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어제와 마찬가지로 왔던 길을 돌아가는 것뿐이지만 우성은 마음이 무거웠다. 쫒기는 건 아니었지만 어디까지나 ‘탈출’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걸음이 점점 빨라지며 조급함이 들었다.
마병 옥토퍼스는 안현수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옥토퍼스 또한 누군가가 노리고 있을 가능성이 있었지만 어차피 우성이 가지고 있는 아포피스 역시 노려지고 있을 게 뻔했다. 기왕이면 안현수가 가지고 있으면서 전력을 조금이라도 늘리는 게 나을 것이다.
어두운 계단을 통해 올라가며 혜미는 다시금 라이트(Light)마법으로 길을 밝혔다. 어제보다 조금 더 밝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스킬 레벨이 올랐다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계단을 올라와 낡은 천막을 나섰을 때쯤이었다.
“어?”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시나요?”
딱딱하게 걸어온 정예지는 우성과 다른 일행이 가는 길을 앞에서 가로막았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와는 달리 불길한 느낌이 들어 우성은 침을 꼴깍 삼켰다.
하지만 ‘도망가고 있다’는 말을 그녀에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정예지, 기존 플레이어들 중 마병과 마검을 노리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 이상, 그녀 역시 예외로 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숙소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오늘 경기 때문에 피곤해서요.”
“그런가요? 그런데 이상하군요.”
정예지는 고개를 움직여 우성의 반대편을 가리켰다.
“제가 알기로 당신들 숙소는 반대편이었는데 말이죠.”
“……잠시 들를 데가 있습니다. 언제까지 막아설 겁니까? 비키시죠.”
“아, 이런. 급한 일이었나요? 제가 실례했군요. 그런데 혹시 들를 데라는 곳이…….”
양쪽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휘며 정예지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워프 게이트는 아니겠죠?”
“…….”
우성을 포함한 일행은 정예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 중, 처음 정예지와 안면을 맺었던 혜미와 혜정은 입만 벙긋거릴 뿐 다른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녀들이 보기에도 처음 정예지의 인상과 지금의 모습 사이에는 괴리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길한 느낌이 더더욱 짙어져 우성은 정예지를 경계한 채 주위를 둘러봤다. 이 비밀 장소라는 곳은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듯, 주위에 다른 플레이어는 보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구석진 골목인데다가 늦은 새벽 중인지라 NPC나 투기장과 관련이 없는 플레이어들도 근처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건 오직 일행과 눈앞의 정예지 뿐…….
‘아니, 누군가 더 있다.’
정예지의 뒤쪽, 그리고 양 옆을 곁눈질로 확인한 순간, 우성은 정예지 뿐만 아니라 근처로 누군가 더 다가오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소리나 기척을 느낀 건 아니었지만 까닭 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혜미, 혜정, 현수.”
우성은 최대한 빠르게 세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정예지에게는 들리지 않은 정도로 낮고 작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너무 대놓고 속삭인 탓에 정예지는 무언가 수상하다는 낌새를 챌 수 있었다.
우성은 쉬지 않고 다음 말을 이었다.
“셋을 세면 뒤돌아서 곧장 포탈로 뛰어가. 뒤돌아보지 말고.”
“오, 오빠 갑자기 그게 무슨…….”
“두 말 하게 하지 마. 하나, 둘, 셋!”
순식간에 셋을 센 우성은 곧장 몸을 돌려 정예지의 반대편을 향해 달려갔다. 우성의 말을 이해한 안현수나 불길한 분위기를 느낀 혜미, 혜정 역시 몸을 돌려 우성의 뒤를 쫒아 뛰기 시작했다.
그 순간, 정예지가 있던 뒤쪽에서 앙칼진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잡아아아-!”
쉬식, 쉬쉬쉭-.
몇 명이나 될까? 일행의 양 옆쪽에서 숨어 있던 몇 명의 플레이어들이 그들을 향해 덮쳐왔다. 그들의 움직임은 지금껏 우성이 보아온 그 어느 플레이어들보다도 빨랐다.
“젠장!”
불길했던 느낌이 맞아 떨어졌다. 정예지뿐만 아니라 주위로 몇 명의 플레이어들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지금도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금방 좁혀진다.’
뒤쪽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몇 명의 플레이어들은 한 눈에 보기에도 보통이 아니었다. 지금껏 보아온 물렁한 신규 플레이어들과는 다른, 이미 이전부터 이곳 아포칼립스에 자리를 잡고 있던 ‘기존 플레이어’들.
우성은 물론, 안현수 역시 민첩 능력치가 썩 낮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나 혜미와 혜정이었다. 신규 플레이어들 중에서도 평균 수준밖에 되지 않는 두 사람은 빠른 속도로 적들과 거리가 좁혀지고 있었다.
‘어쩔 수 없나.’
우성은 입술을 꽉 깨물더니 이내 뜀박질을 멈췄다. 우성과 비슷한 생각을 하기라도 한 듯, 안현수 역시 열심히 내딛던 다리를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하악. 하악. 왜……?”
“혜미, 혜정. 힘들어도 멈추지 말고 일단 뛰어. 목적지는 아까 말했듯이 소도시 하멜이다.”
“오빠… 들은?”
힘든 와중에도 의문을 표하는 혜미를 보며 우성은 처음으로 그녀를 향해 눈썹을 치켜 세웠다.
“멈추지 말라고!”
골목을 울리는 외침에 혜미와 혜정은 잠시 움찔하더니 다시 이를 악물고 달리기 시작했다. 워프 게이트와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으니 이대로만 간다면 얼마 가지 않아서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타닥, 타다다닥-.
뒤를 돌아보니 적들은 빠른 속도로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빠르게 판단하지 않았다면 아마 혜미와 혜정은 순식간에 적들로부터 따라잡혀 인질이 되거나 험한 꼴을 당했을 것이다.
조금 더 거리를 좁히나 적들은 다 잡은 것이라 생각했는지 우성과 안현수의 주위를 둥글게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 수를 얼핏 세어보니 다섯이었다.
‘다섯이라… 할 만할까?’
이길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사실 가능성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돌아선 이유는 ‘어차피’잡힐 것이기 때문이었다.
“와, 당돌하네. 신규 플레이어 꼬꼬마 새끼들이.”
플레이어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검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겨 반짝거리는 이마를 훤히 드러낸 우스꽝스러운 모습의 플레이어는 바로 샤오만이었다.
건들거리는 걸음걸이를 과시하며 한 발 다가온 그는 우성과 안현수의 뒤쪽을 바라봤다. 혜미와 혜정의 뒷모습은 꽤 멀어져 있었는데, 조금만 더 밖으로 나가면 골목을 벗어날 듯했다.
“저 년들은 잡기도 힘들 것 같고… 잡아도 돈도 안 되겠고. 뭐, 얼굴이랑 몸은 좀 아깝긴 하지만.”
아쉽다는 듯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인 샤오만은 시선을 우성과 안현수에게로 돌렸다. 아니, 정확히는 두 사람이 들고 있는 ‘마검’과 ‘마병’에게로 돌렸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꼬맹이들아. 두 말 안 할게. 손에 들고 있는…….”
“몇 살인데 아까부터 자꾸 꼬맹이래?”
쿵-.
안현수는 손에 들고 있는 옥토퍼스를 거칠게 땅에 내리꽂았다. 비록 아포피스에게 발리긴 했지만 그 역시 마병이라 땅에 내려 박히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샤오만의 나이는 얼핏 잡아도 우성이나 안현수와 비슷해 보이는 정도였다. 무기나 뺏으러 온 도둑놈들에게 꼬맹이 소리나 듣자니 배알이 뒤틀린 모양이었다.
“왜 대답이 없어? 몇 살이냐고.”
“이 애새끼들이 허벌나게 당돌하네 그래…….”
“지랄하고 있네. 앞머리 깐 꼬라지 봐라. 혹시 현실에서도 그러고 다니냐? 이 시팔 양아치 새끼야?”
욕설 끝에 퉷, 하며 침을 뱉는 안현수의 모습에 우성은 피식 웃고 말았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겁이라도 먹을 법한데 안현수는 겁을 먹기는커녕 오히려 상대를 도발하고 있었다.
도발이 먹혔는지 샤오만의 두드러진 이마에는 어느새 굵은 힘줄이 올라오고 있었다. 애써 여유로운 척 웃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꽤 화가 뻗치는 모양이었다.
“내가 말이여, 너 같이 건방진 새끼들 시멘트 바닥에 담가버리는 일 하거든? 괜히 아가리 털 생각 말고 후딱 손에 들고 있는 거나 내놔. 그럼 살려는 줄게.”
“아아, 너 조폭이었냐? 아니면 마피아? 시발럼아, 난 너 같은 양아치 새끼들 감방 집어넣는 일 한다, 이 개새끼야. 어디서 아가리를 털어?”
현실에서의 직업을 밝혀 겁이라도 주려던 모양이었지만 그런 걸로 눈 하나 깜짝 할 안현수가 아니었다. 오히려 샤오만이 조폭이라는 데에 힘을 얻었을 정도로 안현수는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포인트도 아니고, 왜 그렇게 돈에 집착하지?”
그 때, 안현수와 샤오만의 사이로 우성이 끼어들었다. 상황에 맞지 않게 대화나 떠들고 있었지만 오직 포인트에만 집중하던 우성은 샤오만이나 정예지나 왜 그렇게 돈에 집착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당연한 것 아니에요?”
그 때, 천천히 걸어왔는지 정예지가 뒤늦게 도착해서 대답했다.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는 말에 돈만큼 더 잘 어울리는 게 또 어디 있나요?”
“그게 게임이라고 해도?”
“플레이어 우성, 당신은 아직도 여기가 게임으로 보여요?”
까르르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정예지가 말을 이었다.
“아포칼립스에서 포인트(Point)의 가능성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어요. 모든 가능한 일들을 다 나열하자면 끝이 없겠지만, 포인트를 현실의 돈으로 바꾸는 것도 이 게임이 가진 가능성 중 하나죠.”
“그런데 왜…….”
“생각해 봐요. 포인트를 돈으로 바꾸는 게 더 좋을까요? 아니면 이미 게임 속에서 가지고 있는 돈을 현실로 옮기는 게 더 좋을까요?”
게임 속의 물건을 현실로 가져간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우성은 둔기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게임 속 물건을 포인트를 지불해 현실로 가져갈 수만 있다면 수백 개의 금화를 현실로 가져가 돈으로 바꾸는 것도 가능했다. 어디까지나 포인트로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은 ‘소원’이라는 개념이므로, 불가능할 건 없었다.
애초에 없던 돈을 만드는 것과, 게임 속에 이미 ‘존재하는’ 돈을 옮기는 것. 어느 쪽이 더 많은 포인트를 필요로 할지는 뻔한 일이었다.
“이제 머리가 좀 돌아가요? 왜 우리가 그렇게 당신들 무기에 집착하는지?”
“……그래. 이제 좀 알겠군.”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아니, 당연한 것임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포인트의 활용 방법이 그렇게 다양할 줄이야.
‘그럼 아포피스를 현실로 가져가는 것도 가능한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순간 소름이 쫙 돋았지만, 지금 당장 확인해 볼 방법도 없을뿐더러 생각한다 하더라도 나중 일이었다. 우선은 지금 상황부터 해결하는 게 먼저였다.
“설명은 고마운데, 아무래도 못 줄 것 같아.”
“그거 아쉽군요.”
“도끼까지는 괜찮아. 그런데 내 건 아쉽게도 종속 무기라서 말이야.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네.”
종속 무기라는 말에 정예지와 샤오만은 물론, 자리에 모인 플레이어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정예지는 웃음기를 싹 지운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거야 거짓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면 알겠죠.”
역시 생각했던 대로였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말 해봤는데, 확인해 보겠다는 건 일단 죽이고 보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한숨을 푹 내쉬며 우성은 아포피스를 치켜들었다. 어차피 혜미와 혜정이야 마검이나 마병이 없으니 추적당할 이유가 없었으니 걱정할 것 없고, 우성과 안현수만 도망치면 되는 일이었다.
‘아니, 도망치긴 힘들겠지.’
정예지를 포함해 적 플레이어는 모두 여섯이었다. 신규 플레이어라고 얕잡아 본 건지, 아니면 이게 전부인지는 모르지만 그리 많은 수는 아니었다.
물론 그들 모두가 기존 플레이어라는 점이 문제였지만, 우성은 유니크 클래스 직업과 마검이 가지고 있는 힘을 믿었다. 안현수 역시 유니크 직업을 가지고 있고, 옥토퍼스라는 마병을 가지고 있는 만큼 우성 못지 않은 몫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싸우자고요?”
“그럼, ‘네 알겠습니다’ 하고 순순히 줄 거라 생각했나?”
“하여간 뭣 모르는 애새끼들이 꼭 라이프 아까운 줄을…….”
키에에엑-.
코웃음을 치던 정예지의 입이 천천히 다물어졌다. 눈앞에서 들려온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안현수가 마병 ‘옥토퍼스를’ 휘둘렀기 때문이었다.
크라켄의 열두 다리가 우성과 안현수의 주변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거 이렇게 쓰던 거였나?”