤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플레이어의 능력치를 상승시켜주는 아이템은 명확한 한계가 있었다. 물론 그런 아이템들의 경우, 플레이어가 성장할수록 더욱 효율이 높아지지만 적어도 신규 플레이어에게는 그런 효율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이게 뭐야?’

쨍, 째쟁-!

형편없이 뒤로 밀리는 샤오만은 순간순간 목젖을 스치고 지나가는 우성의 검에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행히 다른 동료 플레이어들이 가세해 주었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썩 좋아진 건 아니었다.

‘밀려? 우리가?’

무려 네 명의 기존 플레이어들이 합공을 펼치고 있었다. 그것도 이제 막 신규 플레이어라는 감투를 벗어난 6회 차 플레이어도 아니고, 그들은 나름 아포칼립스를 겪을 만큼 겪은 4회 차 플레이어들이었다.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없어어어어-!”

대체 특전 따위가 뭐기에! 질투심에 사로잡힌 샤오만은 눈을 희번득거리며 우성을 향해 창을 내질렀다. 순간적으로 감정에 치우친 그의 창은 방어를 도외시했다.

하지만 이대도강(李代桃?)의 공격은 아쉽게도 우성에게 먹혀들지 않았다. 우성은 창을 옆으로 피하는 대신, 샤오만과의 거리를 더욱 좁혀왔다.

“질투라… 썩 나쁘지 않은 감정이지.”

석-.

샤오만의 창대가 반으로 뚝 잘려나갔다. 바로 코앞으로 다가온 우성의 초점 없는 검은 눈을 마주한 순간, 샤오만은 소름끼치는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대상이 잘못되었구나. 올려다 본 굴뚝이 너무 높은 것 아니냐?”

피잇-.

눈앞에 보이는 우성의 몸이 반으로 나뉘며, 세상과 함께 허물어진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허물어지고 있는 쪽은 우성이 아니었다. 가느다란 혈선이 그려진 샤오만의 머리가 천천히 바닥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어?’하는 의문 섞인 한 마디가 그의 마지막이었다.

의식을 잃기 전, 샤오만의 귓가를 향해 담담하면서도 소름 끼치는 음성이 파고들었다.

“너무 높은 굴뚝을 보면, 모가지가 부러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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